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7 - 97. 당신이 있는 곳 (6)
성검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왼손에 나타난 너울을 내려다보고는 다시 앞을 보았다. 안개는 또 무언가 환영을 만들어내려는 것 같았다. 마리안느는 나를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이제는.”
마리안느는 머뭇거리면서 내게로 손을 뻗었고, 내 손가락에 그녀의 손을 걸쳤다. 마리안느의 작고 부드러운 손이 내 손등을 감쌌다. 안개 속에 퍼진 내 마력을 흡수하는 데 마리안느의 마력을 절반 이상이나 썼다. 마리안느는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할게.”
성검이 깨어난다. 나는 적당히 채워진 마나를 운용하며 오러를 끌어올렸다. 너울의 검신 위로 은빛 서기가 피어올랐다. 안개는 이제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려는 듯 마구 형상을 만들어내었다. 안개가 사람들에게서 빨아들일 수 있는 마력은 이게 한계다. 생명력을 마력으로 전환하는 과정은, 아무리 세상을 멸망시키는 재앙이라도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네 본신의 마력까지 전부 동원해야 할 거다.”
나는 그리 말하며 맹렬하게 마력을 순환했다. 눈앞에 악몽에 나올 법한 괴물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숨을 내쉬니, 마나가 타오르며 연기가 되며 입에서 새어 나왔다.
“겨우 그런 환영 따위로.”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습관적으로 마리안느를 뒤로 보내려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옆자리를 내주었다. 마리안느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 새로 떠오른 감정은 놀라움과 기쁨이었다. 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갈까?”
마리안느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고, 내 발걸음에 따라 옆에서 미끄러지듯 신형을 날렸다.
“작아 보이는 놈들부터 빠르게 정리해줘.”
“물론입니다.”
개방된 성창이 앞으로 나아가며 환영을 쓸어버렸다. 나는 나 못지않은 파괴력으로 전장을 휘젓는 마리안느를 바라보다가 내 목표를 정했다.
“정정당당하게 붙어야지.”
나는 너울을 먼저 앞으로 뻗었다. 오러가 앞으로 나아갔다. 환영은 허수아비처럼 허물어진다. 안개는 꾸역꾸역 사라지는 환영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환영을 게워냈다. 해일처럼 쏟아지는 환영을 향해 나는 검을 휘둘렀다. 환영은 오러가 닿자마자 사라졌다.
내게 나쁜 기억을 불러일으킬 만한 촉매는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칼바람이 내 피부를 파고들었다. 내 앞에는 에버노드의 광경이 다시 펼쳐졌다.
“모두를 지키겠다고? 이 사람들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떠오르나?!”
바람이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안개 그 자체의 목소리인가 싶었다. 안개는 죽으며 스러지는 에버노드의 병사와 기사들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 그리운 얼굴들을 스쳐 지나 보내며 눈을 감았다.
“네가 지키지 못한 이들이 이렇게 많다. 네 호언장담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다가, 고기 방패 신세를 면치 못한 이들도 많다.”
“고맙다.”
“뭐?”
나는 흰늑대에게 목이 물리며 쓰러진 병사를 향해 다가갔다. 그 얼굴은 어렴풋이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거인 공략전의 전사자 730명 중 하나다. 나는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누운 병사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도,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얼굴이었다.
“다시 이 사람들의 얼굴을 볼 기회를 줘서.”
나는 그들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들은 내 은인으로 영원히 마음에 남아있겠지만, 결코 짐이 되지는 않을 거다. 쓰러질 때도, 짐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을 테니까.
“잘도 그런 뻔뻔한 말을 하는구나, 용사-!”
거짓된 질책과 원망. 나는 꿇었던 무릎을 일으키며 앞을 응시했다. 에버노드의 병사들은 망령의 형태가 되어 내 발목을 붙잡으려 했다.
“왜 우리를 지키지 못했습니까….”
“왜 우리는 그곳에서 죽어야 했습니까….”
나는 그들이 가만히 내 발목을 붙잡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듣고 싶었다. 내게 원망할 말이 있다고 하면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데, 가만히 보니 괘씸하네.”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병사들의 몰골은 처참했다. 난 마물에 뜯기고 바람에 얼어붙은 전사자들의 시신을 쭉 바라보았다. 나는 이를 부드득, 갈며 머나먼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감히 이 사람들을 이용해?”
나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안개, 잘못 짚어도 한참을 잘못 짚었다. 내 옆의 마리안느 역시 굳은 표정으로 성창을 쥐었다. 나는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며 성검을 위로 들어 올렸다. 어정쩡한 추측은 괜한 분노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나는 마나를 더욱 끌어올렸다. 내 마력이 일으키는 바람이 저 눈보라를 다 뒤덮어버릴 만큼, 이 공간을 찢어발길 만큼.
“미안하지만, 이제는 웃음도 안 나오거든. 내가 이들을 추모하고, 후회를 내뱉고 싶다면 여기서 무너지지 않고, 북부의 위령비로 달려가서 눈물을 쏟을 거다.”
나는 그곳에 새겨진 수백 명의 이름을 떠올려보았다. 에버노드는, 그리고 그곳에서 죽은 이들의 희생은 결코 안개의 노리개가 되지 못한다.
“어째서… 어째서냐! 어째서 크라켄과의 싸움은 그리 후회하면서….”
안개가 누군가의 입을 빌려 말했다. 나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영원히 깨닫지 못할 거다. 그리고 그 차이를 끝까지 모른다면 안개는 결코 나를 다시 수렁에 빠트릴 수도 없을 거고.
“뭐, 마음껏 해봐라. 내가 넘어가는 일은 없겠지만.”
나무가 우지끈, 쓰러졌다. 병사들의 시신은 흩날리는 눈이 되어 소용돌이와 함께 사라졌다. 나는 다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랜만에 보는 네 번째 재앙, 거인이 그곳에 버티고 서 있었다.
“끝까지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이 말이군.”
나는 중얼거리며 땅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나와 정확히 호흡을 맞추는 마리안느가 내 옆을 스치며 날아갔다. 성창은 살벌한 기세로 공간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다리.”
내가 간결하게 말하자, 마리안느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때처럼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며 거인을 마주했다. 난적이긴 했다. 여태 내가 싸워왔던 적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할 수도 있을 거다.
그래봤자, 내게 쓰러진 수많은 마물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거인은 내게로 주먹을 내지르다가, 무언가로부터 방해를 받은 듯 제자리에서 휘청거렸다. 나는 허공에서 몸을 비틀며 거인의 왼팔을 잘라내고, 그 단면에 착지했다. 거인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그대로 씨익, 웃음을 지어주며 난도질을 시작했다.
단 한 번의 낭비 없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검격에는 감정이 실려서는 안 된다. 오로지 거인의 몸통을 베어내겠다는 일념만으로 나는 검무를 췄다. 팔을 조각내고,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토막 낸다. 마리안느가 아래에서 일을 잘 끝내놓았는지, 거인은 갑자기 휘청거리더니 균형을 잃고 앞으로 쓰러지려 하고 있었다.
“…재현도가 부족하네.”
나는 그런 감상을 내뱉으며, 거인의 목을 향해 검을 올려 쳤다. 성검의 검날이 거인의 목을 파고들자마자, 환영이 완전히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일보 앞도 보이지 않는 희뿌연 안개만을 제외하면.
“끈질기군요.”
마리안느가 질린다는 듯한 감상을 내뱉었다. 나는 내심 그녀의 말에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기억과 마음을 이용하는 재앙이라 그런 걸까, 인간의 본성과 닮은 부분이 많았다.
“어떻게든 헤집고 다니다 보면 해결되지 않을까?”
나는 그리 말하며 너울을 빙빙 돌렸다. 마력을 다 소진하면 이 공간 그 자체를 흔들어버릴 수도 있을 거다. 지진이 일어나듯 안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속에서부터 안개를 조금씩 갉아먹을 심산으로 힘을 더 끌어올렸다.
“부족하면 제가 더 도와드릴 수 있어요.”
마리안느는 성창을 들어 올렸다. 뭐, 아마 마리안느의 도움을 구하기도 전에 방법이 나올 것 같긴 하지만.
콱.
마리안느는 땅에 성창을 내다 꽂았다. 아, 도와주겠다는 말이 내게 마력을 더 제공해주겠다는 뜻은 아니었구나.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마리안느의 발치에서부터 일어나는 균열을 바라보았다. 내 마력에 마리안느의 성법기가 합세하자, 당장이라도 공간은 무너질 것처럼 요동쳤다.
“…대단한데.”
내 무의식적인 칭찬에 마리안느가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고 대답이라도 해주려는 걸까. 나는 칭찬을 좀 자주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무너지기 시작하는 안개를 바라보았다. 건물이 무너지듯, 안개는 조각나며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진다.
“모양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안느가 긴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개는 소용돌이치며 뭉치고 흩어졌다 하기를 반복했다. 마치,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안개는 먼지구름처럼 뭉치더니 어떤 형상을 만들어내려 하고 있었다. 꼭, 사람과 같은 형태였다.
“그렇군… 네놈은 그렇게 된 거였어.”
사람의 모양으로 빚어지는 안개가 그리 말했다. 아무래도 본신의 마력마저 전부 끌어내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했나. 나는 방심하지 않기 위해 감각을 더더욱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목숨을 끊기 직전이 가장 위험한 법이었다.
“그래.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킬킬거리는 웃음으로, 안개는 누군가의 모습을 취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변화하는 안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변신을 기다려줄 필요가 있을까? 내가 친절한 마법소녀의 악당도 아니고. 나는 안개가 모습을 완전히 변화하기 전, 베어버리기 위해 너울을 가져갔다.
“어허.”
안개는 다시 여유를 되찾은 말투로, 그 팔을 올려 내 공격을 막아내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안개를 바라보았다. 안개가 내 공격을 막아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안개의 목소리가 굉장히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내가 완전히 변하지 않았잖아.”
안개는 웃음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나를 조롱했다. 나는 그렇게 완성된 안개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안개는, 일로이의 모습으로 바뀌어있었다. 마리안느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안개를 바라보았다.
“이 얼굴, 어디서 많이 본 얼굴 아닌가?”
안개의 얼굴이 아주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일로이에서 다시 누군가로, 나는 그렇게 바뀌는 안개의 모습을 보다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 ■■■.”
나는 안개의 입모양을 읽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안개의 말도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끝에는, 일로이와 닮았지만 조금 다른 모습의 남자 하나가 있었다. 나이는 이십대 중후반 정도. 전형적인 한국인의 얼굴. 나는 그 모습을 알아보고는 비명처럼 숨을 내쉬었다.
‘나’다.
나는 거울을 마주한 것처럼 눈을 마주하고는 얼어붙었다.
“그 비밀을 알아낸다고 꽤 힘들었지. 어지간히도 뚫고 들어가야 하더군. 내 마력 대부분을 그 보안을 뚫어내는 데 썼어야 했어. 고작 인간 하나에게 고전해야 하는 게 우습지만….”
‘나’는 웃음을 흘리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마리안느가 그 모습을 보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이미 내게 향해있었다. 안개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버린 것인지, 입가에 섬뜩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자, 잘 봐라, 그곳의 인간. 이게 바로….”
푹.
그때였다. ‘나’로 변한 안개의 목을 누군가가 찔러버렸다. 나는 놀라며 고개를 들어 안개를 찌른 사람을 마주했다.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려던 안개의 웃음은 이내 경악으로 바뀌었다.
“다…당신은.”
“허튼소리는 거기까지 하는 게 좋겠군, 악신의 잔재.”
은과 같이 반짝이는 머리카락. 피처럼 붉은 눈. 그리고, 머리에 씌워진 화관. 심상 속의 성검은 갑작스럽게 등장하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끝까지 지켜보려 했는데, 마냥 지켜볼 수만은 없겠더구나.”
어째서인지 그 표정은 아주 깊은 슬픔에 잠겼다. 성검은 그 고운 목소리로 내게 사과하며 말문을 열었다.
“미안하다, 일로이. 나를 용서하지 말아라.”
“그게…무슨 소리야.”
내가 더듬거리며 말하자, 성검은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나는 제자리에서 휘청거리며 그 붉은 눈을 바라보았다.
“네가 안개에 진입하기 전, 내가 들려준 말 기억하느냐.”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나라고?”
“그래. 그것만은 꼭 기억하거라.”
성검의 말에 어지러워지려던 머리가 단숨에 정리되었다. 내 표정이 차분해진 것을 확인한 성검은 잘 벼려진 칼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로 변한 안개를 노려보았다.
“…대체 당신이, 아니. 그만큼 저 인간이….”
“그 입을 다물어라. 잡것아. 어차피 내가 찌르지 않았어도, 얼마 가지 않아 네놈은 수명을 다했을 테니.”
안개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성검을 응시했다. 성검은 더 안개가 떠들 유예를 주지 않고 그대로 검을 그어버렸다. 나는 힘을 잃고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 안개를, 그리고 그 너머에서 함께 희미해지는 성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수고했다, 일로이. 네 동료는 저기 자고 있으니, 잘 챙길 수 있도록 하고.]”
마지막 그 말은, 언제나처럼 내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는 내 뒤편에 누워있는 마리안느를 향해 다가갔다.
“마리안느.”
그녀를 부축하며 부르자, 마리안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는 어느새 교황청의 뒤편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해낸…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개는 완전히 걷혔다. 아예 소멸해버린 것 같았다.
나와 마리안느는 그 자리에 한동안 앉아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았다. 마리안느는 내 손을 꾹 잡았고, 나는 그 온기를 느끼며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한 그 손짓에, 나는 고개를 돌리고 미소를 지었다.
“가지 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본 게 무엇이든, 마리안느가 다잡아준 내 마음은 이제 변하지 않을 테니까.
“응.”
“함께 있어 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녘이었다. 하늘에서 가루눈이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