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6 - 96. 당신이 있는 곳 (5)
따뜻하다.
나는 하려던 말도 잊고,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도 잊어버린 채 굳어져서 끼쳐오는 마리안느의 향을 맡았다. 마리안느는 눈을 꼭 감고 있었고, 어색하게 내 얼굴을 붙잡고 있었다. 몸을 슬쩍 뒤로 빼려 해도, 마리안느가 강하게 붙들고 있는 힘이 나를 다시 앞으로 잡아당겼다. 살짝, 내가 입술을 움직이자 마리안느의 어깨가 움찔 떨리는 게 보였다. 그게 묘하게 다시 현실감이 느껴져서, 나는 덩달아 눈을 감아버렸다.
처음인 듯, 혀는 오고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주 오래 이어졌다. 주변 풍경이 멀어지고, 바다의 냄새는 풍겨오지 않는다. 내가 작게 숨을 내쉬자, 마리안느가 슬쩍 고개를 아래로 내리며 입술을 떼었다.
“용…사님.”
마리안느는 달빛처럼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눈이 너무 많은 것을 내게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조금 부끄럽습니다.”
마리안느의 몸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두 뺨 위로는 새빨간 홍조를 띤 채. 그녀답지 않은, 어쩌면 너무나 그녀다운 그 모습에 일로이는 그만 작게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그런 일로이를 마리안느는 조금은 불만스럽다는 듯한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우물쭈물하다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숨을 들이마신 후, 다시 열었다.
“저는 환영 따위가 아닙니다. 당신을 구하러… 도와주러 왔어요.”
나는 그리 말하는 마리안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력. 아주 정상적이다. 내 마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지만. 마리안느가 쥔 성창은 성법기와는 다른 기묘한 빛을 내뿜으며 일렁이고 있었다. 아마 마리안느가 성창의 개방에 성공한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마리안느를 바라보다가, 옅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왜 이름으로 날 부르다가 만 거야?”
내 뜬금없는 질문에, 마리안느는 눈을 깜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질문을 하냐고 물어보는 것 같은 눈이었다.
“그건…용사님이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하셔서….”
“이름으로 불러도 돼.”
마리안느는 내 말을 듣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내 옷자락을 붙들었다. 마리안느는 그리고서 내게로 가까이 붙어왔다. 가까이 다가온 마리안느는 보기보다 훨씬 더 떨고 있었고, 두려움에 잠겨있는 듯했다.
“…무서웠습니다.”
마리안느가 그리 말했다. 나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느는 내 가슴팍에 머리를 붙이고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마리안느의 머리카락이 내 옷자락에 스치며 사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당신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 봐, 당신이 안개에 잡아먹혀 버릴까 봐. 그렇게 된다고 해도 당신의 곁에 내가 있을 수 없을까 봐, 두려웠습니다.”
마리안느의 목소리가 젖어가며 떨렸다. 나는 어찌할지 몰라 가만히 마리안느가 울먹이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울먹인다.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마리안느는 그렇게 울먹이고 있었다. 마리안느의 손이 내 옷을 꾹 쥔다.
“왜 항상 그렇게 혼자 짊어지고 가려는 겁니까.”
마리안느의 목소리는 마침내 완전히 울음을 터뜨린 사람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마리안느는 자신의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더 내게 붙었다. 나는 마리안느의 등을 감싸며 그녀의 울음을 달래주는 수밖에 없었다.
“혼자 모두를 지키려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저는, 당신의 명을 듣기 위해 파티에 합류했습니다. 당신이 좋을 대로 명령하고, 저는 그저 당신의 명령대로 움직여야 할 뿐인데.”
마리안느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말을 반복하면서, 하고 싶은 말이 꼬이는 것 같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냥.”
마리안느의 목소리는 쥐구멍 속으로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말 대신, 마리안느는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는 한층 더 강하게 마리안느의 어깨를 감쌌다.
“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곁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내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으니, 날 지켜주려 했으니, 이게 뭔지, 이제 알아버렸으니.”
마리안느는 그녀의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애처롭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올린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마리안느의 얼굴은 눈물로 완전히 엉망이었다. 나는 그런 마리안느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주었다.
“왜 그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붙들고 있었던 겁니까. 뭐가 그렇게 당신의 마음에 걸렸던 겁니까. 그렇게, 그렇게 고통받고 상처받아가며….”
마리안느는 그리 강하게 말했다. 내가 보던 크라켄의 환상을 함께 바라보고 있던 거였을까. 나는 당황하며 볼을 긁적였다.
“…언젠가는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어. 나는 너희들을 잃기도 싫었고, 사람들을 희생시키기도 싫었어. 내 손에 담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나는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르옌의 말이 남아 아직도 머릿속에 맴돌았다. 너를 지키고 싶었다. 그렇게 말하면 마리안느가 싫어할까.
“우리는 당신이 지켜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일로이.”
마리안느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리 말했다. 나는 숨을 들이켜며 입술을 깨물었다. 마리안느는 내가 애써 외면하려 하던 문제를 끄집어내며 나와 직면시켰다.
“언제까지 약하게 있지도 않을 거고, 당신을 노심초사하게 만들지도 않을 겁니다.”
마리안느는 그러면서 멀리 떨어진 섬을 향해 눈짓했다. 그곳에는, 게오르그와 다프네의 환영이 멀쩡하게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게오르그도, 다프네도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만났을 때 그대로 머무르는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마리안느는 강조하듯 말하며 내 팔을 잡았다.
“당신의 동료들을 믿어주세요. 우리는 저런 마물에 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고, 당신을 두고 뒤에서 죽을 정도로 생각이 없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환상입니다, 일로이. 당신의 후회 속에 저를 남기지는 않을 거예요.”
믿는다는 말은 어려웠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에 순전히 알았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너희들이 없으면 내가 나로 남아있을 수 없어.”
“그럼 더 강해지죠. 함께 말입니다. 일로이는 우리와 사람들을 모두 함께 지켜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면 되고, 우리는 일로이와 나란히 설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면 됩니다. 당신이 쓰러질 때면, 우리가 언제나 지탱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나는 이미 저것만큼 실행하기 어려운 말을 몇 번이나 지껄였던 기억이 있다. 마리안느는 결정적인 말을 해주려고 하는 듯, 작은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그게 용사의 태도고, 그게 용사의 곁을 지킬 동료의 태도여야 하니까요.”
마리안느의 말이 다시 나를 깨웠다. 문득, 이렇게 그녀와 옥신각신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우스워져서 나는 그만 큭큭, 하고 웃어버렸다.
“당신을 걱정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일로이보다도 강해질게요, 당신이 나를 의지할 수 있도록.”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계속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마리안느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
“…조금 부끄러운 말이었습니다.”
마리안느는 갑자기, 그게 부끄러워진 것인지 내게서 몸을 휙 빼었다. 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우물쭈물하는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그, 그러니까. 같이 돌아가요. 아니, 안개를 함께 물리치죠.”
마리안느는 갑작스럽게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울어서 눈은 완전히 새빨간 토끼처럼 변해놓고, 말로는 함께 재앙을 물리치자고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는 대체 어떻게 온 거야?”
잊고 있었다. 안개가 이런 일을 허용할 리가 없는데, 내 눈앞의 마리안느는 틀림없는 진짜 마리안느다. 마리안느는 내 말을 듣고는 슥, 성창을 들어 올려 보였다.
“성창의 도움을 받았어요. 안개를 베어 가를 수 있을 줄은 저도 몰랐지만.”
안개를 베어 가르는 건 둘째치고 대체 내가 어디 있는지는 어떻게 안 걸까. 설마 며칠 동안 안개를 계속 헤집고 다닌 건 아니겠지…?
“어떻게 여기까지 또 온 거야…?”
마리안느는 얼굴을 다시 확 붉히더니 무언가를 꺼내려다 말았다. 나는 호기심이 갑자기 일어 마리안느에게로 다가갔고, 그녀는 내가 다가오자 마지못해 그걸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나침반?”
분명히 교황이 무어라 말했더라. 자기가 원하는 게 있는 곳이라고 했었나.
내가 기억을 되짚는 듯한 표정을 내비치자, 마리안느는 내 눈앞에서 손을 붕붕 흔들며 내 생각을 흐트러뜨리려 했다. 나는 그런 마리안느를 바라보며 기특한 마음으로 웃었고, 그녀는 내 웃음을 뭐라 생각한 건지, 귀까지 더 빨갛게 물들였다.
“아, 아무튼 그렇게 된 겁니다. 이 나침반을 활용할 수 있을까요?”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내게 건네었지만, 내가 나침반을 들어도 나침반의 바늘은 계속 빙빙 회전하기만 할 뿐이었다.
“…안 되네. 이걸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걸까.”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고, 마리안느는 다시 나침반을 받고는 나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안개는 군체며, 단일 개체다. 안개를 대번에 격파할 만한 형편 좋은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 사실을 되새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일로이에게 마력을 좀 넘겨드리겠습니다.”
마리안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나에게…?”
“저는 바깥의 모습 그대로로 있을 수 있는데, 일로이는 환영이 덧씌운 모습 그대로지 않습니까. 힘을 되찾을 만한 마력이 있다면 방법이 달리 생길지도 모릅니다.”
마리안느는 그리 말하며 내 손을 쥐었다.
“…이 환영은 일로이, 당신의 마력으로 유지되는 것 같으니까요. 저걸 회수하고 일로이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다른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리안느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마리안느가 개입한 순간부터, 이 세상의 시간은 멈추었고, 내 몸에서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도 멈추었다. 나는 손을 쥐었다 펴며 함께 주위를 둘러보았다.
“…알겠어.”
마리안느의 마력이 서서히 내 몸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마력을 단서 삼아 천천히 운용하기 시작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마력을 퍼다 날랐다. 그리고, 나는 주인 잃은 마력이 어떤 형태로 세상에 퍼져있는지 확인했다.
“돌아와라.”
서서히, 주변 배경이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안개로 변해 공기 중으로 녹아들려는 내 마력을 차곡차곡, 주워 담기 시작했다. 마리안느는 조금씩 채워지는 내 마력을 느끼며 작게 한숨을 흘렸고, 나는 서서히 돌아오는 내 힘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찢어지며 너덜너덜했던 옷이 돌아온다. 상처가 낫는다. 허리춤에 새로운 무게가 더해지고, 몸에 익숙한 힘이 감돌았다.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머리 위로 떠오르는 훈륜. 나는 새로운 시선으로 안개를 다시 마주했다. 안개 그 자체가 꿈틀거라며 몸을 뒤트는 것 같았다.
“너도 이걸 기다리고 있었냐?”
안개는 분노하듯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었고,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자, 이제 어떻게 이놈을 사냥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