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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94화 (95/158)

Chapter 94 - 94. 당신이 있는 곳 (3)

“마리안느.”

마리안느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성국 겨울의 추위와는 결이 다른 칼바람이 마리안느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긴,

“내가 평소에 이걸 머리에 쓰는 걸 봐서 알겠지만, 아마 성공하기는 쉽지 않을 거야.”

방이었다. 일로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익숙한 말. 마리안느는 또 익숙한 손이 목함을 열고 닫는 모습을 확인했다. 가시 면류관이 오랜만에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면류관을 잡는 일로이의 손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눈은 확신과 불확신 사이의 경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일로이는 그때, 마리안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시련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의식을 잃고 쓰러지게 될 거야. 그럼 그 즉시 어떻게든 나를 깨워서 리스에게로 데려다줘.”

마리안느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 일로이가 머리 위로 면류관을 썼다.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몸을 움찔거리더니, 일로이는 무릎을 꿇고 침대 위로 주저앉았다. 앞으로 고꾸라질 만도 한데, 기둥에 몸이라도 묶어놓은 것처럼 일로이는 뻣뻣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내가 왜 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거지?

마리안느는 멍하니 일로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의 기억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일로이는 거인을 격파하고 퀘노어 대공을 구해올 작정으로 면류관의 시련에 도전했고, 마리안느는 마음을 졸여가며 옆에서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

“용사님.”

마리안느는 작게 중얼거리며 다가갔다. 아픈 기억이었다. 어째서 그를 아프게 기억하는지. 마리안느는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일로이는 시련에 들어가고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리안느는 가까이 다가가며 일로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자는 듯 감긴 눈. 그 너머로 길게 뻗은 속눈썹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가 깨어나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니야.”

일로이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마에서는 식은땀마저 흘리기 시작했고, 축 늘어진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저도 모르게 다가가 그 손을 붙들었다. 일로이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 손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지켰을까. 마리안느가 손을 붙잡자, 일로이의 얼굴이 조금 편안해진 것 같았다.

“…아니야.”

마리안느는 망설이듯 일로이의 손을 문질렀다. 마리안느는 그때 자신의 심정을 떠올렸다. 일로이가 면류관의 시험을 통과하고 눈을 뜬다면, 분명 일로이는 다시 성검을 집어 들고 싸움에 나설 거다. 마리안느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목숨을 걸고서 말이다.

불안했다. 그저 그를 보내고서 지켜봐야만 하는 마음이 불안했다. 사실은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적어도 홀로 싸울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또 하지만. 마리안느의 생각은 반박과 반박 속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

그리고, 일로이의 머리 위에 올려진 면류관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쩌적, 쩌적 하면서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늙고 말라비틀어진 나무줄기의 조각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면류관이 모두 부서졌다. 마리안느는 면류관을 대신해 머리 위로 떠오르는 빛나는 고리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일로이가 깨어날 거다.

“성공한 건가.”

일로이는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마리안느의 심장이 조금씩 두근거렸다. 불안감. 자신의 마음은 그것을 불안감이라 말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붙잡아라. 마리안느의 본능은 그리 말했다.

“다녀올게.”

마리안느는 떠나가는 일로이를 바라보았다. 이제 일로이가 퀘노어 대공을 구하기 위해 적의 본진으로 쳐들어간다면 자신은 성벽을 마물로부터 막아내기 위해 싸우러 가야겠지.

째깍.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 분주한 발소리가 뒤이어 들려왔고, 마리안느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기사들을 마주했다.

“방어전을 준비해야 합니다. 규모가 아주 크지는 않지만, 다시 마물들이 밀려오고 있어요.”

마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성창이 쥐여 있었다.

“마물이, 몰려오고 있다고요.”

마리안느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채근하는 기사들의 눈이 보였다. 마리안느는 성창을 주무르다가, 내려놓았다. 기사들의 표정의 의문에 감싸였다.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 들어왔는지, 마리안느는 아주 천천히 기억하려 했다.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리가 뿌옇다.

“시간이 없습니다, 마리안느님. 게오르그 단장님과 다프네님도 지금 서둘러 성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마리안느는 반쯤 끌려가듯 기사들을 따라 성벽 위로 올라갔다. 마리안느의 기억을 스치는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병사들은 악을 쓰며 마물을 성벽 밖으로 밀어냈고, 기사들은 검을 휘두른다. 마리안느는 거의 습관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창을 휘둘러 날아드는 마물을 죽였다.

“마리안느!”

자신을 반기는 게오르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프네도 고개를 흘긋 돌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마리안느는 성벽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한계선이 만들어놓은 뿌연 하늘이 지척에 있었다. 저 속에서, 일로이가 싸우고 있을 거다.

“저쪽 성벽이 부실해. 잘못하다가는 마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방어벽이 무너져버릴 수도 있다. 네가 가서 지원을 해줘야 할 거 같아.”

일로이가 없을 때는 든든한 사령관 역할을 맡아주는 게오르그가 그리 말했다.

“부탁한다. 일로이가 맡기고 간 일이야. 한 사람이라도 덜 죽게 하는 게 우리 임무라고.”

마리안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게오르그는 그리고서 방패로 달려드는 마물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알겠…습니다.”

마물을 죽였다. 마리안느는 피를 쏟아내는 창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의 소음이 점차 멀어져갔다. 마리안느의 기억을 감싼 안개가 서서히 흩어지려 하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눈앞으로 달려드는 흰늑대의 목을 쳤다. 그와 동시에 마리안느의 품속에서 둥그런 물건이 하나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침반.

마리안느는 멍하니 성벽으로 떨어진 나침반을 바라보았다. 나침반의 바늘은 지금도 어딘가를 가리키며 제자리에서 조금씩 움찔거리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집어 들었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 마리안느는 그곳을 바라보며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마리안느! 어디 가는 거야!”

등 뒤에서 비명과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안느는 성창을 들어 올렸다. 비명을 지르는 다프네가 달려드는 흰늑대를 감당하지 못하고 물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그 뒤에서는 게오르그가 잿빛곰 하나를 쓰러트리지 못해 몸이 으스러지고 있었다.

원망이 담긴 눈길, 도움을 요청하는 손.

아니. 마리안느의 동료들은 저렇게 당하지 않는다. 위급한 상황이 왔을 때 결코 그녀를 찾지도 않을 거고, 애초에 위급한 상황을 만들지도 않을 거다. 마리안느는 갑자기 시간이 멈춘 듯 얼어붙은 세상을 돌아보았다. 허공에 흩날리는 핏방울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니, 안개가 되어 흩어져 사라졌다.

그녀가 잡아야 할 손은 저게 아니다. 마리안느는 일로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이 가서 구해줘야 할 사람은 한계선 너머에 있지도 않다.

이곳은, 지금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자신이 구해야 하는 건 저런 허상 속의 존재들이 아닌, 저 허상들과 싸우고 있는 사람이었다. 심장이 맥동하며 마력을 피워 올렸다. 마리안느는 그녀의 다리를 감싸는 성법기의 힘을 느끼며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성벽이 무너진다. 겨울의 추위는 사그라들고 마물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마리안느는 어느새 에버노드의 단단하게 굳은 땅이 아닌, 건물의 바닥과도 같은 땅을 밟고 달려 나가고 있었다. 안개는 그녀를 이제 가로막지 못했다.

용사님.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내려다보았다.

째깍.

나침반이 움찔거렸다. 마리안느는 나침반만을 바라보며 달렸다. 지금, 일로이는 대체 무엇을 보면서 싸우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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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님….”

힘이 빠져 축 늘어진 마리안느의 몸을 붙잡고 나는 미약하게 숨을 내쉬었다. 바깥의 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까,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 끝도 없이 반복되는 미친 하루 속에서,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쓸 뿐이었다. 절대 내가 내 선택을 번복하는 일이 없도록,

“마리안느.”

나는 마리안느를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마리안느는, 그녀의 환영은 눈을 뜬 채로 숨을 거두었다. 나는 그 두 눈을 슬며시 감겨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살이 난 해로, 침몰한 배. 내가 여기서 눈을 감았다 뜨기만 하면, 난 다시 그 빌어먹을 천막 앞에 서 있을 거다.

“이제 깨달았나?”

나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안개의 환상이 나를 보며 희미한 비웃음이 담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르옌의 얼굴.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화조차 낼 수 없었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얼마나 허황한 일인지, 너는 알겠지. 네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도,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때면 네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흔들리는 건, 내 생각 때문이지 저 녀석의 말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만약 바크틴스의 주민들을 저버리는 선택을 한다면, 다음 환영은 무엇을 보여줄 생각이냐, 안개? 고통받는 바크틴스의 모습? 나를 질책하며 종말 숭배자로 변해버린 주민들?”

나는 헛웃음을 내뱉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무너지지 않아. 대상을 잘못 골랐어. 네가 소지한 마력이 전부 소진될 때까지 상대해줄 의향도 있으니까. 얼마든지 계속해보라고.”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죽음에 마모되어 감정이 닳아 없어지든, 안개의 마력이 고갈되든.

“뭐? 내가 소지한 마력?”

아르옌… 아니, 안개는 눈이 동그래진 채 되묻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겠다는 듯, 배를 부여잡는 시늉을 하며 허리를 꺾는다.

“용사 너, 지금 진짜 정신이 나갔군. 이거, 내가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하나 건질 수도 있겠어. 내 예상 밖으로 잘 되고 있잖아.”

“…그건 대체 무슨 말….”

그때, 아르옌의 얼굴이 다른 이의 얼굴로 바뀌었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였다.

추레한 행색을 하고, 옷은 너덜너덜해진 채로, 며칠 동안이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의 얼굴을 한 일로이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거울 너머로 아르옌의 모습이 나타났다.

“너, 네 몸 상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고 있었군. 정말로 내 세상을 실제 세계라고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나는 손을 들어보았다. 들리는 팔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지금 보여주는 풍경, 정말 내 마력으로 보여주는 것 같나?”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혈액과 함께 맥동해야 할 거대한 마나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반 이상이 사라진 것이다.

“넌 이미 졌어, 용사. 그리고 내가 네게 보여줄 건, 결코 행복한 기억이 아니라는 건 알아둬라.”

나는 얕은 숨을 내쉬었다. 안개는 그런 내 표정을 바라보며 만족한 듯 낄낄거리는 웃음을 다시 한 번 토해냈다.

“널 소화시키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세상을 집어삼킬 일만 남았군.”

아르엔의 형상은 조금씩 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리’의 숙원을 방해한 대가는 제대로 치러야 하지 않겠나.”

나는 성검을 뽑아 들고 거울을 베어버렸다. 그리고, 거울이 부서지며 나타난 풍경은 다시 익숙한 천막이었다.

“일로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용사님, 오셨습니까.”

나는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다시 불어넣었다.

==

달렸다.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달렸다. 마치 같은 곳을 계속 맴돌기만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침반은 언제부턴가 갑자기 휙, 제자리를 빙빙 맴돌기 시작했다. 일로이의 근처에 다다른 건 확실했다.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저, 절박한 생각뿐이었다. 용사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 뛰어넘을 수만 있다면. 마리안느는 간절하게 성창을 쥐었다. 여태 한 번도 답을 들려준 적이 없는 무기였다. 마리안느 역시 성창의 힘을 필요로 해본 적은 없었다. 이 빌어먹을 안개를 걷어내고 용사가 있는 곳에 닿아야 했다.

마리안느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땅 위로 성창을 꽂았다. 이 성유물을 깨울 방법은 자신도 모른다. 일로이가 그랬듯, 자신도 무작정 들이받는 수밖에 없었다.

“…부탁합니다.”

마리안느는 성창이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는 자신의 마력을 있는 대로 때려 박기 시작했다. 금빛의 아지랑이가 마리안느의 손 끝에 맺히며 성창으로 전달되었다. 성창은 성법기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을 손에 쥔 자가 무슨 일을 하려는 지 알고 있기라도 하듯.

“크윽…!”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마력에, 마리안느는 아찔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주춤거리기는커녕 창대를 더 강하게 부여잡고, 쏟아붓는 마력을 늘려갔다. 온몸이 탈력해 쓰러질 때까지, 그래도 부족하다면, 자신의 생명을 태워서라도-

그만하면 됐다.

마리안느는 반쯤 탈력한 상태가 되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으로 마력이 조금씩 다시 흘러들어왔다.

투정 부린다고 들어주는 건 취향이 아니지만, 그 정성이 갸륵하니.

그리고 그 정체 모를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성창이 빛나기 시작했다. 마리안느는 솟구치는 거대한 힘을 감당하려 이를 악물었다.

쩌저적.

마치 알에 금이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안느는 서서히 갈라지는 공간, 그리고 그 너머로 드러나는 풍경을 마주했다.

바다의 냄새가 났다.

바다의 냄새를 덮어버릴 정도의 악취와 비린내도.

“…이건, 대체,”

그리고, 그 비린내의 끝에 선 사람이 하나 있었다. 마리안느가 구하려 온 사람.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채 거대한 마물과 맞서는 일로이. 마리안느는 저도 모르게 품속의 나침반을 꺼내 들었고,

나침반은 틀림없이 저게 자신이 찾는 일로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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