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8 - 98. 사건과 사건 사이 (1)
“마리안느!!”
동료들이 달려오며 가장 먼저 찾은 건, 내가 아니라 마리안느였다. 나는 당황하며 나를 돌아보는 마리안느를 바라보며 쿡쿡 웃음을 내뱉었다. 다프네와 게오르그는 마리안느를 납치하다시피 데려가며 어깨를 붙잡고 어디 다친 곳은 없나, 조사하기 시작했다.
“괜찮은 거예요? 어디 다친 곳은 없고?”
“겉보기로는 괜찮은데… 혹시 마력 내상을 입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의료진에게 데려가서 정밀 검사를 받게 할 필요가 있을 거 같은데.”
마리안느는 아이마냥 자신을 다루는 두 사람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고 있었다. 나는 남 일인 것인 양 그 광경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놓…놓아주십시오. 전 괜찮습니다.”
“일단 검진은 받아봐요. 안개의 마력이 신체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다프네는 그리 단언하며 마리안느를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정말 일로이를 데리고 돌아왔네요.”
다프네의 말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느껴졌다. 고마움이 우선이었고, 다음은 부러움이었을까. 저 보랏빛 눈은 복잡한 빛이 섞여 밤하늘만큼 깊이 빛났다.
“수고했어요, 고마워요 마리안느.”
그러다 그 표정은 이내 웃음에 감춰졌다. 다프네의 옆에서 게오르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화가 났다는 듯한 말투로 마리안느를 타일렀다.
“네가 사라졌을 때 얼마나 난리였는지 아냐? 참,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나 몰래 재앙을 상대하겠다고 나설 줄이야.”
게오르그는 고개를 젓고는 쓴웃음을 띠었다.
“그래도, 정말 수고 많았다. 저 바보 같은 놈을 데리고 돌아오느라.”
한바탕 마리안느로 법석을 떤 두 사람은 이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안느를 바라보던 그 따뜻함과 걱정이 섞인 눈길과는 정반대였다. 꽤 싸늘하고, 분노가 잔뜩 깃든 눈이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없이 혼자 안개를 상대하러 가버린 이유를 좀 말해주실까. 고작 이런 메모나 남기고서 말이야.”
게오르그는 내가 남긴 말이 적힌 종이를 팔락거리며 흔들어 보였다. 나는 종이를 흘겨보다가 모르쇠, 고개를 슥 돌리며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그거 다 확인한 건 아니겠지?”
“지금 그게 중요한 거냐? 이 멍청한 새끼야. 대체 왜 우리에게는 말도 없이 그렇게 슥 사라졌냐, 이 말이야. 왜, 그렇게 하면 더 숭고해 보이기라도 할 것 같았냐? 멋있다고 찬사라도 해줄 줄 알았어? 네가 돌아오지 못하면 그 앞에서 질질 짜기라도 해줄 줄 알았냐고.”
콱.
게오르그의 억센 손이 내 옷자락을 잡아챘다. 나는 힘없이 덜렁거리는 인형 신세가 되어 동료들의 불평을 다 들어주기로 했다. 게오르그는 인상을 잔뜩 쓰더니만, 내 눈을 마주하고서 독기 빠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다.”
어리둥절한 채 눈을 깜박이던 내게, 게오르그는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다. 내가 저 녀석의 사과를 받아야 할 일이 있었던가.
“널 몰아붙인 건 동료들에 대한 네 신뢰도겠지. 너는 우리에게 항상 믿음을 주었지만, 우리가 네게 그런 믿음을 준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말이야.”
그리 얄팍하게 생각을 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뭐, 저 녀석들이 안개를 함께 버틸 수 없을 거라 생각한 건 맞으니, 그리 다를 건 없나.
“이미 재앙을 세 개나 격파해버린 시점에서, 늦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네게 너무 의존하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심하게도 말이야. 우리는 용사 파티지, 너 혼자 활동하게 내버려두는 방관자가 아닌데 말이야.”
게오르그는 나를 툭 놓아주며 물러났다.
“나 또한 강해지마, 일로이. 네가 마음을 놓고 내게 무슨 임무든 맡길 수 있도록.”
게오르그는 그리고서 다프네를 슬쩍 바라보았다. 다프네는 나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할지 계속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는 좀 더 제대로 된 사과를 들려줘야 하는데.
“…그.”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 다프네는 내게 달려와 안겼다. 나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려 주었다. 뭐라고 한마디 할 것 같은 표정은 아마 무너졌을 거다. 다프네는 말없이 그냥 그 상태로 있었다. 그마저도 길게 이어지지 않고 다프네는 내게서 떨어졌다. 울먹거리지도 않았고, 유약했던 예전의 어린 마법사는 없었다. 내 앞에 있는 건, 6서클에 달하는 대륙 굴지의 강력한 마법사 한 명이었다.
“7서클로 갈 단서를 찾고 있어요.”
다프네는 결심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7서클. 현재 대륙에 딱 두 명 있다고 했던가. 6서클에 도달한 사람마저 스무 명이 되려나.
“6서클에 도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부족해요. 고작 안개의 내부 마력에 간섭하지 못해서 일로이와 마리안느를 모두 위험에 빠트렸어요. 저런 걸 상대하는 건 마법사의 역할인데.”
다프네는 내 표정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일로이는 분명히 이렇게 말해주겠죠. 이미 충분하다고. 무리하지 말라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마리안느가 안개 속에서 내게 해준 말을 떠올려서일까.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언젠가 전인미답의 8서클에 누구보다 빠르게 도달할 재능의 마법사니까. 나는 다프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7서클보다 더 강해져.”
다프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와 동등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강해지는 걸 목표로 삼아줘.”
처음 그녀를 영입할 때가 떠올랐다. 그때 계산적이었던 내 목적을 지금은 잊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사실을 상기하며 다프네에게 다시 말했다. 날 걱정시키지 않고 싸우겠다면, 응당 그 자격을 갖추어야 하겠지. 물론 다프네에게는 그 자격을 쟁취하고, 그 이상으로 나아갈 재능이 충분히 있었다.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겠다고 약속해줘.”
다프네는 세계 최강의 대마법사가 될 거다. 처음 그녀를 마주했을 때와 같은 믿음이지만, 다른 마음으로 난 다프네에게 말을 들려주었다.
“…알겠어요.”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속에 깃든 결의를 헤아리지 않았다. 지금은 나도, 그녀도 마음을 홀로 다잡을 때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밤공기가 차가웠다. 멀리서 성기사단과 사제들이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선두에는 혼비백산한 표정의 교황이 품위고 뭐고 잊어버린 채 달려오고 있었다. 교황은 땀을 뻘뻘 흘리며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다…끝난 겁니까?”
교황의 어리둥절한 표정도 보는 맛이 있었다. 나는 킥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교황은 황당하다는 듯 안개가 걷힌 밤거리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내게 그 거래를 제안할 때는 어떡하나 싶었는데, 정말 일이 어떻게 해결됐군요.”
교황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의 유예가 지났을 때, 한시의 지체도 없이 카이로스 왕국에 지원 요청을 보냈습니다. 이거 참, 뭐라고 이야기를 새로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교황이 멋쩍은 듯 웃었다. 안개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니, 한결 시름을 던 얼굴이었다. 그리고는, 어쩐지 뒤틀린 미소를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원군이 도착하면 용사님을 모시고 돌아가게 되겠네요. 영웅의 귀환을 제대로 보여주게 되겠군요.”
갑자기 골이 땡겼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는 나를 바라보며, 교황은 클클거리며 노인네다운 웃음을 내뱉었다.
==
안개는 출현한 지 여드레 만에 걷혔다고 한다. 내가 안개 속에서 헤맨 게 일주일. 마리안느가 들어와서 나를 구하려 애를 쓴 게 이틀. 그간 성탄일이 지나갔고, 새해가 밝았다. 안개 속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극도로 쇠약해졌지만, 사망자는 하나도 발생하지 않았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열흘 동안이나 가사 상태에 빠져있다가 깨어난 것이니, 아마 상태가 위독한 사람들도 있을 거다.
“아직 잠에 빠져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한달음에 성국으로 돌아온 성녀, 아이시스가 그리 말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마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사제들이 바삐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아이시스는 물끄러미 그 사제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바빠질 것 같네요. 아직 잠든 사람들을 깨워서 회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는 없을 테니까요. 한바탕 일을 해야겠네.”
아이시스는 팔을 걷어붙이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나는 피식 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거려주었다. 아이시스는 그런 내 웃음이 불만이라는 듯 볼을 부풀렸다.
“일로이, 당신은 내가 제대로 회복시켜줄 틈도 없이 바로 여기로 왔잖아요.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재앙을 물리치고 비실거리고 있을 사람이 여기부터 오다니.”
아이시스는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내게 다가왔고, 나는 비슬거리며 게걸음으로 아이시스에게서 두 발짝 정도 멀어졌다. 내 오른편에 서 있던 마리안느가 함께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다.
“마력이 채워지기만 기다리면 돼. 몸에 애초에 큰 이상도 없었고. 그러면 나한테 쓸 마력을 저 사람들에게 쓰는 게 훨씬 나은 거 아냐?”
“…어련하시겠어요.”
아이시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안개가 며칠만 더 이어졌어도 사망자가 속출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었어? 계속 바크틴스에 남아있었던 거야?”
“예. 구호 활동을 지원하고, 다른 피해 구역이 있는가 조사하고…. 우선 할 수 있는 걸 하고 있었죠. 제 마력이 강해진 덕분에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도 훨씬 빨라졌고요.”
아이시스는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피해를 최소한으로 할 수 있던 것도 당신 덕분이겠죠.”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슬쩍 마리안느를 향해 턱짓했다.
“아니. 마리안느 덕분이지. 얘 아니었으면 안개 속에서 계속 헤매다가,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을걸. 제대로 안개를 물리치지도 못한 채로 말이야.”
마리안느는 얼굴을 슬쩍 붉혔다. 아이시스는 마리안느를 미소와 함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르옌은….”
아이시스는 머뭇거리며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안드레 주교와 함께 종말 숭배자들의 꼬리를 추적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안개를 쓰러트렸다는 소식을 듣고 성국에 한 번 돌아올 거라고 말하긴 했는데…, 일로이를 만날 시간은 아마 없을 거 같아요. 주교는 당신을 필요로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다시 도움을 요청할 거라 말을 전해달라 부탁했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종말 숭배를 퍼뜨리는 악신 숭배자들을 잡아야 할 때가 올 거다.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발생할 수 있는 변수는 최대한 줄여야지. 그리고, 그 변수라고 하면 내 힘이 부족한 경우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 바로 다음 재앙을 상대하러 가려는 건가요?”
“…아니. 여섯 번째 재앙은 뭐라 말하기 좀 까다로워. 그리고 아마 그때까지는 시간적 여유도 있을 거고. 그 사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볼 거야.”
강해질 방법 같은 거 말이지.
나는 그리 중얼거리며 성검의 검자루를 툭툭 두드렸다. 안개에 들어갔다 나온 후로, 성검은 아직까지도 내게 다시 말을 걸어오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