Chapter 92 - 92. 당신이 있는 곳 (1)
사람을 죽이는 삶.
마리안느의 삶에서는 항상 피비린내가 났다. 마리안느는 그녀의 창끝이 누군가의 폐부를 찌를 때마다 끊어지는 생명의 흔적을 느꼈다. 안드레 주교는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기에, 마리안느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에게는 주교의, 청교회의 명을 따르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남지 않았으니까.
“부르셨습니까, 주교님.”
풀벌레 우는 소리가 시끄러운 여름의 밤, 마리안느는 호출을 받고서 안드레 주교의 뒤편에 섰다. 주교는 교회의 의자에 앉아 담배를 태우는 중이었다. 근 몇 년간은 이단심문관들이 대거 나서야 할 정도의 대규모 이단이 발생하지 않았다. 간만에 대규모 이단이라도 발견한 걸까.
“저기 잠깐 앉아봐라.”
주교는 건너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마리안느가 얌전히 의자에 앉자, 주교는 담배를 끄고 재떨이에 집어넣으며 마리안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네게 새로운 임무를 하달할까, 생각하는 중이다.”
“예, 무엇이든 받겠습니다.”
안드레 주교는 마리안느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무슨 임무인지 궁금하지는 않나?”
“그저 임무를 내리면 시행할 뿐입니다. 의문은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더냐. 주교는 작게 웃음을 내뱉고는 등을 의자에 푹 기대었다. 마리안느의 태도가 기껍다기보다는 덧없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웃음에 가까웠다.
“이번 임무는 이단 사냥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이다. 당연히, 장기 임무가 될 테고, 아주 위험할 수도 있는 임무다. 네 목숨을 걸어야 할 수도 있어.”
마리안느는 목석처럼 주교의 말을 들었다. 하긴, 언제는 이단심문관의 임무가 안전한 적이 있었나. 안드레 주교가 중얼거리며 무릎을 짚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사 파티에 너를 보낼 생각이다. 아이시스가…, 성녀가 모종의 사정으로 용사 파티에서 탈퇴하게 되었거든. 그 빈자리를 일단 너를 보내 메우려 한다.”
마리안느는 아주 희미하게 망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물어보고 싶은 점은 없나?”
“없습니다.”
그저, 말하면 말하는 대로 따르고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마리안느에게는 의문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안드레 주교는 뒷짐을 지고는 교회의 구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네게 새로이 빌려줄 무기가 있다.”
주교는 교회의 구석 탁자 위에 놓여있던, 천에 감싸인 창을 들어 마리안느에게 건네주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무기. 마리안느의 표정에 처음으로 작은 변화가 생겼다. 마리안느의 반응을 보며 안드레 주교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성창이다. 한동안 쓸 적임자가 없어서 누구에게 줘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계속 창고에서 썩히는 것도 아까우니 이번 기회에 네게 빌려주기로 했다.”
“…그렇습니까.”
마리안느는 성창에 감긴 천을 풀며 대답했다. 천이 풀리면서 성창의 성스러운 마력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무감정한 눈으로 성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영감님에게는 적당히 일러뒀다. 나중에 알게 되면 또 노발대발 할테니, 나는 당분간 카이로스 왕국에서 몸이나 사리고 있어야겠군.”
그 영감님이라 하면, 안드레 주교가 교황을 일컫는 호칭이었다. 안드레 주교는 성창을 든 마리안느를 바라보며 고개를 슬며시 끄덕였다.
“용사 파티에 있기 위해서는 그게 필요할 거다. 네가 여태 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싸움을 하게 될 테니까. 조만간 용사님과도 만날 기회가 있을 거다.”
다른 싸움. 마리안느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주교의 의미심장한 웃음을 바라보며, 마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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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로이가 안개 안으로 들어간 지 어느덧 닷새가 지났다. 마리안느는 그녀의 방이 아닌 일로이의 방에 들어앉았다. 싸늘하게 식은 침대의 구석에 무릎을 모으고 마리안느는 차가운 숨을 내쉬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식사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창을 통해 빛이 들어왔다 어둠이 찾아왔다 하기를 반복했다.
“…용사님.”
마리안느는 발치에 놓인 나침반을 바라보았다. 나침반은 계속 비슷한 곳을 맴돌며 진자 운동을 계속하다가, 며칠째 같은 곳을 가리키며 멈춰있었다. 그 움직이지 않고 멈춰있는 모습이, 마리안느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째깍.
이렇게, 한 시간에 한 번 바늘이 조금씩 움찔거릴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일로이는 정말 괜찮은 걸까. 나는 여기서 뭘 하는 걸까.
마리안느는 나침반 위로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성국의 분위기는 조용하고, 침체되어있었다. 모두가 용사의 소식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상황. 교황청의 뒤편, 안개가 있는 곳에는 이제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다. 그를 기다리는 것보다, 차라리 잊고 있는 편이 훨씬 편한 것이겠지.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 문이 열리고 마리안느가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리자, 게오르그가 한 손에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서 문가에 있었다.
“너도 그런 꼴로 앉아있었나.”
게오르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방 안에 들어와 책상 위로 접시를 놓아두었다. 마리안느는 김이 피어오르는 접시를 흘긋 보고는 관심이 없다는 듯 다시 나침반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프네는 며칠 내내 그 창고에서 가져온 마도서를 읽고 있더라. 눈이 완전히 새빨개진 채로 말이야. 저러다가 나중에 쓰러지는 게 아닌가, 싶더니 너도 비슷한 모습이었군.”
달칵. 수저가 책상 위에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걱정하고 있는 걸 일로이도 바라지는 않을 거다.”
게오르그는 물잔을 접시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신을 믿고 기다려주기를 바라겠지. 우리가 언제나 그를 믿어주었던 것처럼 말이야. 그가 퀘노어 대공을 구하기 위해 말을 타고 달려갔을 때를 생각하면 돼.”
게오르그는 자조하면서 말했다.
“…그때는 일로이가 우리에게 뒤를 맡겼지만 말이야.”
게오르그는 품속에서 일로이의 편지를 꺼내 흔들었다.
“내 최선은 지금 일로이를 믿고 기다려주는 것. 그게 일로이가 내게 보여준 성의에 보답하는 일이고, 세상을 구하려는 용사를 도울 유일한 방법이잖아.”
게오르그는 일로이의 의자를 툭툭 두드리고는 다시 문가로 걸어갔다.
“…밥은 먹으면서 기다려라. 자기가 부재한 동안 너나 다프네가 쫄쫄 굶고 있었다는 말을 들으면, 일로이도 영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테니까.”
게오르그의 말과 함께 문이 닫혔다. 마리안느는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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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느 언니도, 우리 성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마리안느는 처음으로 다른 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카린이 부끄러운 듯한 홍조와 함께 용사 파티의 파티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넬 때였다.
사람을 죽이지 않은 싸움이었다. 마리안느는 그 사실을 깨닫고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묻어있는 건 사람의 피가 아니었다. 들려오는 건 증오와 멸시에 찬 신음이 아니었다.
“그래, 우리가 함께 지켜낸 거야.”
마리안느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휠체어에 앉아있는 일로이가 있었다. 그런 미소는 마리안느가 처음으로 본 것이었다. 떨떠름하거나, 어색한 쓴웃음이 아니었다. 다른 모든 감정이 배제된 가장 순수한 기쁨에서 오는 뿌듯한 미소.
“그렇습니까.”
마리안느의 입에서 나온 ‘그렇습니까’라는 대답도, 평소와는 다른 울림을 담고 있었다. 이 감각을 마리안느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저 사람이 뿌듯해하는 모습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크게 다가온 건지, 마리안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곳을 향해 내달리는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그렇지 않다면….
‘다녀올게.’
그때, 당장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사람의 눈을 하고 있어서 그랬을까. 빛과 온기를 보여주면서, 자신은 그 빛과 함께 사라져버릴 장작처럼.
“왜 그래?”
마리안느는 일로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몸조심하십시오.”
일로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휠체어 신세의 몸을 내려다보며 큭큭 웃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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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풍경이 마리안느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리안느의 실력을 직접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녀는 아주 강한 이단심문관 중 한 명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큰 전력이며, 이단들을 검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지요.”
다시 사람을 죽이는 삶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마리안느는 그 말에 따라야 했다. 자신의 목숨은 새로 얻은 것. 청교회가 구해준 것이기에, 그들의 것으로 살아가야 했으니까.
일로이는 달랐다.
누군가를 구해주고는, 그냥 떠나버린다. 그 목숨의 무게를 짊어지면서도 값을 계산하려 하지 않았다.
“당장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정보가 너무나 부족하니까요. 생각할 시간이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대답을 들려드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가 누군가를 구할 때 담보로 내거는 건, 항상 자기 자신이었다. 마리안느는 그 숨겨진 위태로움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 희생이, 마리안느는 싫었다. 마리안느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싫다’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잡으며 자리에서 비틀비틀 일어났다. 마리안느는 일로이의 명령을 부정했다.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다. 그를 찾아서, 어떻게든 붙잡고 말할 거다. 가지 말라고. 스스로 희생할 거라면 적어도 함께 하자고.
“…읏.”
마리안느는 벽에 기대놓은 성창을 집었다. 몸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기운을 되찾았다. 나침반을 품에 넣고, 마리안느는 건물을 나섰다. 완전한 암흑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높이 솟은 교황청의 건물을 향해 마리안느는 걸었다. 안개의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조금씩 조금씩 마리안느는 걸어갔다.
“당신이 왜 거기 있는 거죠.”
그리고, 교황청의 뒤편. 마리안느는 의외의 인물과 마주했다.
“혹여 어떤 바보가 일로이의 당부를 어기고 안개로 들어가려 시도할까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당신의 기척이 평소와는 다르게 너무 잘 느껴지더라고요.”
다프네는 교황청의 성기사들과 함께 마리안느를 가로막으며 조금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혼자 방에 앉아 계속 울고 있던 것의 여파인 것 같았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얼굴은 마리안느와 똑같이 잘 먹고 자지 못해 초췌했다.
“바보가 여기 하나 있었군요. 돌아가세요, 마리안느. 아직 일로이가 약속한 기한이 되지도 않았어요. 지금 저기 들어가면 오히려 방해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마리안느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말, 용사님이 잘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전 일로이를 믿고 있어요.”
마리안느가 성창을 내리며 쥐었다.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지금의 용사님에게는.”
“저라고, 도와주고 싶지 않아서 가지 않는 게 아니에요.”
다프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그녀의 보랏빛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제가 가서 그에게 괜한 방해가 될까 봐. 일로이에게 도움이 되어주지는 못할망정 폐만 끼칠까 봐. 그게 두려운 거죠.”
다프네는 마력을 끌어올리며 각오를 다잡은 눈으로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당신을 들여보낼 수는 없어요, 마리안느. 나를 겁쟁이라 매도해도 돼요. 하지만 일로이에게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일은 절대 할 수 없어요. 나도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그를 도와줄 수 있을 방법을.”
마리안느는 성창을 두 손으로 강하게 붙들었다. 금빛 마력이, 마리안느의 몸을 타고 흐르며 발치에서 회오리쳤다.
“…말을 듣지 않네요, 당신은.”
눈물에 젖은 다프네의 눈동자가 마력의 빛에 반사되어 더 반짝였다. 마리안느는 훨씬 강대해진 그 압박을 느끼며 창을 겨누었다.
“…저는 용사님이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마리안느는, 처음으로 만든 다짐을 위태롭지만 담담하게 말했다. 다프네는 그런 마리안느의 모습을 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