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3 - 93. 당신이 있는 곳 (2)
“…저는 용사님이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프네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두 사람의 힘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마리안느는 성법기 너머로 짓눌러 오는 순수한 마력의 창을 느꼈다. 다프네의 마력 운용과 규모는 고작 며칠 사이 몰라볼 정도로 발전했다. 마리안느를 어렵지 않게 압도할 정도로 말이다.
“그건 나도…!”
뿌드득. 균형의 추가 기울어지는 소리가 났다. 얼음 위로 생기는 금처럼, 균열이 파고들어 마리안느의 성법기를 짓눌렀다. 다프네는 한층 더 무거운 마나를 쏟아내며 마리안느를 밀어내려 했다. 힘이 모이고 모이자, 폭발하려는 것처럼 밝게 빛나며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예요!!”
콰과과광-!!
굉음과 함께 마력이 폭발했다. 마리안느는 성창을 붙든 채, 태풍 앞의 짚 더미처럼 힘없이 튕겨 나갔다. 다프네는 허공에 붕 뜬 마리안느를 향해 손을 쭉 뻗었다. 마력의 사슬이 다프네의 발치에서부터 뻗어 나와 마리안느를 포획하려는 듯 똬리를 틀며 쏘아졌다.
“저도 일로이가 잘하고 있을지 불안해요. 그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마리안느는 공중에서도 마력의 발판을 만들어 날아드는 사슬을 유려하게 피하며 바닥에 착지했다. 다프네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손을 아래로 밀어 내렸다. 마력 사슬이 마리안느의 머리 위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난… 그보다 그를 더 믿으니까. 나 때문에 그가 잘못되는 게 싫으니까!”
마리안느는 성창을 휘두르며 오는 사슬을 막아냈다. 수십 갈래로 나뉘어 날아드는 사슬을 쳐내는 건 수십 명의 사람을 상대하는 것과 비슷했지만, 마리안느에게는 이미 이골이 난 일이었다. 쳐내고, 흘리고, 피한다. 다프네의 사슬은 사냥개처럼 끈질기게 마리안느를 사방에서 엄습해오고 있었다.
“그러니 거기서 멈춰요, 마리안느. 난 당신을 보내고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마리안느는 자신을 둘러싼 막대한 마력의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다프네는 살상용 마법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6서클 마법사의 전력은 살상용 마법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쉽게 뚫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내게 뒤를 맡길 수는 있어도, 자신의 옆에 나란히 세울 수는 없을 테니까. 그 뒤라도 내가 지켜줄 거예요.”
다프네의 의지는 굳건했다. 마리안느는 평소의 유하던 그녀의 태도와는 상반되는 강직한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지. 마리안느가 평생 가져본 적이 없는 것. 마리안느에게 이제 피어나기 시작한 그건 다프네가 내비치는 것과 비교해서 작고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빛나는 태양 아래에 있는 작은 불씨와 같다고 할까. 마리안느가 성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지지 않을 거다.
마리안느는 창을 다시 겨누었다. 의지 없이 끝까지 싸우는 건 익숙했으니까.
“정말, 당신도 끝까지 고집스럽네요.”
그렇게 말하는 다프네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고집스럽다는 말. 억척스럽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사람. 그게 일로이와 어쩐지 조금은 닮아있는 것 같아서.
“…이러면 조금 더 강경하게 나가도 되겠죠.”
다프네는 애써 떠오르는 생각을 무시하며 마리안느에게 사슬을 날렸다. 마리안느는 성창을 감싸는 성법기를 위로 쳐올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사슬이 끊긴다. 다프네는 다가오는 마리안느를 저지하기 위해 다른 마법을 쏟아붓기 시작했지만, 마리안느가 대처하는 방법만 더 능숙하게 만들어줄 뿐이었다.
“살상 계열 마법을 사용하시지 않겠다면, 절 막는 건 힘들 겁니다.”
다프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마리안느는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프네가 사용하는 마법의 위력 또한 점점 강해지고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마리안느를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마법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게 두 사람 사이의 균형의 추를 다시 돌려놓았다.
“마음만 먹으면 당신을 상처투성이로 제압할 수야 있겠지만, 전 당신을 상처입힐 생각은 없어요. 물러나요, 마리안느. 그렇게 하기 싫으니까.”
그 차이가, 이 대결의 승패를 바꿔놓았다. 마리안느는 성창을 앞으로 뻗었다. 다프네의 마법이 흩어진다. 불과 얼음의 벽이 마리안느를 가로막았다. 불은 뚫었고, 얼음은 부쉈다. 마리안느의 옷자락이 마력의 불꽃에 그슬려 타버렸다.
“그러니 제발… 물러나.”
파지직.
얼마 남지 않았다. 다프네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대부분의 비살상 계열 마법을 쏟아부었지만, 마리안느는 개의치 않고 계속 전진했다. 날카로운 고드름에 팔이 긁히는 것도, 타오르는 불에 조금씩 화상을 입고 머리끝이 타는 것도.
다프네의 눈은 마리안느를 담고 있었지만, 마리안느는 다프네를 눈에 담고 있지 않았다. 째깍. 마리안느의 품속의 나침반이 다시 조금 움직였다.
마리안느는 창을 휘저었다. 다프네는 그녀의 마법이 부서지는 것을 바라보며 마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마력의 응집력은 다프네 자신이 정해둔 선에서 넘나들고 있었다. 다프네의 말 한마디면 이 마력이 불벼락이 되든, 얼음 창이 되든, 돌기둥이 되든 마리안느를 덮쳐 날려버릴 거다. 그리고 일로이가 방해받는 일도 없겠지.
그 주문 한 마디면.
콰과과광-!!
마력이 깨졌다. 발동 직전의 취소로 인한 마력 폭발과 굉음이었다. 다프네는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 앞에 선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다친 곳이 많아 보이진 않았지만, 꼴이 엉망이었다. 다프네는 저 막무가내인 아가씨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들어가면, 일로이를 찾아올 방법은 있는 건가요?”
마리안느는 말없이 품속에 넣어두었던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지금도 나침반의 바늘은 안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로이가 홀로 안개 안으로 걸어 들어갔던 그때부터, 쭉.
“…치사하네요.”
다프네는 그리 중얼거리며 벌렁, 땅바닥 위로 드러누워 버렸다. 겨울. 새해를 고작 사흘 남겨둔 밤은 추웠다. 차가운 돌바닥에서 한기를 밀어 올렸다. 솨아아, 하고 바람이 땅을 쓸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다른 물건이나 볼걸. 괜히 마도서에 눈이 뒤집혀서.”
다프네는 자조하듯 웃었다. 쭉 뻗은 손에서 마력의 불길이 작게 솟아오르다 꺼졌다.
“나는 거기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지금도 바깥에서 안개 내부의 마력에 간섭할 수 있을 방법을 간절히 찾고 있으니까요. 서클이 한두 개 정도는 더 필요하겠지만, 뭐 그 정도도 할 수 없을까요? 홀몸으로 재앙을 상대하러 들어가는 무식한 사람이 둘이나 있는데.”
다프네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마리안느는 가만히 그녀의 보랏빛 눈을 마주하며 다프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일로이만을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마리안느, 당신도 우리 동료, 전우고, 파티원이잖아요. 일로이라면 정말 홀로 재앙을 상대할 수 있겠지만, 마리안느, 당신은 아니에요.”
마리안느의 금빛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난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마리안느는 희미한 목소리로 다프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설령 안개 속에서, 마력을 흡수당해 죽는다고 해도 겨우 저 한 명 더해지는 것뿐이고, 대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겁니다.”
마리안느가 보유한 마력의 양 자체는 아주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녀의 힘은 순전히 몸과 창을 다루는 실력, 그리고 성법기로 전환한 마력의 질 때문이었다.
“일로이가 그랬잖아요, 실낱같아도 구할 가능성이 있는데, 왜 포기하냐고.”
마리안느는 굽혔던 무릎을 펴며 발을 떼었다.
“…조심하세요. 당신이 잘못된다면, 일로이가 어떻게 될지는 상상도 하기 싫으니까.”
“그때는 다프네, 당신에게 뒤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마리안느는 그리 말하며 멀어졌다. 다프네는 눈살을 찌푸리며 멀어지는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다프네는 남은 마력을 끌어올려 마리안느에게 전달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일로이에게 써준 마법이자, 가장 자신있어하는 마법, 방호마법이었다.
“이왕 들어간 거, 무사히 일로이를 데리고 돌아와줘요.”
제 몸에 걸린 방호마법에 신기한 듯 눈을 깜박이는 마리안느에게, 다프네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마법이 적어도 이틀, 삼 일은 유지되도록, 가진 마나를 모조리 때려박는 건 덤이었다. 다프네는 그리고서 완전히 힘이 빠진 팔을 내려놓았다.
“두 사람 무사하게 나오면, 그때부터 잔소리 시작할 거라는 것도 알아두고.”
“…알겠습니다.”
마리안느는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펴다가, 안개를 바라보았다. 대놓고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듯한 동굴과는 달리, 안개는 들어오든 말든 관심이 없다는 듯 제자리에서 꿈틀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왼손에 쥐고 있던 나침반을 들어 올렸다. 나침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리안느의 정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째깍.
다시 나침반의 바늘이 움찔거렸을 때, 마리안느가 발걸음을 떼었다. 무관심한 척하던 안개는 새로운 먹잇감이 나타나자 본색을 드러내었다. 마리안느의 손이 안개에 닿자, 안개는 순식간에 그녀를 집어삼켰다. 마리안느가 사라진 자리에는, 마법으로 타고 남은 옷자락의 재가 조금 남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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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뱃멀미 안 할 거 같은 사람이 저러고 있으니까 웃기지 않아요? 나중에 어떻게 싸우려고 저러고 있는 건지.”
나는 다프네의 목소리에 고개를 슬쩍 돌렸다. 이번이 몇 번째지, 저 말을 듣는 게? 환상 속의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매번 달라지고 있었지만, 그들이 내게 먼저 걸어오는 말은 항상 같았다. 나를 반복 속에 가둬두고 있음을 강조하는 거다. 그렇다고 저들이 게임 속의 NPC처럼 느껴지지는 않도록, 나와 나누는 대화는 항상 다르게 하도록 한 거고.
“아침을 얼마나 먹었길래 계속 저러고 있는 거래.”
“제가 적게 먹어두는 게 좋을 거 같다고 경고를 했는데도 계속 저러네요.”
내 무심한 대답에, 다프네는 웃으며 대답했다. 바닷바람은 이번에도 많이 불지 않았다.
익숙해졌다. 이젠 육지에 서있어도 흔들림이 느껴질 정도였다. 바깥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옆으로 걸어오는 마리안느도 바라보았다. 이 빌어먹을 재앙은, 마리안느가 죽는 모습을 참 다양하게도 보여주었다. 다리가 잘리든, 목이 잘리든, 가슴이 뚫리든, 깔아뭉개져 죽든 말이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군요.”
마리안느가 경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번에도 그녀가 죽는 모습을 보아야 할까. 언제까지 이 반복을 계속해야만 하는 걸까? 도대체 안개는 언제까지 내게 이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걸까. 내가 다 포기하고 크라켄에게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아니면,
“준비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환상 속에서, 내 동료들, 그리고 함께 싸울 사람들의 죽음에 무감각해질 때까지?
성검을 거머쥔 내 손이 벌벌 떨렸다. 그렇게 해서 내가 남의 죽음에 점점 더 무감각해진다면? 나를 부정하고, 내가 내세운 결심을 부정하고, 주변인의 희생을 내세워 다수를 지키는 기계가 되어버릴 때까지?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철썩거리는 바다. 그 끝에 바크틴스의 끝자락이 희미하게 보였다.
내가 아르옌처럼 구원을 부정하고, 해안에 크라켄을 상륙시켜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 짓거리도 영원히 반복할 수는 없을 거다. 언젠가는 안개도 내게 이 환상을 보여줄 만큼의 마력을 잃을 거다. 이 정도 규모의 환상이라면, 아마 엄청난 양의 마력을 계속 쏟아부어야 할 테니까.
그렇게 믿어야만, 내가 꺾이지 않고 계속 이 속에서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점차 가까워지는 해로의 끝을 바라보았다. 파도는 다시 넘실거리고, 마물들이 목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울은 마물의 떼와 섞여 밀려온다. 나는 그 새카만 파도를 바라보며 포술장과 함장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포 장전!!”
뱃머리가 돌아갔다. 쏠리는 감각에 다프네와 게오르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성검을 잡은 손에 힘이 빠지지 않도록, 나는 단단히 오른팔을 주물렀다.
그리고 다시, 처절한 환상 속의 전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