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9 - 99. 사건과 사건 사이 (2)
“결국 안개는 제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도 못하고 사라졌군요.”
안드레 주교는 용사가 전달해준 승전보에 기뻐하며 웃음을 흘렸다. 그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교황이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래. 용사님이 언제나처럼 잘 해결해줬었지. 홀로 안개 안으로 들어간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는 나도 어떻게 해야 하나 발을 동동 굴렀지만…. 결국 동료들의 도움과 함께 어떻게든 해결했더군. 그렇게 보면 참, 용사 파티는 어딘가 다르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
주교는 즐겁게 웃으며 입에 담배를 물었다. 교황은 물끄러미 타오르는 연초를 바라보다가 주교에게 하나 내놓으라는 듯 손짓했다. 안드레 주교는 갑에서 한 개비를 뽑아 교황에게 건네었다. 교황은 받은 담배를 손에 들고 빙빙 돌려보았다.
“…참. 신화라는 게 이 시대까지 남아 계승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러니까 용사라는 거창한 호칭으로 불리는 것이겠죠.”
주교의 대답에, 교황은 엷게 미소를 띠며 담뱃불을 붙였다.
“이제 보고나 좀 듣지. 그동안 발바닥에 불이 나라 뛰어다니며 놈들의 꼬리를 잡으러 했잖나. 자네라면 어떻게 괜찮은 수확을 거둘 때도 됐다고 생각하는데.”
안드레 주교는 씁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주교의 자신감 없는 반응에, 교황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안드레 주교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가 깃들었다.
“밤낮없이 놈들을 추격해보려 했습니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놈들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걸 막으려 했어요. 뭐, 결국 얻을 수 있었던 건 단편적인 정보뿐이었지만.”
종말 숭배자들은 도망가고 숨는 데에 아주 능숙한 집단이다. 이단심문관들의 추적조차 적당히 피하며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결국 안드레 주교의 손에 들어온 건 놈들의 본체가 아닌 곁가지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곁가지들은, 시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다시 자라난다.
“놈들의 본체에 다다르기 위해 더 깊이 가야 하는데…, 단서가 나올 듯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이 세상 깊이 침투한 것일지도 모르죠. 놈들이 사라지는 걸 도와줄 만큼.”
교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말 숭배, 그러니까, 악신 숭배의 뿌리는 깊다. 그들이 헤아리는 것보다도 훨씬. 마치 기생충처럼 들러붙을 숙주를 파악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또 번식해 다른 숙주로 이주한다. 그렇게 사회 깊숙이 가면을 쓰고 숨어있을 거다.
“…머지않아 놈들과 충돌하게 될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악신 숭배자들이 이렇게 재앙이 격파되는 모습을 가만히 앉아 관망할 놈들은 아니니까요.”
교황의 집무실이 뿌옇게 담배 연기로 가득 찼다. 안드레 주교는 집무실의 창문을 열며 연기를 내보내려 휘휘 손짓했다. 찬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창틀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재앙을 극복한 성국은 평소처럼 평온했다. 조용하고, 신실하다.
“증원하도록 하지. 사람이든, 돈이든, 물건이든. 성유물도 아낄 때가 아닌 것 같아. 성유물을 남긴 성인들께서도 이런 때에 자신의 유산을 썩히는 건 바라지 않을 테니까.”
교황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참 아이러니한 세상이다. 재앙이 일어난 와중에 인간 사이의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거대한 패권국가가 수십만 명의 피로 대륙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렇기에 내분으로 세상이 멸망하는 걸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
“대비할 수 있겠나.”
“마침 최근에 들인 용병이 꽤 쓸만해서. 혼자 이단심문관 전체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더라고요. 나도 그놈한테는 두손 두발 다 들 정도니.”
용병에 대해 이야기하는 안드레 주교는 제법 즐거워 보였다. 교황은 저 괴물이 두손 두발 다 들 정도의 실력자라면 대체 얼마나 강해야 하는 걸까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마리안느는 성기사단 쪽으로 전임시켰다.”
주교는 교황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아이는 이단심문관을 더 맡을 수 없을 겁니다. 무력이 얼마나 발전하든, 마리안느는 이제 그녀가 싸워야 할 이유를 찾았으니까요. 증오나 분노가 아닌 무언가로 싸우는 이들은 이단심문관이 될 수 없습니다. 아시잖습니까, 교황 성하.”
주교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그리 말했다. 손에 들린 궐련은 다 타들어 가 수명을 다했다. 주교는 집무실의 재떨이에 꽁초를 툭 떨어트리고는 손을 문질렀다.
“그런 자네는 딱히 분노로도, 증오로도 싸우지는 않는 것 같은데.”
“글쎄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황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
“그냥 어디 한 군데 나사가 빠진 거로밖에는 보이지 않는군.”
“섭섭한 말씀을.”
주교는 낮게 웃었다.
“이단심문관 중에 나사가 빠지지 않은 놈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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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몰래 귀국해야 한다는 이유가 그겁니까?”
왕국의 총기사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지긋한 기사였다. 작년 청문회에서 게오르그나 다른 기사들과 함께 뒤에서 관망하고 있던 이들 중 하나였다. 성검을 뽑으러 나서지 않은 몇 안 되는 기사 중 하나였기도 하고. 그는 내 되물음에 참을성 있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예. 현재 왕국 내에서는 용사님의 부재를 틈타 궐내를 들쑤시고 권력을 잡으려는 대신들의 발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진압할 수 없는 수준은 아니겠지만…, 현 권력 체제에 불만을 가진 자들을 색출해내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슬쩍 미간을 좁혔다. 자리를 비운 용사. 용사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왕권. 그리고 성국에서 들어온 지원군 요청과 용사의 실종. 이때다 싶은 이리 새끼들이 나서기 딱 좋은 때였다. 어쩐지 금방 출발하지 않고 조금 미적거린다 싶었다.
“폐하께 허락은 받은 겁니까?”
“용사님의 무사를 보고받은 후로 즉시 폐하께 드릴 서신을 보냈습니다. 제가 제안을 드린 것이었고, 폐하께서는 용사님을 다시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지만….”
총기사단장은 말꼬리를 흐렸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궐내가 지나치게 시끄러워질 것이라는 측근들의 우려가 있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전적으로 당신이 책임을 질 테니, 용사께 도움을 요청하고 싶다고 하셨고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들과는 등을 돌린 지가 오래니, 이참에 등에서 우리를 찌를 화근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가장 궐내가 시끌벅적할 때, 불순 분자가 나올 대로 다 나왔을 때, 승전보와 함께 왕궁으로 들어가 주십시오,”
나에 대한 신뢰도, 의심도 왕궁의 정치판 속에서는 편을 가르는 요소일 뿐이다. 그들이 실제로 나를 믿고 믿지 않고는 중요한 게 아니겠지. 조금 씁쓸한 기분이었다. 안개에 잡아먹혔던 이들은 내가 그들을 구해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을 건데.
“알겠습니다. 그리 하도록 하죠.”
나는 텁텁한 입천장을 햝고는 그리 말했다. 총기사단장의 표정이 다행이라는 듯 확 펴졌다.
“감사합니다, 용사님. 왕궁의 모든 사람을 대변해서, 이렇게나마 감사를.”
나는 머리를 숙이려는 총기사단장에게 손을 내저었다.
“그럼, 출발하시죠. 이리들이 지원군이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손을 놓고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아, 그렇죠. 용사님이 돌아간다는 사실은 교황청의 협조를 받아 철저하게 숨겼습니다. 우리 지원군 내에서도 반대파가 붙인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안에서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닌데 말이죠.”
내 한숨에 총기사단장이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총기사단장은 나를 호위하듯 내 뒤를 따라 일어섰다. 나와 함께 있던 게오르그가 붙어주었다.
“왕도까지 가장 빠르고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기대하죠.”
성국을 떠날 때가 되었다. 이제 새로운 장이 펼쳐질 것을 예감하며, 나는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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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될 줄 알았습니다. 결국 한 사람에게만 맡기는 건 한계가 있었으니까요.”
대전은 평소보다 시끌벅적했다. 궁정 귀족들과 대신들은 저들끼리 열띤 토론을 이어가고 있었고, 아그네스는 피가 아닌 침을 튀기며 싸우는 귀족들을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용사가 홀로…, 언제나 그랬듯, ‘독선적으로’ 재앙을 상대하러 가고서 일주일이나 아무런 소식이 없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어서 문제였겠죠.”
용사에 대한 여론은, 에버노드 이후로 역전되지 않았다. 되려 청문회 때 용사와 척진 이들은 더 용사를 까 내리기 바빴다. 중립을 지키던 이들이 용사의 활약을 보며 그의 편으로 돌아서긴 했지만, 궁중 여론을 완전히 역전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폐하. 용사가 비록 재앙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고는 해도 전체 국민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겁니다.”
비그완 백작의 말을 재빨리 다른 귀족이 받았다. 여왕의 표정이 영 좋지 않다는 것을 의식한 움직임이었다.
“재앙 두 개를 처치한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그 역할을 다했습니다. 비록 용사 그의 온전한 업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요. 국가적 영웅으로 추대하고 그 뒤를 이을 적합한 사람을 물색한다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격이 되겠죠.”
“경들은.”
여왕의 목소리는 북풍보다 차가웠다. 그 싸늘한 울림에,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던 대신이 입을 다물었다. 주도권은 여왕에게, 그리고 여전히 궁정 귀족 다수를 장악한 내무대신에게 있다.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려 하는 건가? 혹은, 내가 눈과 귀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대들에게는 좁디좁은 왕궁만이 이 나라의 모든 것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용사가 국민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북부에서는 얼마나 추앙받고 있는지 내가 모르리라 생각했느냐.”
대신들이 눈을 돌렸다.
“그대들은 용사를 구원할 생각은 하지 않고 바로 그 대체자를 물색할 생각부터 하는구나.”
아그네스는 질책하듯 말했고, 대신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열지 않았다.
“일주일이나 지났다고 했습니다, 폐하. 그리고 아직 지원군에게서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 걸 보아 우리는 용사의 죽음을 대비해 다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용사 자신도 바라는 일일 겁니다. 마냥 손을 놓고 있는 게 아닌, 그다음을 대비하는 것 말이죠.”
내무대신의 말이었다. 여왕은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내무대신은 어깨를 움찔하는 것 말고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다음을 대비하는 게 그대의 입맛대로 할 수 있는 용사를 앉혀두고 원하는 대로 부려 먹겠다, 이 말인가? 용사가 이뤄놓은 업적은 그대가 가져가고 말이지?”
아그네스가 비꼬듯 말하자, 내무대신은 여유로운 미소를 내비쳤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폐하. 제가 어찌 용사라는 존재를 손에 쥔 채 제 마음대로 쥐락펴락하겠습니까. 그건 이 세상의 누구도 해서는 안 될 짓일 겁니다.”
내무대신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누구도 그래서는 안 될 행동을, 여왕이 시도하려고 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아그네스와 내무대신의 눈이 마주쳤다.
내무대신은 아슬아슬하게 선으로 줄타기를 하는 중이었다. 여왕이 힘으로 억누르려면 그럴 수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신하들의 민심이 나빠진다. 집권자의 권력은 온전히 그에게서만 나오기 힘들다. 그 사실을 아는 두 사람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신하들이 불안해합니다. 안개가 사라졌다는 소식도 없고, 용사의 행방조차 감감무소식. 지원군을 급히 파견하긴 했습니다만, 그 지원군조차 무사히 돌아오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아그네스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삼켰다. 지원군을 보냈을 때 이미 저들의 반발과 전력의 출혈을 감수하고 보냈다. 한발 물러선 대신들이 이렇게 반격해오기까지는 며칠 걸리지도 않았다. 아그네스는 옥좌의 팔걸이를 강하게 쥐었다.
“그대들은 마치 용사가 재앙과 싸우다가 죽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아직도 그가 용사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고 떠들고 싶은 게냐?”
내무대신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다만, 상황을 보고 객관적으로 판단해, 충언을 드릴 뿐입니다. 우리도 용사님이 돌아오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바라고 있으니까요.”
“행여 용사가 살아 돌아오면 그대들이 말한 건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그를 축출하려고 혈안이 된 무리가 될 거다.”
“그런 오명 정도는 감수해야겠죠. 돌아오지 못할 용사에게 기대를 걸기보다는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여왕은 가만히, 대신들을 아울러 보았다. 권력욕에 눈이 벌개져 어떻게든 물어뜯으려는 무리는 이제 어느 정도 색출되었다. 아그네스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몇몇 눈치 빠른 대신들이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폐하께서는 꽤 간절하게 바라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대들의 근시안적인 모습에 실망했을 뿐이다.”
“현실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폐하, 이제 슬슬 저희 말씀대로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그네스는 무기질적으로 내무대신을 응시했다. 내무대신은 누그러진 듯한 여왕의 표정에 환희의 미소를 얼굴 위로 띄우려는 듯했다.
“들어오너라.”
여왕의 그 말이 입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벌컥.
문이 열렸다. 대전의 분위기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대신들은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대전의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벅, 저벅.
당당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내무대신의 표정이 경악에 물들었다. 그 시선 끝에서, 강렬한 기운을 풍기는 누군가가 기사들을 대동한 채로 걸어오고 있었다.
“지난 청문회 때가 생각나는군요, 폐하.”
“입장이 바뀌었구나.”
아그네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용사, 일로이는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용사 일로이, 다섯 번째 재앙, 안개를 무찌르고 복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