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4 - 104. 휴가 (3)
“세 번째 개방.”
수련의 나날을 이어가던 도중, 성검이 갑작스럽게 한 말이었다. 나는 헐떡거리는 숨을 내뱉으며 잠시 너울을 내려놓았다. 성검은 내 맞은편에 태연한 얼굴로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홍옥과 같은 붉은 눈. 언제 보아도 사람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 완벽한 조형. 성검은 그녀의 본체를 땅에 꽂으며 부드럽게 팔짱을 끼었다.
“삼 단계를 개방을 말하는 거야?”
성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검은 땅에 꽂아놓은 검에 팔을 기대더니, 갑자기 다시 손을 딱, 튕겼다. 내 눈앞에 작은 탁자 하나와 의자 둘이 솟아올랐다. 어떻게 된 장소인지 모르겠다. 이런 일이 일어날수록 저 녀석의 정체가 뭔지도 궁금해지고.
“잠시 앉자. 쉬면서 이야기해도 될 것 같구나.”
성검은 검을 휘적휘적 흔들며 걸어갔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성검의 맞은편에 앉았다. 성검은 미소와 함께 자리에 앉는 나를 바라보았다. 심상 세계 속에서 성검의 인격체를 마주한 건 몇 번 되지 않았지만, 성검은 날 바라볼 때면 늘상 저런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은은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여섯 번째 재앙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겠지, 일로이?”
“…혜성을 말하는 거라면.”
뭐, 혜성도 혜성이지만, 혜성의 존재를 감지하고 달아나기 위해 몰려오는 수만 마리의 마물도 있다. 그걸 막아내고, 돌파한 다음 혜성을… 부숴야겠지.
“혜성은 또 다른 존재다. 안개와도 다르지. 그걸 베어내는 건 어쩌면 지금 네 힘으로도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성검은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분명 그걸 해치우고 나면 목숨을 잃을 거다. 혹은 재기불능이 되거나.”
성검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는 원작을 잠시 떠올려보았다. 아르옌이 혜성을 쓰러트린 과정. 마물을 돌파하고, 떨어지는 혜성을 말 그대로 베어냈었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였다. 마침내 세상이 아르옌을 완전히 인정해주는 순간이었으니까.
“강해져야지, 그러면. 네 다음 개방이면 혜성을 멀쩡하게 쓰러트릴 수 있다, 이 말인 거야?”
성검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의미심장한 미소는 유지한 채로.
“그건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지? 나라고 해서 정말 그렇다고 확답을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일로이. 나를 믿는 게 아니라, 너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지.”
성검은 나를 타이르듯 말해주었다. 나는 눈살을 슬쩍 찌푸리며 턱을 괴었다. 저렇게 어딘가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모습은 마치 산속 깊이 숨어있는 현자를 대하는 것 같았다. 확신. 나는 엷게 숨을 내뱉었다.
“삼 단계 개방은? 조건이 이 단계처럼 따로 있는 거야?”
“결국 조건이라는 건 내가 정하는 거다, 일로이. 네가 삼 단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느껴지면 네게 세 번째 개방을 허락하는 거지.”
성검은 내게 느닷없이 검을 넘겨주었다. 나는 검자루를 쥐고 성검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아닌 것 같네. 생각보다 훨씬 성장하긴 했지만 말이야.”
성검은 깍지를 끼고 그 위로 그녀의 턱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리고는 싱긋, 눈을 예쁘게 접으며 내게 눈웃음을 지어주었다. 어딘가 여유마저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진해라. 지금 네 그릇은 전혀 부족하지 않으니까. 지금은 그저 그 그릇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 것에만 집중해. 삼 단계의 개방은 그 다음 문제다.”
성검은 어딘가 처연한 미소와 함께 그리 말했다.
“일단, 그 여자를 상대로 한 방 먹이는 것도 포함하지. 이기라고까지는 말하지 못하겠군. 네가 성장하면 그 여자도 함께 성장한다. 네가 그 여자를 추월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성검은 여왕을 항상 그 여자라고 칭했다. 어쩐지, 그녀를 언급할 때면 표정이 뾰로통해지는 것도 같았고. 그러면서도 여왕을 높게 평가하는 모습은 귀엽다고 할 만했다.
“뭘 그렇게 보느냐, 일로이. 이야기나 제대로 들어라.”
성검은 괜히 핀잔을 주며 볼을 부풀렸다.
“지금은 열 번 싸우면 열 번 진다. 네가 안정적으로 열 번 싸우면 한 번 이길 수 있을 때, 다시 이야기해보자.”
성검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그녀를 따라 엉거주춤 함께 일어섰다. 성검은 다시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고, 탁자와 의자는 신기루처럼 흔들리며 사라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여기서 열심히 해야지.”
성검의 손에는 그녀의 본체와 똑같이 생긴 검이 한 자루 더 나타났다.
“자, 이번에는 쌍검이다, 일로이. 다시 한번 와보거라. 쌍검은 검을 두 개 다루는 일. 당연히 검 하나를 다루는 것보다 훨씬 더한 노력이 필요하지.”
나는 기수식을 취하는 성검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 일부러 숨기는 사실들.”
성검은 내 말을 듣더니 눈썹을 치켜올렸다.
“언제쯤이면 알 수 있을까.”
“…너는 알지 못하는 편이 좋은 사실들도 있을 거다. 영원히 네게 비밀로 해두고 싶은 일들도 있고. 하지만 언젠가는 알아야만 하는 일들이지.”
성검은 내 질문을 회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명쾌한 대답을 들려주지도 않았다. 늘 그렇듯, 어딘가 수심에 잠긴 표정으로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 표정을 볼 때마다 나는 불안해졌다. 그렇기에 늘상 먼저 말을 꺼내고는 먼저 말을 돌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말거라. 그럴 때면 차라리 네가 화를 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어느새, 성검은 내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녀의 파리한 손이 내 뺨 위로 얹혔다. 저 눈은 무엇이냐고, 나는 몇 번이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는 눈에 담긴 감정의 무게를, 깊이를, 난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손등 위로 내 손을 얹었다. 성검의 손이 움찔, 떨리더니 엄지로 내 뺨을 쓸기 시작했다.
“정말로 시작하자. 응석을 더 받아주지는 않을 거다.”
성검은 조금 붉어진 얼굴을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응석을 부렸다는 건지.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발을 굴렀다. 툭, 툭. 심상 세계의 땅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돌인지, 흙인지, 나무인지 모를 감촉. 땅과 나는 붙어있지 않았다. 나는 그 위화감을 추진력 삼아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선공은 언제나 유리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선공의 이점을 살리지는 못해.”
성검은 돌진을 깃털처럼 받아내었다. 성검의 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그걸 성공시키지 못하기 때문이지.”
퉁. 그리고 성검은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나를 뒤로 날려 보냈다. 여기서 성검은 그치지 않는다. 순식간에 나를 허공의 나를 따라잡는 성검의 움직임을, 나는 포착하지 못했다.
“전투 중에 실수를 곱씹지 마라.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만 생각해라.”
교차한 쌍검 위로 성검의 검격이 심판처럼 떨어져 내렸다. 나는 짧은 신음과 함께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해 뒹굴었다. 충격에 몸을 움찔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발을 비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기를 느낀 건 등 뒤쪽이었다. 돌리면 늦는다.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나쁘지 않았네.”
성검은 그리 평하며 다시 앞에 나타났다. 이제 한 번 넘겼을 뿐. 나는 숨을 흘리며 검을 들어 올렸다. 단 한 번 막아낼 뿐인데, 팔이 요동쳤다. 문제는, 저게 성검의 전력의 반조차 내지 않은 실력이라는 것.
“…너와 비등한 승부를 펼치는 걸 목표로 해야 할까.”
“그때가 되면, 여왕을 이기는 건 아주 수월한 일이 될 거다.”
성검은 눈앞의 목표에나 집중하라는 듯 잔소리했다. 땅바닥에서 뒹굴 나를 생각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대등하게 저 검과 겨루고, 언젠가는 저 검을 넘어서는 것을 생각하고 나는 앞으로 발을 뻗었다. 전진을 멈춰서는 안 된다. 내가 검을 쓰면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이었다.
앞으로 뻗어가는 너울. 성검은 가볍게 너울을 막아냈다. 나는 교착상태를 이어가려 검을 붙였지만, 성검은 절대 내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게 두지 않았다.
“무모한 시도였지만, 여기서는 얼마든지 무모해도 된다.”
성검은 내 마음을 읽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나는 비틀어진 미소와 함께 내 모든 시도를 흘려버리는 성검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나는 두 검을 모두 땅에 내려놓은 채였고, 성검은 내 목에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이번 시도는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다음번에 그 여자와 대련할 때 한번 써먹어봐라.”
사기가 확 꺾이네, 진짜. 나는 아직 멀었다는 듯 히죽거리며 웃고 있는 성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와 어린 얼굴이었다. 언젠가는 이 녀석을 이기고 저 하얀 볼을 꼬집어버릴 테다.
“오늘도 수고했다, 일로이.”
성검은 검을 놓치고 넘어진 내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헛웃음을 내뱉는 내 시야가 흐려졌다. 나는 성검은 슬쩍 내게서 물러난 채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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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내린다. 여왕의 움직임에는 버릇이랄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가는대로, 몸이 익힌 대로, 상대가 움직이는 대로. 자유롭고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듯한 움직임. 읽으려 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 움직이라는 신호.
“내가 너와 검을 섞을 때마다 느끼는 사실이지만….”
여왕은 검에 발을 대고 밀어냈다. 그 발차기마저 품격이 느껴질 정도로 우아했다.
“네 성장 속도는 이상하다. 분명히 어느 정도 배움과 성장을 이룩한 사람의 움직임인데, 매번 너와 붙을 때마다 새로움을 느껴. 꼭 끝이 없는 도화지와 같이.”
붙을 때마다 싸움은 길어졌다. 여왕의 움직임은 적응하고 파악할 수 없는 경지에 있었지만, 내가 강해졌다. 나는 매일 밤, 사람이라면 적응하고 파악할 수 없는 상대와 싸우고 있으니까.
“신기하구나.”
그리고, 여왕의 검이 변화를 일으켰다. 나는 그 변화에 놀라며 눈을 홉떴다. 여왕은 슬쩍, 내 놀란 얼굴을 바라보며 웃음을 흘렸다.
“‘나 이외에’ 이런 자질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건 처음이다.”
그래, 여왕은 천재다. 이 세계관 최강의 소드마스터가 될 자질을 지닌 사람.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게 이상하지. 여왕은 그대로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언제 자신이 성장에서 밀렸냐는 듯, 순식간에 쾌검으로 전환하며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즐거움을 만나게 되었구나.”
여왕의 검이 내 검에 붙어왔다. 조금 들뜬 걸까, 여왕의 눈은 전에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머릿속에 내가 몇 번이고 그려보았던 상황. 나는 그대로 왼손의 검을 놓았다. 여왕의 반짝이던 눈에 당황한 기색이 깃들었다.
“이건….”
검이 흐른다. 두 자루로만 싸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건 오산이다. 균형이 무너진다. 주도권이 흔들린다. 나는 자유로워진 손으로 여왕의 손을 잡아채며 휙 끌어당겼다. 당황한 기색의 눈에는 또 다른 빛이 깃들었다. 나는 균형을 잃은 채 앞으로 넘어지려는 여왕을 받쳐주었다. 여왕의 손에 들린 가검(假劍)이 떵그렁,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제가, 이겼습니다.”
아직 내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여왕의 손에는 검이 없었다. 왼손으로 나는 여왕을 받치고 있었고, 오른손은 여왕의 옆구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얼굴이 가까웠다. 불경을 생각할 틈은 없었다. 드디어 이겼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여왕은 순식간에 내 다리를 걸며 뒤로 나를 자빠트렸다. 나는 내 위로 올라탄 여왕의 미소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여왕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 가슴 위로 검지를 짚었다. 얼굴 위로 아주 옅은 홍조가 띤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네가 이겼다.”
여왕은 평정을 가장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올라가 있는 손가락이 손바닥으로 바뀌었다. 여왕은 그렇게 슬쩍, 내게로 허리를 낮추었다.
“즐겁구나, 일로이. 아주 오랫동안 느껴본 적 없는 기분이었다. 당분간은 너와 연무장에서 죽치고 앉아있겠구나.”
나는 내가 삼키는 마른침 때문에 움찔거리는 목울대를 여왕이 바라보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여왕은 내 표정을 바라보며 낮게 웃음을 흘렸다.
“뭐, 그 전에 하나 네게 부탁을 해야 할 것 같지만 말이다.”
“부탁… 말입니까?”
여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여섯 번째 재앙의 위치를 감시하고 있는 곳이 있다.”
“…마탑을 말씀하시는 건지.”
“정확히 알고 있군. 역시 용사라고 말해줘야 하나.”
여왕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뒤로 한데 모아 묶은 머리가 옆으로 슬쩍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탑 새 학기가 시작되면, 당분간 마탑에 머무르면서 여섯 번째 재앙의 대책을 마법사들과 함께 나눴으면 해.”
여왕은 웃으며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뭐, 그냥 거기 머무르기만 하기도 뭣할 테니, 조교 생활도 병행하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