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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01화 (102/158)

Chapter 101 - 101. 사건과 사건 사이 (4)

아주 잠시, 위엄을 벗어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여왕의 얼굴은 금세 평정을 되찾으며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는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강해지고 싶다니. 이미 재앙을 세 개나 물리치고서도 강해지고 싶다는 말을 하는 거냐?”

“이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재앙을 상대한다는 건, 아무리 강해도 부족한 일입니다. 특히, 희생자를 만들지 않으려면 그야말로 재앙을 압도하는 힘이 있어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단언했다. 그저, 한없이 강함을 추구하는 것. 이 세상을 멸망시켜버릴 수 있는 존재와 맞서 싸우려면 말 그대로 이 세상보다도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여왕은 그런 내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가만히 나를 읽어내려는 여왕에게, 나는 순순히 읽혀주었다.

“곤란하군. 너를 여기서 더 강하게 만드는 법 같은 건 나도 잘 모르겠다. 네게 어떤 성유물이나 보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가져가라 해도 성검 한 자루만 못할 테니.”

여왕은 한참이고 나를 바라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왕실의 호위기사단을 곁눈질로 둘러보고는 작게 흠, 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소원은 소원 아니더냐. 조만간 너를 왕궁으로 호출하도록 하겠다. 내 최선을 보여줄 수 있도록 하지.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고.”

“생각해주시는 것만으로 기쁩니다, 폐하. 반드시 그 성원에 보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에게 무언가 짚이는 바라도 있는 듯했다. 나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고, 여왕은 다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았다. 물론 네게만 물어볼 생각은 아니었다. 용사 파티 전원이 분투해줬으니, 다른 파티원들에게도 개인적인 부탁 하나씩은 들어줄 생각이었거든.”

여왕의 시선이 게오르그와 다프네, 마리안느에게로 향했다. 세 사람은 모두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여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왕은 용사 파티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는 듯 작은 소리로 대화하는 그들을 내버려 두었다.

“기탄없이 말해보아라. 게오르그 단장부터 말하면 되겠군.”

게오르그는 다프네, 마리안느와 눈빛을 교환하더니 평소 늘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이라도 된다는 양 거리낌 없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파티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딱 한 가지 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왕의 붉은 눈동자 위로 강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게오르그는 슬쩍 내게로 고갯짓하며 아주 의외의, 내게는 당황스럽기가 그지없는 말을 던졌다.

“일로이, 저 녀석이 휴가 동안 다른 일에 얽히지 않도록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다음 재앙의 전조가 있기 전까지는, 온전히 자신의 시간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주십시오.”

나는 눈살을 확 찌푸렸고, 여왕은 재미있다는 듯 짙은 미소를 띠었다. 아니, 저 녀석은 대체 무슨 맥락에서 저런 헛소리를 하는 거야. 게다가 다프네랑 마리안느도 같이….

“그대들은 정말 용사를 깊이 생각해주는군. 정작 용사는 자신을 그다지 돌볼 생각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확실히 조용한 휴가가 필요하긴 하겠어.”

게오르그는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몰래카메라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정작 휴가를 어떻게 써야 할지 정할 당사자를 빼놓고 다른 사람끼리 내 휴가를 논하고 있었다.

“지난 휴가 때는 바크틴스에서 고생했고, 크라켄을 물리치고 난 후에는 파티 내부 일을 단속한다고 정신이 없었겠죠. 그전에는 용사로 발탁되고 정신없이 지냈을 테니, 지난 몇 년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지냈을 겁니다.”

갑자기 뭐라는 거야, 저놈은. 하지만 게오르그는 날 향해 고개를 돌리려 하지도 않았다. 나는 완전히 무시당한 채 게오르그가 내 휴식의 필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깐 숨 돌릴 시간 동안만이라도 용사를 지켜주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여왕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 찌푸린 표정을 슬쩍 보고는 다시 게오르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약조하지. 갑자기 재앙이 들이닥치지 않는 이상, 용사 파티 전원을 다른 일에 호출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대들은 그동안 원하는 만큼 휴식할 수 있도록 해라.”

게다가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휴가였다. 나는 게오르그를 향해 휙 고개를 돌렸지만, 게오르그는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너무 앞만 보고 달리다가는 망가진다. 그건 네가 용사라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쓸데없는 배려를.”

게오르그는 질색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골탕 먹이는 데 성공한 사람처럼 큭큭거리며 웃었다.

“너 잠시 쉰다고 멸망할 세상이 아니다. 그랬더라면 진작 멸망하고도 남았겠지.”

나는 게오르그의 웃음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여왕은 축객령을 내렸다. 위엄있게, 군중을 아우르며 등장한 것치고는 김빠지는 퇴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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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 밖으로 나서자 내 머리 위로 눈이 한 송이 떨어졌다. 눈이 한가득 쌓인 왕도의 거리는 보기보다는 춥지 않았다. 바람이 세게 불어오지 않아서 그런 걸까. 위병들이 아마 열심히 쓸고 다녔을 왕궁 근처의 거리는 깨끗하다. 나는 입에서 계속 김을 내뿜으며 걸었다.

“축하한다, 긴 휴가를 받았군, 일로이.”

“…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너는 왜 그런 말을 해서.”

휴가가 필요한 것도, 동정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속으로 한껏 투덜거리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내 남은 손에는 왕궁을 나서기 전 갈아입은 제복이 든 가방이 있었다. 이 하얀 제복은 아무리 입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우리도 쉬어야 하니까요. 그게 아니라면, 설마 바로 다음 재앙을 찾으러 떠나기라도 할 생각이었어요, 일로이?”

다프네가 새침하게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용사 파티도 강행군을 해온 건 사실이다. 다프네는 어쩐지 내가 입을 다물게 하는 방법을 점점 깨우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아니…, 아마 여섯 번째 재앙을 상대할 때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을 거야. 이번에는 딱히 걸리는 점도 없고 하니, 휴가는 제대로 보낼 수 있을 거고.”

원작에서도 큰 사건은 없었나. 갑자기 마물들이 미쳐서 단체로 왕도로 쳐들어오는 것만 아니라면 여섯 번째 재앙, 혜성을 상대하기 전까지는 가만히 있어도 될 거다. 뭐, 마냥 가만히 있을 생각은 나도 없었지만.

“어떻게 휴가를 보낼지만 생각하자구요. 재앙에 대한 걱정은 나중에 하고.”

다프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눈이 그녀의 콧잔등에 떨어졌다. 나는 옹기종기 모인 용사 파티를 보며 팔짱을 끼었다.

“자, 일단 오늘은 해산. 다들 피곤할 텐데, 들어가. 내일부터는 따로 호출이 있을 때까지는 출근하지 말고 쉬어. 와서 예산 정리라도 하겠다면 난 고맙고.”

농담을 던지는 내게 다프네는 꽁한 눈빛을 보내왔다.

“나중에 다 같이 어디 여행이라도 가요. 일로이를 가만히 두면 또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거 같거든요. 옆에 붙잡아두고 감시해야 하는데.”

다프네는 그리 말하고는 마리안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 좀 잘 감시해주세요, 마리안느. 일로이의 페이스에 휘말리지 말고.”

“물론입니다.”

마리안느는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나는 두 사람 사이로 발생하는 묘한 기류를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서로 싸우는 눈빛은 전혀 아닌데. 안개로 들어가겠다는 마리안느를 다프네가 가로막았었다고 들었다.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그 둘의 대화를 바라보았다.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천천히 들어가요.”

의외로 다프네가 가장 먼저 가보겠다고 말했다.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멀어지는 다프네를 따라 눈을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다프네와는 따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지금의 다프네는 혼자 있고 싶으니 말 걸지 말아달라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으니까.

“나도 돌아가지. 이번 휴가는 정말 나도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야겠군. 겨울 낚시나 한번 가볼까, 일로이? 내가 나쁘지 않은 장소들을 꽤 알고 있어.”

겨울 낚시라. 낚시에는 흥미가 그다지 없었지만, 뭔가 저 온갖 잡기에 능한 녀석이 하는 제안이라 구미가 당기는 건 사실이었다. 내가 은근히 흥미를 보이는 눈치이자, 게오르그는 내 어깨 위로 손을 얹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흥미가 생기지? 완전히 야생에서 보내게 될 거라고. 장작도, 불도 자급자족에 식량까지 현지 조달로 하는 여행. 아마 후회하지는 않을 거다.”

게오르그는 그런 혹하는 말을 던져놓고는 손을 휘적거리며 떠나갔다. 마리안느와 함께 덩그러니 눈 오는 거리에 남겨진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마리안느는 다시 본래의 그녀로 돌아온 척을 하고 있었다. 아무런 표정 없이,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모습이 어딘가 고양이 같아서,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돌아갈까, 우리도?”

마리안느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동네 꼬마들은 눈 보는 게 질린 것 같다. 코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 조잘조잘 떠들며 걸어간다. 얼어붙은 길 위로 마치는 잘 지나다니지 않는다. 마리안느는 내 옆에서 걸으며 조금씩, 그 풍경들을 돌아보았다.

“배고프지 않아?”

“네. 뭐라도 사 들고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밖에서 사 먹는 건? 피곤하지 않아?”

내 물음에 마리안느가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아뇨. 제가 요리하겠습니다. 간만이니까요.”

우리는 시장가로 걸어갔다. 나는 마리안느가 고르는 식자재를 알아서 사 담았고, 마리안느는 의욕에 찬 눈으로 꼼꼼하게 채소와 고기를 골랐다. 평소라면 알아서 사가겠다고 했겠지. 나는 내 앞에서 상인들의 말을 들으며 아주 조금씩 고개를 끄덕이는 마리안느를 보았다.

“…됐습니다.”

마리안느는 품에 안긴 식재료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종이 바구니 속에 든 바게트의 끝자락이 내 턱을 콕 찔렀다. 어쩐지 콧노래를 불러야 할 것 같은 뒷모습이었다. 머리 위에 쌓인 눈이 통통거리는 발걸음에 따라 조금씩 흘러내렸다.

“어떤 요리를 하려고?”

“제가 어릴 때 먹던 스튜를 따라한 요리를 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고아원에 있을 때, 언젠가 먹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때 아마 살면서 고기라는 걸 처음 먹어봤을 겁니다.”

마리안느는 드물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아니, 처음인 건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이단심문관이 되고 나서도 계속 그 맛을 찾으려 시도했어요.”

시장가를 벗어난 한적한 골목은 우리 본부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건물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서 나는 가만히 마리안느의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그러다가 깨달은 건, 어렸을 때 먹었던 그 맛을 그대로 재현하기는 힘들 거라는 결론이었어요. 아무리 해도, 먹어봐도 그때의 맛이 나지 않았으니까.”

마리안느는 무감정하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우리는 본부에 다다랐고, 어딘가 조금은 황량한 분위기의 로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다녀왔습니다.”

나는 벽난로의 불을 때었다. 따뜻한 색이 로비를 채웠다. 마리안느는 한가득 담아 온 식자재를 들고 부엌으로 가 요리를 시작했다. 나는 집이 마리안느의 요리가 풍기는 냄새로 채워지는 걸 기다렸다. 부드럽고, 따뜻한 냄새였다.

“다 됐습니다.”

벽난로 근처의 흔들의자에 앉아 반쯤 졸고 있던 나를 마리안느가 불렀다. 나는 곧바로 부엌으로 올라가 마무리되는 일을 도와주었다. 냄비를 슬쩍 보니, 뭉근하고 걸쭉한 국물과 빼곡하게 쌓인 건더기가 보였다.

“…꽤 많이 했구나.”

“한 번 더 우려서 먹으면 맛있으니까요.”

마리안느가 내 그릇에 스튜를 떠다 주며 대답했다. 조용하지만 편안한 분위기에서 우리는 저녁을 먹었다. 마리안느는 한 입 스튜를 먹고는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숟가락을 잠시 내려놓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 모습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맛있네. 너도 그렇지?”

“…다시 그런 맛을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마리안느는 그릇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올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주방의 촛불은 마리안느의 금빛 눈처럼 밝게 빛났다.

“어째서일까요.”

마리안느는 다시 웅얼거리며 숟가락을 떴다. 마리안느는 다시 스튜를 한 입 먹고는 입술을 천천히 오물거렸다. 그 맛을 아주 오래 음미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저는 아무래도, 여기가 정말 집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습니다.”

마리안느는 고백하듯 그렇게 말했다.

“계속 일로이의 곁에 이렇게 있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마리안느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멍하게 그 미소를 바라보다가, 뭐라고 대답을 들려주려 입을 열었지만, 마리안느는 재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남은 일이 다 끝나고 나서, 일로이의 말을 들을래요. 지금은 그저, 이러고 있는 것만으로 저는 만족하니까요.”

마리안느는 나를 바라보다가, 조금 더, 미소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바꿔 보였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마주보다가, 다시 숟가락을 들고 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숟가락이 오고 가는 소리가 부엌을 한동안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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