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03화 (104/158)

Chapter 103 - 103. 휴가 (2)

“저… 폐하, 그러니까, 이건?”

나는 팔짱을 낀 여왕 앞에서 어떤 괴상한 기계 같은 것에 왼팔이 묶인 채 앉아있었다. 좋게 말하면 판타지식 혈압 측정기. 나쁘게 말하자면 그냥 구속구. 나는 차갑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싯누런 금속을 바라보면서 입가를 살짝 비틀었다.

“일단은 네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아보려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네 상태가 어떤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겠지.”

여왕은 팔짱을 풀고서 금속 기계 앞으로 다가와 손을 턱 얹었다. 내 헐벗은 상체를 여왕의 시선이 훑고 지나갔다. 여왕의 뒤로는 거의 자기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안경을 쓴, 로브 차림의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키는 내 가슴께에나 닿을까.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기계로 다가오더니 복잡해 보이는 레버와 버튼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점검했다.

“이건 네 마력을 측정하기 위한 기구다. 마력의 순환은 어떤지, 또 보유량은 어떤지. 눈여겨볼 특징이 있는지. 부가적으로 네 몸 상태도 점검할 수 있다고 하더군.”

“마씀미다. 이 기계의 규격은 애초에 여왕님이나 7서클 이상의 대마법사들을 기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용사님이라도 아마 무리 없이 측정할 수 있을 검미다.”

여왕의 말에 얼씨구 하며 신나게 뒷받침하며 설명하는 마법사. 혀가 짧은지 발음이 새었다.

“그…실례지만, 당신은 누구시죠?”

내 물음에 마법사는 기계를 만지다가 고개를 벌떡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안경 뒤로 있는 커다란 눈은 오드아이. 한쪽은 노란색, 한쪽은 파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닿는 생아색의 단발머리. 하지만 저 천진하고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어딘가 무시할 수 없이 깊은 힘을 내비치고 있었다.

“앗, 제 소개가 늦었슴미다. 저는 왕도 마탑의 탑주, 라우라 모린이라고 함미다.”

라우라 모린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탑주가 이렇게나 어린 사람이었나…? 아니, 겉보기는 저렇지만 아마 나이는 많이 들었겠지. 얼핏 보기에도 느껴지는 하해(河海)와 같은 마력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애가 지닐 수 있는 마력이 아니었다.

“이래 봬도 7서클의 대마법사다. 한 번 도와달라고 했는데, 꽤 흔쾌히 수락해주더구나.”

“폐하의 명이라면 못할 게 어디 있겠씀미까. 게다가 아직 아무도 조사해본 적 없는 용사님의 신체를 처음으로 조사할 수 있다니…. 영광임미다.”

영광이라고 말하기에는 눈에 흥분한 기색이 너무 다분합니다. 나는 볼에 홍조까지 띤 라우라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엉덩이를 엉거주춤 옆으로 옮겼다. 꼭 날 해부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 질색한 표정을 본 라우라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돌아갔다.

“일단 조사를 시작하겠씀미다. 숨을 크게 들이마셔 주세요.”

나는 일단 시키는 대로 하기 위해 숨을 들이마셨다. 라우라는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아마 시작 버튼으로 보이는 초록색 버튼을 꾹 눌렀다. 찌릿한 전류 같은 게 내 왼팔을 타고 올라와 몸을 헤집기 시작했다. 썩 유쾌한 감각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그 느낌은 금방 사라졌다.

“자아아, 이제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라우라가 손바닥을 비비며 측정기의 계기판으로 다가갔다. 계기판에 나타나는 숫자를 바라보며 라우라는 연신 음, 하며 납득하는 듯한 소리를 뱉어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기를 반복하며 클립보드에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더냐, 라우라.”

“예상이 맞았다면 맞은 거 같씀미다. 용사님의 마력은 저나 폐하처럼 애초에 측정할 의미가 없씀미다.”

라우라는 측정 결과를 기록한 용지를 들어 올려 보여주었다. 여왕은 측정지를 받더니, 호기심이 깃든 눈으로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렇군. 이 7+라는 말은, 마력 보유량이 7서클 이상이라는 뜻인가.”

어리둥절한 나를 돌아보며 라우라는 입에 미소를 띠었다.

“마력 수준이 7서클을 넘어서면 마력 보유량을 측정하는 게 의미가 없씀미다. 마력의 회복 속도도 이미 차원을 달리하고, 같은 양의 마력이라도 그 질이 다르기 때문임미다.”

라우라는 열심히 설명했고, 여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잠깐. 그럼 여왕 또한 이미 마력 보유량이 7서클 수준을 넘어갔다는 뜻이야? 내가 놀란 표정으로 여왕을 바라보니, 여왕은 어째서 자신을 바라보냐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왜 그러느냐?”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긴. 원작 내에서 재능으로는 비견할 자가 없던 여왕이다. 최연소로 소드마스터 자격을 얻었던 그녀라면, 마력 보유량이 7서클 이상의 대마법사와 비슷하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겠지.

“자, 그럼 마나 보유량은 이렇게 확인했으니…. 네가 굳이 영약을 가져가 먹을 필요는 없을 듯하지만, 어차피 네게 주려고 생각해두었던 것이니.”

여왕은 측정기 옆의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병을 내게 내밀었다. 병속에는 찰랑거리는 새파란 액체가 들어있었다. 마치 바다에 빠진 은하수처럼, 별들은 빛나고 있었다.

“자, 가져가라. 어떤 식으로든 네게 도움이 될 거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폐하.”

“망극하긴 뭐가 망극하냐.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될 알이다.”

여왕은 조금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내 구속구를 풀어주었다. 나는 저린 팔을 주무르며 그새 하나 더 작성된 내 측정 결과 용지를 받아 들었다.

“자, 용사님도 한 번 확인해보씸시오. 결과가 꽤 만족스러울 검미다. 신체 잠재성도 일반적인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고, 마력 순환도 아주 건강함미다. 적어도 영약이나 시술로 용사님의 신체를 더 강화할 방법은 없을 것 같씀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귀여운 글씨체로 적힌 용지의 글을 읽었다.

“용사님의 수련 정도에 따라 얼마나 더 발전하느냐가 달려있겠죠. 그 경지를 넘어선 순간, 이미 인간을 벗어난 하늘의 경지에 들어선 검미다.”

라우라는 그리 설명하며 엣헴, 이라고 말하듯 허리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런 규격 외의 사람들을 위한 정확한 측정 장치를 개발해낸 게 바로, 이 라우라 모린임미다.”

“…대단하네요, 탑주님.”

“그냥 라우라라고 불러주씸시오. 직책명은 그리 달갑지가 않씀미다. 친근해 보이지 않으니까.”

라우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내 칭찬은 썩 마음에 든다는 듯한 표정으로 뿌듯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저 정도 되는 마법사가 자랑스러워할 정도면 어지간히도대단한 물건인 것 같기는 했다.

“자, 그럼 이제 다음 단계로 가볼까. 측정도 됐고, 영약도 건네줬으니. 라우라, 너도 따라올 텐가? 아마 흥미가 있을 것 같은데.”

“물론임미다, 폐하. 이번 측정 결과를 보고서 용사님에 대한 흥미가 더 강해졌씀미다.”

라우라는 눈을 빛내며 주먹을 불끈 쥐었고, 여왕은 내게 웃옷을 던져주었다. 옷을 걸친 나를 바라보는 여왕이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실전이다, 일로이. 한동안 내 수준에 맞는 기사가 잘 나오지 않았기에 검술 수업을 듣지 않고 있었는데, 좋은 기회가 생겼군.”

실전?

나는 어리둥절하며 여왕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평소 늘 따라붙던 호위 기사가 없으니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긴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몇 개나 지나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젖히니, 널찍하고 튼튼해 보이는 연무장이 나왔다. 아마 여왕 전용의 연무장이 아닐까.

“그간 누군가와 대련하면서 검술 실력을 키운 적은 있었느냐?”

나는 고개를 조심스럽게 저었다. 퀘노어 대공에게는 가르침을 조금 구한 정도였고,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다. 아르옌과의 싸움은 대련이라고도 하기가 뭣한 싸움일 뿐이었다. 누군가와 진지하게 검술과 무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건, 성검이 유일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녀는 현재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사실 나는 검술에는 왕도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검을 다루면서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더 잘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눈앞의 사람을 이길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스스로 강해지는 거지. 기본을 배우는 거랑은 다른 것이니까.”

연무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기사 하나가 여왕에게 자연스럽게 검을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더니, 또 검을 건네주었다.

“오늘은 용사님과 대련하시는 겁니까? 한동안 연무장에는 나오시지 않더니.”

“내 연무를 위한 게 아니다. 애초에 나한테 무언가를 가르칠 기사가 남아있기는 하더냐.”

여왕의 말에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노기사였지만, 그는 그저 허허, 웃어넘겼다. 두 사람의 언행을 보니 막역한 사이인 듯했다.

“어릴 때는 제가 붙잡고 가르쳤지만 말이죠.”

“그거 한 3년 가르쳤나? 나한테 그러고 졌잖나, 그 이후로는 나한테 연무장에 꾸준히 나오기만 하라고 잔소리했으면서.”

노기사는 도발과 같은 여왕의 말에 오히려 뿌듯한 듯 웃음을 지었다.

“뭐, 폐하께서 워낙 뛰어난 덕분이 아닙니까. 왕국 역사상 최강의 검사가 될 자질의 아이를 가르쳤으니까요. 검을 잡은 지 3년 된 아이에게 지더라도 여한은 없습니다.”

노기사는 흘긋, 나를 바라보더니 검을 한 자루 더 건네주었다.

“용사님은 쌍검을 쓰시지 않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노기사가 전해주는 검을 받았다. 날을 죽인 검이었다. 나는 쌍검을 들고서 여왕을 바라보았다. 여왕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손짓했다.

“자, 뭘 그리 기다리고 있느냐. 시작해보자.”

혹시나 했는데, 여왕과의 대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나는 퀘노어 대공과 검을 섞던 기억을 떠올리며 검을 움켜쥐었다. 과연, 그녀의 검은 얼마나 강할까. 아마 대공과 붙어도 절대 밀리지 않을 실력일 텐데.

“전력으로 와 보거라. 단순히 힘의 크기로 더 강해질 수 없다면, 가진 힘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를 궁리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비슷하거나 좀 더 강한 사람과 붙는 건 그 활용법을 비약적으로 키우는 데 도움이 되지.”

여왕은 내가 하수인 것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보였다. 저건 자신감이었다. 어떤 상대와 붙는다고 해도 순수한 검으로는 자신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나는 쌍검을 들고 익숙한 자세로 섰다. 어떻게든 그녀에게서 빈틈을 찾아보려 해도, 빈틈은 보이지 않는다.

“탐색전을 펼치는 건 의미가 없을 거다.”

마음이 가라앉는다. 대련이 시작된 순간 눈앞의 사람은 여왕이 아닌, 내가 쓰러트려야 할 목표였다. 나는 기세를 정돈하며 손목의 힘을 느슨하게 했다. 빈틈은 노리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다. 나는 언젠가 퀘노어 대공이 해주었던 말을 떠올리며 신형을 날렸다.

“오오.”

짧게 들려오는 라우라의 탄성. 그리고 내 눈앞의 여왕은 짙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껍구나. 좋은 태도다.”

쾅--!!!

검과 검이 충돌하며 내는 파공음이 연무장뿐만이 아닌, 궁 전체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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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군.”

어떻게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있었다. 나는 만신창이가 된 나를 우려스럽게 바라보는 다프네와 마리안느에게서 어떻게든 벗어나 방으로 돌아와 누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졌다. 이전만큼 허무하게 진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끗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진 것도 아니었다. 나는 분명히 여왕에게 전력을 다해 달려들었다. 여왕은 미소를 지우고 함께 전력으로 응수했고, 비등하게 싸우는 듯하면서도 어느샌가 나는 땅바닥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설마 정말 질까, 생각했는데.”

나름 쌓아온 세월이 있다. 최근 안개 속에서도 수백 번의 전투를 거듭하면서 내 검은 성장했다. 다시 아르옌과 싸우면 어떻게든 밀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만이었군.”

오만이다. 강함을 추구하면서도 자신이 이미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향상을 꿈꾸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안 될 자세였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기를 반복했다. 삼 일에 한 번은 정기적으로 대련을 하기로 했으니, 다음 차례에는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줘야겠지.

“후우.”

나는 짧게 숨을 내쉬고 정좌했다. 눈을 감고 오늘의 전투를 복기해볼 심산이었다. 여왕은 어떻게 움직였더라. 맨 처음 달려드는 나를 볼 때 어디를 보고 있었더라? 움직임을 읽고, 그다음으로는 방어 태세를 취했었나, 공세를 취했었나. 휘두를 때 세기는 어땠나. 나를 쓰러트린 공격은 정확히 어떤 것이었나.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는 그 움직임을, 깨달음을 이해하려 해보았다. 어째서 그렇게 검을 그었는지, 어째서 그렇게 움직였는지. 그리고, 감은 눈 속의 어둠이 점점 옅어지더니, 모종의 풍경을 이루었다.

“…어라.”

어딘가 익숙한 풍경인데, 여기.

“[계속 혼자 애를 쓰는 게 안쓰럽더구나.]”

아.

나는 오랜만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번쩍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게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여기 있다.”

두리번거리는 내 눈앞에, 성검이 나타났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에, 홍옥처럼 빨간 눈동자, 그리고 화사하게 피어있는 화관.

“그 암여우…, 아니, 여왕에게만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는 내가 함께하는 게 훨씬 효과가 좋을 거다. 사실 여왕은 필요없을지도 모르고.”

“아니, 여태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건 뭐야?”

“위기의식.”

성검은 갑자기 나타나더니 엉뚱한 말을 했다. 내가 눈을 멀뚱하게 뜨고 있자, 성검이 손가락을 딱, 하고 튀겼다.

“대련이다, 일로이. 심상 세계니까 네 육체에는 큰 무리가 가지 않겠지.”

성검의 손에는 그녀의 본체… 그러니까, 성검이 들려 있었고, 내 손에는 너울이 들려 있었다.

“그 여자를 눈 깜짝할 사이에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빡세게 단련시켜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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