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0 - 100. 사건과 사건 사이 (3)
“어서 와라, 용사. 안개를 무찌르고 바로 예까지 달려온다고 고생이 많았다.”
“그간 격조했습니다. 폐하께서는 평안하셨는지요.”
용사가 풍기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숨을 죽인 대신들이 내쉬는 공기가 바닥에 떨어지며 깔리고 있었다. 용사는 대신들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전, 대신들이 보았던 용사는 불완전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계속 싸우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그렇지 않아 보이려 해도 대신들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 용사의 모습은 정치라는 진흙탕에서 오랫동안 뒹군 노구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용사는 물어뜯기며 쓰러질 듯하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격조했다니. 우스운 말을 하는구나. 그럼 재앙을 상대하는 동안 내게 계속 서신을 보내려고 하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랬다면 폐하께서 우려하시는 일도 없었을 것 같군요. 앞으로는 원정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꾸준히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용사는 대신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대신들을 아우르고 있었다. 찍어 누르는 제왕의 위압감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절로 고개를 숙이게끔 하는, 거대한 태산과도 같은 존재감.
“이제 좀 나를 대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진 것 같구나. 내가 바라던 바지만.”
“그럴 리가요. 폐하를 대할 때면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습니다만.”
용사의 말에 웃는 아그네스. 대신들은 저들끼리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그들의 갈곳 잃은 눈은 결국 내무대신에게로 모였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무대신은 그렇게 묻는 귀족들의 눈빛에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내무대신은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돌아…오셨군요, 용사님.”
이렇게라도 먼저 목숨을 건지든가 해야 한다. 간절하게 내무대신을 바라보던 귀족들이 뜨악한 눈빛을 띠었다. 지금까지 신나게 용사를 깎아내리며 여왕의 권위에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바로 꼬리를 내리고 백기를 들어 올리며 항복을 선언하겠다고?
“아니… 내무대신님, 지금.”
“자네들은 용사님께서 돌아온 게 달갑지 않은 듯허이? 나는 말했다시피, 용사님께서 돌아오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네.”
귀족들의 표정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것으로 바뀌었다. 뻔뻔하게, 내무대신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여왕과 용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 이렇게 된다면 우리가 했던 가정들이 모두 쓸모가 없어지겠군요, 폐하. 이렇게 용사님께서 강녕한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말입니다.”
내무대신은 고개를 돌리며 날카로운 눈초리로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저 바보들은 깨닫지 못하는 건가? 용사가 청문회에서 자신의 자격을 증명해 보이고, 재앙 셋을 격파해버린 시점에서, 용사의 면전에서 정치적인 싸움을 거는 건 자살행위임을?
“그렇군, 내무대신. 그런데 그대는 일로이를 축출하고 새로운 용사를 찾아 그 자리에 앉히려고 혈안이 되어있지 않았나? 내가 방금까지 대화하고 있던 이는 그럼 누구지?”
여왕의 조소에 내무대신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 표정. 내무대신은 내심 깨달았다. 이건 궐내의 불순 분자를 제거하기 위한 작업이다. 그리고 여왕은 이미 내무대신을 해임할 만한 충분한 근거를 이미 쌓아두었다.
“아닙니다. 이건 용사께서도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당신께서도 다시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을 테니까요.”
“왜 그러십니까, 내무대신님. 갑자기 존대를 다 하시고. 평소 하시던 대로 하시지요.”
용사의 말이 무섭게 파고들었다. 내무대신은 입가를 일그러뜨리려다, 경련에서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용사는 자신을 아주 아니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내무대신 그뿐만이 아니다. 이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을, 용사는 아니꼽다는 듯 내려다보려 하고 있었다. 대신은 내심 그 눈빛에 모욕감을 느꼈으나,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참았다.
“사람은 변합니다, 용사님. 지금은 용사께서 에버노드와 성국에 들르며 보이신 행보에 감화되었을 뿐입니다. 아주 순수한 경탄과 존경이라고 해두겠습니다.”
“아, 네. 그렇군요.”
용사는 내무대신의 변명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렸다. 내무대신의 관자놀이가 올라왔다. 내무대신이 시선을 슬쩍 들어 올리자, 여왕이 고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용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용사 일로이, 나는 너를 믿는다. 여왕이 신하에게 보내는 신뢰가 아닌, 용사를 믿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로서 말이지. 그대가 아니었으면 이 세상은 몇 번이나 멸망했을 거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그네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싸늘한 눈빛으로 대신들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은, 주로 용사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며 용사를 깎아내리려던 대신들에게 향했다.
“그대들은 아직도 용사가 궐내에 생긴 새로운 권력으로 보이나? 그대들의 목숨을 지켜줄 방패나 성벽이 아닌, 그대들을 노리는 창칼로 보이느냐? 그대들의 알량한 자리를 건사하기 위해 견제해야 할 대상으로 보이느냐는 말이다.”
귀족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아그네스는 입을 꾹 다문 귀족들을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기회에 그들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도 많은 이들이 내무대신에 줄을 서고 있었다.
“이런 그대들의 욕심이, 오늘 그대들의 정치 생명을 끝장내버릴 것이다.”
낭패.
귀족들의 얼굴 위로 떠오른 단어였다. 반항할 의지가 꺾여버렸다. 이미 그들의 수장 격인 내무대신이 꼬리를 말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꼬리를 내린 내무대신은 아마 이 숙청에서 살아남겠지. 여왕의 손짓에, 내무부 소속의 다른 대신이 하나 달려와 여왕의 옆에 섰다.
“호명하는 대신들은 지금 당장 대전에서 나가시오.”
대신의 말에, 궁정 귀족들의 표정이 더욱 썩어들어 갔다.
“메이슨 찰튼 백작, 마이젠 롬 남작….”
호명되는 귀족들의 반응은 셋 중 하나였다. 그늘진 얼굴 위로 아예 어둠을 드리우는 사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사람, 그리고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항명하는 사람.
“이럴 수는 없소! 우리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는 것이오!”
“맞소! 이건 궐내에서 늘상 벌어지는 토론이지 않소!”
용사와 함께 대전에 들어온 기사들이 제 발로 나가지 않는 귀족들의 어깨를 붙들었다. 귀족들은 몸부림치며 기사들을 떨쳐내려 했지만, 그들이 꿈쩍도 할 리는 없었다.
“자, 그럼 수고해주시오.”
사형 선고와 같은 말이 떨어졌다. 내무대신은 그의 수족들이 끌려 대전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그는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아도 살아남은 것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허수아비다.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인 허수아비.
“그저 입이나 다물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소.”
내무관 하나가 중얼거렸고, 내무대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만 보고 있던 귀족들은 시선을 용사에게로 돌렸다. 용사는 지금도 아니꼽고 한심하다는 듯 귀족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귀족들이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고, 그들의 귓가로는 허탈한 듯 용사가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전의 문이 열리고, 왕도에는 발도 못 붙이게 될 이들이 대전 밖으로 나갔다. 내무대신은 몸에서 힘이 쭉 빠져버린 채 자신을 원망스럽게 노려보는 귀족들의 시선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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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네요. 저 사람들 시선 보이나요?”
다프네가 낮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나는 동감하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제 내무대신에게로 향하는 시선은 거의 없었다. 이따금 호기심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 그들마저 이내 금방 고개를 돌렸다. 방금 여왕의 말 몇 마디로 인해 내무대신의 수족이 잘려 나가고, 나를 내부에서 흔들 사람이 사라져버렸다.
“그러게. 이제 이쪽으로 전부 시선이 쏠리네.”
박쥐도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는 어디 줄을 서고 아양을 떨어야 할지 고민하는 자들의 눈을 한 채로. 나는 그들의 눈이 대부분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작게 혀를 내찼다.
“원래 그런 것입니다.”
나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무부의 다른 대신, 베노이 아우프레 백작이었다. 40대 후반 정도.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중키의 사내였다. 슬슬 중신으로서 전성기를 맞이할 때로 보였다. 아마 힘을 잃어버린 내무대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지 않을까.
“이 왕궁 내에서 저들과 같지 않은 자들을 찾아내는 게 오히려 더 힘들 겁니다. 매 순간이 그들에게는 제 잇속을 챙기고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니까요. 이제 내무대신이라는 큰 기둥이 하나 졌으니, 자연스레 다른 기둥을 찾아 헤매는 겁니다. 그게 용사님이라는 거한 착각을 하고 있을 뿐이고요.”
“백작께서는 어떻습니까?”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잡은 줄을 남들보다 강하게 붙들고 있을 뿐인 거죠.”
베노이 백작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여왕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말을 참 어렵게도 한다. 괜한 겉멋이 들지는 않아서 좋긴 하다만.
“재앙을 물리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이 세상의 희망이 되어주실 거죠?”
베노이 백작을 그리 말하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베노이 백작의 물음에 답을 돌려주었다.
“물론입니다, 백작.”
“감사합니다, 용사님.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함께 여왕님도 잘…부탁하겠습니다.”
베노이 백작은 마지막 말을 덧붙일 시점에서 여왕을 향해 고개를 흘긋 돌리며 눈치를 보았다. 나는 그 말이 영 찜찜했지만, 그냥 못 들은 척 흘러가게 두었다.
“용사 일로이.”
나는 여왕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흠칫, 어깨를 떨며 고개를 돌렸다. 여왕이 붉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베노이 백작을 지나치고 여왕의 옥좌까지 다가갔다.
“고맙다. 네가 나서준 덕분에 많은 것이 해결되었어. 사후 정리는 베노이 백작을 위시한 임시 인사부가 전담해서 맡아줄 거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제가 내부에서 흔들릴 일도 없을 테지요.”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너를 의심한 적이 한 번도 없거늘. 내가 흔들리지 않는데 내부에서 흔들린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더냐?”
여왕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렇게까지 날 믿을 수 있다는 게 그저 조금 놀라울 뿐이었다.
“…폐하는 저를 굉장히 신뢰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네가 보여준 모습을 보고도 발목을 잡으려는 이가 이상한 것이겠지. 왜, 내 신뢰가 부담스럽기라도 하느냐?”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내저었고, 여왕은 그런 내 반응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나를 대할 때는 어깨 힘을 좀 빼도 좋다고 했거늘… 방금 대전에 들어오면서 내게 보였던 여유로운 태도는 다 연기였던 것이구나. 아직 내가 거북한 것이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타인의 눈에 제가 어깨에 힘을 빼는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모르니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불충이요, 선을 넘는 행동이라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실제로, 여왕과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나를 불타는 시선으로 노려보는 기사들이 있었다. 호위기사로서의 업무인 건지. 아니면 개인적인 질투심인 건지. 여기사마저 나를 노려보는 모습을 보면, 한숨을 내쉬고 싶은 기분이었다.
“네가 그리 남의 눈치를 보는 성격인 줄은 몰랐구나.”
“…폐하의 말씀은 감당할 수가 없겠네요.”
나는 어쩔 수 없이, 조금 편한 말투로 여왕을 대했고, 여왕은 만족한 듯 미소를 조금 더 짙게 지어 보였다.
“그래. 아무튼, 이번 재앙도 훌륭하게 마무리를 지었구나. 보상이 따라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네 개인적인 부탁이나 소원이 있다면 하나 들어주고 싶구나. 용사 파티에게 주어지는 보상들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말이다.”
여왕은 제안과 함께 턱을 괴며 나를 바라보았다.
개인적인 부탁이나 소원.
나는 가만히 여왕을 바라보며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안개를 무찌른 이후로 마음속에 자리한 다른 결심 하나를 입 밖으로 내기로 결정했다.
“그럼, 지금 하나 청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내 결의가 담긴 눈에, 여왕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어딘가 기대가 담겨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호오.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바라도 있더냐. 좋다. 얼마든지 한 번 말해보아라.”
나는 그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열의. 그리고 진심을 담아서.
“강해지고 싶습니다.”
내 말을 들은 여왕의 표정이 0.1초 정도 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