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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05화 (106/158)

Chapter 105 - 105. 돌아온 탕아 (1)

마탑은 왕도 외곽에 솟아있는 13층짜리 건물이다. 사실 ‘마탑’이라 이르는 구역은 탑 본체를 포함한 그 거대한 구역 일대를 모두 일컫는 말이기도 했지만, 왕도 시민들에게는 그냥 높다란 탑 하나 정도로 생각되는 건물이었다. 쓸데없이 높이 솟아있어 왕도 어디를 가든 눈에 띄는 건물. 이따금 근처에 시체가 살아서 걸어다닌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곳.

하지만 마법사들에게는 그 의미가 달랐다. 다른 곳도 아닌 왕도 마탑에 입성한다는 건, 이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에게 한 발짝 가까워진다는 뜻이었고, 마도의 궁극을 추구하는 이든, 마법으로써 권력을 쟁취하고 싶은 이든, 그 모든 이들에게 무한한 기회를 제공해주는 약속의 땅이요, 황금이 물을 이뤄 흘러내리는 꿈의 땅이었다.

“…내일까지 이 책을….”

“…이번 실험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해… 일주일 동안 먹지도, 자지도, 씻지도 못했으니까….”

뭐, 그런 이들이 자발적으로 그들보다 더 뛰어난 마법사들의 노예가 되는 곳이기도 했고.

“커피…커피는 어디 있지.”

“정신 똑바로 차려! 잠들면 안 돼! 우리 연구 실적이 뒤처져서는 안 된단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질린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여인이 하나. 여인은 죽어가는 마탑의 마법사들을, 아니, 교수들의 똘마니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급히 어디론가 뛰어가는 누군가가 일으킨 바람에 풀잎을 닮은 여인의 초록빛 머리칼이 살랑거렸다.

“빌어먹을 마탑.”

여인은 중얼거리며 손에 든 책을 내려다보았다. 우중충한 회색 눈이 깜박였다. 대체 어쩌다가 자신이 이런 신세가 되어버린 걸까. 여인은 다시 치밀어오르는 한숨을 삼키며 터벅터벅 복도를 걸어갔다. ‘그날’ 이후로 여인은 의욕을 잃어버린, 속 빈 강정 같은 게 되어버린 듯하다.

“이 짓도 이제 그만 때려치우고 싶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진짜.”

여인은 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힘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여인의 뒤로, 다급하게 그녀를 쫓아오는 듯한 사람이 한 명 보였다. 여인은 뒤로 고개를 돌리며 자신을 따라온 마탑의 노예를 마주했다. 노예는 자신의 얼굴을 보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넬라 부교수님, 이번에 마탑에 새로운 교수와 조교가 들어온다는 거, 알고 계셨습니까?”

“새로운 교수랑 조교요?”

마법사. 한때 용사 파티의 강력한 공격 자원이었으며 지금도 미래가 창창하다 평가받는 천재. 넬라 타르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새로운 교수와 조교가 들어오는 일은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다. 이렇게까지 당황하면서 달려올 이유가 또 있을까. 넬라는 가슴 깊은 곳에서 갑자기 고개를 불쑥 들이미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무시했다.

“예. 이번에 점성학… 아, 이제는 천문학인가. 아무튼, 그쪽 교수진에 새로이 들어간다고 하더라고요. 부교수님께서도 지금 천문학에 한 발 담그시고 있지 않습니까.”

노예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지. 그냥 합동 과정… 학회 하나에 참석하고 있을 뿐인데.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니고 말이야. 넬라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뚱하게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그게 아니라, 오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아마 넬라 부교수님께는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대체 누가 오는 겁니까, 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을 참은 넬라는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마탑의 조교수가 입을 열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그, 용사 파티의 마법사인 다프네 에피폰과 용사님이 온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이번에 천문학의 에이머스 교수님께 직접 들은 내용인지라…. 탑주께서 허락하고 주선하셨다고 합니다.”

넬라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이성의 끈을 놓았다. 다음 수업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제쳐두고, 승강기를 향해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부, 부교수니임!’이라며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조교의 목소리는 바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아니, 그것들은 가뜩이나 빡친 사람한테 염장이라도 지르려고 오는 거야?

짜증으로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것 같다. 넬라는 승강기에 들어서자마자 13이라고 적힌 버튼을 누르고는 승강기 안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용사… 아니, 일로이…!”

그렇게 분을 삭이지 못하고 홀로 씩씩거리던 넬라는 승강기의 문이 열리자마자 뛰쳐나와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마탑의 꼭대기, 13층은 온전히 탑주의 것이다. 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저지른 건지, 알아보러 가야겠다.

넬라는 순식간에 거대한 문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는, 숨을 들이마시고 생각을 정돈했다. 이 문을 열어젖히기 전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해야 했다. 심호흡, 심호흡. 화가 나도 이성을 유지하는 법을 배우기로 했잖아.

“들어오세오.”

그러나, 넬라가 완전히 생각을 정돈하기도 전에, 혀가 짧고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묵중한 문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아주 부드럽게 열렸다. 넬라는 당황하며 열리는 문을 보았고, 그 너머에 햇살을 받으며 고양이처럼 책상 위에 엎드리고 있는 탑주를 마주했다.

“넬라 타르. 오랜만임미다. 진행하시는 연구는 잘 되고 있슴미까? 6서클이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느껴지네오.”

어딘가 장난스러운 말투와 발음. 탑주, 라우라 모린은 미소와 함께 넬라를 맞이했다. 넬라는 대마법사가 내뿜는 기운에 조금 위축되었다가, 다시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탑주님. 잘 지내시고 있는 것 같네요.”

“당신이 왜 여기 왔는지는 알고 이씀미다.”

넬라는 눈살을 찌푸렸고, 라우라는 미소를 지었다.

“용사님 때문이지오? 이번에 새로 들어올 조교랑 교수 말임미다.”

라우라의 말에, 넬라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간신히 머리를 붙들었다. 이걸 인정했다가는 제 자존심이 말이 아닌 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그걸 긍정하는 대신, 넬라는 말을 머릿속에서 고르고 또 골라서 내뱉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이나 해주세요, 탑주님. 이대로면 저는 그냥 저를 일방적으로 쫓아낸 용사와 같은 학회에서 일하게 될 수도 있다고요. 그걸 얌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어째서 용사가 여기 오게 된 건지 또한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고 있지 않씀미까, 넬라.”

라우라는 느긋하게 뉘어두었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넬라 또한 알고 있었다. 여섯 번째 재앙의 관측과 탐구. 그리고 언제 그 괴물체가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 용사라면 응당 알아야 할 정보였고, 언젠가는 그 정보를 얻으러 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아직 제대로 파악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리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그럼 전 학회를 나가겠습니다. 그 녀석들이랑 하하호호 웃으면서 밤하늘이나 보고 있을 수는 없어요. 그러기도 싫고요.”

“그래도 얼굴을 마주하긴 해야 할 검미다. 아카데미 과정에 용사님을 투입할까 생각하는 중이니까오. 아마 사이좋게 신입들의 교육을 맡아야 할 검미다.”

“아니, 탑주님!”

넬라는 당황하며 입을 열었지만, 라우라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건 받아들일 수 없어요. 저를 일부러 괴롭히기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게다가 아직 학기가 시작할 때까지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남았는데…. 대체 그동안 뭘 하라는 거예요?”

“넬라. 언제까지 그렇게 피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검미다.”

라우라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넬라는 침음성을 내뱉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라우라의 노랗고, 파란 눈이 넬라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번 일은 시험이나 다름없기도 함미다, 넬라. 마법사로서 갖춰야 할 자질을 대부분 갖춘 당신이 유일하게 부족한 게, 냉정한 판단력이에오.”

라우라는 훈계하듯 말했고, 넬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왕국 최고의 대마법사가 하는 충고이며 가르침이다. 자존심이 상하기는커녕 한 마디 한 마디를 새겨들어야 했다.

“굴욕적이어도, 화가 나도 용사님은 협력해야만 하는 사람임미다. 다시 그를 마주하면 달리 보이는 바가 있을 수도.”

틀린 말은 아니다. 넬라가 아예 관심 자체를 끊은 사이, 용사는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용사가 네 번째 재앙에 이어 다섯 번째 재앙까지 격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는 질투심도 뭣도 들지 않았다. 저곳은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며 단념하는 생각이 있었다.

최고의 마법사가 되고 싶었다. 탑주의 자리에도 서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다시 들어온 마탑이었다. 겨우 사람 얼굴 하나 보기 싫다고 여기서 나갈 수도 없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여섯 번째 재앙을 쫓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씀미다, 넬라.”

라우라의 말에 넬라의 얼굴이 확 붉게 달아올랐다. 넬라는 부정하듯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언성을 높였다.

“누, 누가 열심히 여섯 번째 재앙을 쫓았다는 말입니깟.”

넬라의 말에, 라우라는 낮게 웃음을 내뱉었다.

“성장하세오, 넬라. 당신은 충분히 가능성이 이씀미다. 나를 이어 이 자리에 앉을 가능성.”

라우라는 그리 말하며 넬라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넬라의 머릿속에 라우라의 말이 계속 감돌았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말. 현 탑주를 이어 다음 자리에 오를 가능성.

“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넬라는 승강기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뭔가, 달콤한 꾐에 넘어가 자신이 탑주를 찾아간 이유가 유야무야 넘어가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띵, 하고 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눈앞의 승강기가 열렸다. 넬라는 텅 빈 승강기에 탑승하고는 가만히 방금 일어났던 일을 곱씹어보았다.

“…속은 기분이야.”

넬라는 쓰게 내뱉고는 승강기의 손잡이에 기대었다. 승강기는 천천히 내려갔다. 승강기 밖으로는 마탑 인근의 풍경이 보였다. 자라나는 인재들의 교육기관도 겸하는 마탑은 하나의 구(區)를 형성하고 있었다. 아직 대학원생의 무서움을 모르는 어린 학생들이 저마다 조를 이뤄 걸어다니고 있었다. 한때, 그녀도 저럴 때가 있었지.

“…열심히 해보자.”

그 풍경을 바라보니, 어쩐지 평정심이 찾아왔다. 용사의 얼굴을 봐도 화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는 화가 가라앉은 것 같았다. 넬라는 마지막으로 길게 숨을 내뱉은 후에, 눈을 감고서 1층에 다다른 승강기의 문앞에 섰다.

띵.

종이 울리고, 숭강기가 열렸다. 넬라는 눈을 반짝 뜨고 승강기 밖으로 나서려 발을 내디뎠다.

“어.”

그리고, 웅성거리는 마탑의 소리를 들었다.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꺽다리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넬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승강기로 들어가려는 남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 거 같네.”

그리고 얄밉게 웃는 미소. 약간 비열해보이는 눈매와 그 속의 청록색 눈동자. 넬라는 너무 뜬금없는 때에 등장한 용사를 보고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그냥 멀뚱멀뚱, 승강기에 올라타는 용사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마법사를 바라보았을 뿐.

“너….”

“일단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용사는 그리 가볍게 말하고는 승강기에 올랐다. 분홍 머리의 마법사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넬라는 그런 마법사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년. 왜 저렇게 강해진 거야? 6서클의 경지는 넘어선 거 같잖아.

“…이게 뭐냐고.”

넬라는 올라가 버린 승강기를 바라보며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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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라를 만났다고 했슴미까?”

라우라는 재미있다는 듯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왕국 최고의 마법사를 마주하는 다프네는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고의 경지라고 불리는 일곱 번째 고리를 엮은 마법사. 그녀도 얼마나 그곳에 다다르고 싶었을까.

“마탑에서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여러 연구를 병행하고 있슴미다. 우리 마탑의 실질적인 에이스라고 생각하셔도 됨미다.”

라우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용사님은 그녀가 파티를 나가는 걸 막지 않으셨다고.”

“예. 제가 반쯤 내보낸 거나 다름없지만 말이죠.”

나는 다프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두 사람을 거인과 맞붙기 전에 화해시키고, 하나의 파티로서 활동하게 할 자신이 내게는 없었다.

“잔인하다면 잔인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난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수용할 거고요.”

“아님미다, 용사님. 저였어도 그렇게 했을 검미다.”

라우라는 그러면서 다프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다프네씨의 자질은 모든 방면에서 넬라를 가볍게 뛰어넘는 수준이니까요. 용사님께서 그 자질을 어떻게 알아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우라는 말꼬리를 흐렸다.

“둘 중 하나를 재앙 공략을 위한 파티에 둬야 했다면, 저라도 다프네씨를 뒀을 검미다.”

라우라는 그리 말하고는 이 화제는 여기까지 하자는 듯 손뼉을 짝, 쳤다.

“자, 그러면 이제 여섯 번째 재앙에 대해 의논해보겠씀미다. 용사님께서는 계속 혜성의 동향을 관찰하셔야 하니, 천문학회에 소속될 거라고 통보받았지 않슴미까?”

“네, 그랬죠.”

“그곳에서 용사님이 특별히 할 일은 없고, 그저 다프네씨와 학자들이 함께 의논한 내용을 보고받는 것에 집중하시면 될 것 같슴미다.”

“…어, 그렇게만 있어도 되는 걸까요?”

“물론, 딱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하나 있슴미다만.”

라우라는 오드아이를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달라진 기세에, 나는 숨을 죽였다.

“마탑에 이상한 놈들이 숨어든 것 같슴미다.”

라우라의 말에, 나도 마찬가지로 표정을 굳혔다.

“그놈들을 다프네씨와 함께 색출해내는 걸 도와주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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