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8 - 108. 봄이 오고 (1)
웬일로, 왕도에는 훈풍이 불고 있었다. 그게 하늘의 변덕인지 그럴 때가 되어서 바뀐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일찍 찾아온 봄을 반기고 있었다. 누군가는 마탑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입학식에, 마법사들이 무슨 술수를 썼다는 게 그들의 의견이었다.
“이번에는 입학식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겠지?”
“저번에는 온 나라가 들썩거렸으니까 말이야. 입학식이고 뭐고 다 축소해서 진행해버렸지.”
사람들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크틴스의 사람이 아니라면, 작년 봄에 찾아왔던 세 번째 재앙에 대한 기억은 잠깐 스치고 지나간 악몽 같은 것이었다. 상처도, 흉터도 모두 그들과는 거리가 먼 이들의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제대로 하겠군. 또 귀족, 부잣집 도련님 아가씨들이 어깨 으쓱이면서 왕도 걸어 다니는 꼴을 봐야겠군. 그건 그거대로 조금 짜증날 거 같은데.”
“아니, 왜. 한창 어깨에 힘주고 다닐 나이잖아. 이제 성인 될 애들인데 그 정도는 귀엽게 넘어가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올해 재개되는 입학식은 그렇게 왕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준비되었다. 동시에, 전 대륙의 유망주들이 왕도로 모여들고 있었다. 마법사든, 기사든, 행정가든. 아카데미는 그들이 연을 쌓을 장소였으며 실력을 키울 기회였다.
“좋아.”
“반드시 1위로 졸업해 놈들의 콧대를 꺾어버리겠다.”
유망주들은 저마다 결심을 중얼거리며 왕도로 향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 중에서는 낭만적인 꿈을 품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언젠가는, 내가 다음 재앙을 격파할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내가 성장하기만 한다면 용사 파티에 들어가는 것도 거뜬하겠지. 내 재능이 어디 가서 떨어질 재능도 아니고 말이야.”
결국 모여드는 건 나이 든 소년 소녀들의 꿈과 욕망이었다. 그렇게 모여드는 소년 소녀들을 바라보며, 넬라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탑의 8층. 구내식당이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인물을 바라보며 짤막하게 혀를 내찼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용사님? 저렇게나 너를 추종하는 이들이 많은데.”
“나를 우상화하고, 기대를 품는 거겠지. 그들이 바라는 건 내 자리에 저들이 있는 거니까.”
넬라는 재미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일로이는 파스타에 포크를 푹 찍으며 둘둘 말고 있었다. 다시 만나 지난 한 달간 계속 마주친 일로이는, 넬라가 알던 것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더 차분해졌다고 해야 하나. 짐작할 수 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마나의 규모도, 전력도 이제 넬라로서는 전혀 추측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너,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는 주제에 사람을 혐오하는구나.”
일로이는 깔끔하게 말린 파스타를 입으로 가져가며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눈썹을 올렸다. 넬라는 그 태연한 표정을 보며 어처구니없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뭐, 이끌어주겠다. 저들이 네 곁에 설 수 있는 정도가 되도록 지도해보겠다. 이런 생각은 없는 거…. 하긴. 네 성격이라면 우쭐해지지는 않을 만도 하지만.”
넬라는 끝으로 갈수록 작아지는 목소리로 말을 끝맺었다. 우물우물 파스타를 씹는 일로이의 눈길이 넬라에게 고정되었다. 넬라는 그렇게 일로이가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잘못한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걸렸을 때의 느낌이라고 할까. 저 눈은 넬라에게 있지도 않은 잘못을 들추려 하는 것 같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진짜 짜증나니까.”
넬라는 애써 압도당하려는 자신을 일으켜 세우며 일로이에게 짜증을 냈다. 일로이는 그런 넬라을 아무렇지 않게 계속 바라보더니, 다시 제 접시로 눈을 돌렸다.
“사람을 혐오하는 게 아니야. 저 기대와 다짐이 부질없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야. 재앙과 마물에 대항하고 싶다는 심정은 고맙지만, 저런 식으로 생각해서야 사람을 구할 수는 없지.”
“대단한 성인 납셨네. 뭐, 나 같아도 저런 녀석들은 귀찮으니 달고 다니고 싶지는 않지만.”
넬라는 그리고서 손을 내저어 사역마와의 연결을 끊어버렸다. 마탑 아래에서 신입생들이 조잘거리는 소리는 이제 들려오지 않았다. 일로이는 다시 파스타를 한 입 먹더니 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넬라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일로이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저 녀석이랑 사이 좋게 밥이나 먹고 있는 거야.’
저 청록색 눈은 비치는 빛과 일로이의 기분에 따라 색이 자주 바뀌었다. 어떨 때는 한없이 푸른 녹음과 같은 느낌을 풍기는가 하면, 어떨 때는 폭우가 내리는 깊은 수해(樹海)가 생각나는 색이었다. 끝을 알 수 없이 깊은, 들어가면 분명히 길을 잃어버릴 그런 숲.
“요즘 뭐가 그렇게 심란해?”
그렇게 물었던 것에는, 넬라 그녀의 의지는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단순히, 그 눈을 보면 떠오른 생각이 입 밖으로 나왔을 뿐-
아차. 저 녀석의 개인적인 사정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은데.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넬라는 질문을 던져놓고는 실수했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지었다. 실수했다는 걸 숨길 기색도 없이, 넬라는 유리잔을 확 집어 들어 물을 마셨다.
“별일이네. 네가 그런 질문을 다 하고.”
“따, 딱히 궁금한 것도 아니거든. 네가 그런 식으로 있으면 뭘 꾸미고 있는지 모르니까. 마탑에 행여 폐를 끼치는 행동이라도 하려는 게 아닐까 하니까.”
넬라는 반박할 만할 말을 쏟아냈다. 일로이는 그런 넬라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고, 넬라는 그 미소를 보고는 분하다는 듯 얼굴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저 웃음이, 네게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그럼 그렇지. 어차피 대답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심란하다기보다는 불안한 거지. 여태 이렇게 가만히 있었던 적은 없거든.”
그리고 들려온 대답. 넬라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일로이의 얼굴에 잠시 떠올랐던 쓴웃음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는 평소와 같이 뚱하고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가만히 있었다는 건 무슨 소리야? 꽤 바쁘게 지내고 있는 거 같던데.”
“바쁘지는 않았어. 그리고 내가 바쁘지 않다는 건 좋은 징조이면서 불길한 징조이기도 해.”
다시 파스타가 일로이의 손끝에서 둘둘 말리고, 입으로 들어갔다. 넬라는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일로이에게 불만스러운 듯 입을 비죽 내밀었다.
“아, 그러십니까. 불길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뭐 내가 내일 뒤질 수도 있고 안 뒤질 수도 있다는 말이랑 뭐가 달라? 사람이 강해지면 빙빙 돌려말하지 않으면 뒤지는 병이라고 생기는 건가. 너도 그렇고, 이따금 탑주님도 그렇고.”
넬라는 그리 말하면서 샌드위치를 집어 들고는 베어 물었다. 일로이는 불만 가득한 넬라의 목소리를 듣고는 다시 킥킥 웃었다.
“그러네. 그래도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잖아?”
“네가 활동하면 재앙이 활발하다는 소리고, 활동하지 않는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소리겠지. 둘 다 안 좋을 거면, 네 몸이 편한 편이 좋지 않아?”
넬라는 도끼눈을 뜨며 일로이의 말에 대답했다. 일로이는 문득, 물잔을 집어 들려다 멈추며 넬라의 말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가.”
“몰라. 너 알아서 생각해.”
넬라는 이런 일상적인 주제로 일로이와 대화를 나누는 게 영 달갑지 않았다. 그녀는 일부러 대화를 더 길게 이어가지 않게 끊어버리고는 샌드위치를 해치우기 시작했다.
“강의 준비나 잘해. 귀족 도련님들한테 망신당하지 말고. 아가씨들은 너를 귀여워할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뭐, 어차피 강사라서 딱히 기대도 하고 있지 않겠지만.”
일로이는 얼굴을 확 찌푸렸다. 넬라는 그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거슬리게 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샌드위치를 베어먹는 속도를 줄였다.
“다프네가 도움이 꽤 되고 있을 텐데.”
이번에는 넬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악감정은 서로 없다. 적어도 넬라는 이제 없었다. 이제 용사 파티에 남겨놓은 감정이나 미련은 없으니까. 이왕이면 얼굴도 안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 도움이 많이 되고 있지. 적어도 밥만 축내는 누구보다는야 훨씬 도움이 되지.”
서로 악담을 주고받고는 있어도 적의는 없었다. 넬라는 이 기묘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쫓아낸 사람이랑 이렇게까지 평온하게 있을 수 있다니.
그 뒤로 특별한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가만히 식사에 집중하는 척하면서 서로 다른 생각에 잠겼다.
“넬라.”
문득, 일로이가 부르는 소리에 넬라는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저 청록색 눈에 초록빛이 더 강하게 드리우고 있었다.
“왜.”
“너는 날 원망했냐?”
맥락없는 질문이었다. 넬라는 일로이의 질문에 코웃음을 쳤다.
“아이고. 재앙을 세 개나 쓰러트리고 세상을 그만큼 구한 사람이 그게 아직 신경 쓰였어?”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일로이는 고개를 내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열심히 먹더니, 어느덧 그의 접시는 깔끔하게 비워졌다. 넬라는 아직 반쯤 남은 샌드위치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먼저 가볼게. 나중에 관측 때 보자.”
일로이는 깔끔하게 입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히 먼저 저 녀석이 일어나는 게 불편하고 신경 쓰이는 건 아니었지만, 넬라는 일부러 일로이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 이상으로 저 녀석과 친한 척을 하고 싶지 않았다.
넬라는 어딘가로 걸어가는 일로이를 보았다. 그다지, 저 녀석이 어디로 가는지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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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을 거 같아요.”
다프네가 한 말이었다. 연구실에서 그녀는 종이 한 장을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관측만 하는 게 아니라, 대책을 서둘러 세워야 해요. 충돌 시기는 여름쯤이라고 생각하면, 이제 반 년도 채 남지 않았는데 어째서 제대로 된, 구체적인 대책이 아직 수립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탑주님이나 일로이가 알아서 해결해주기를 바라기라도 한 건지.”
다프네는 중얼거리며 책상 위로 몸을 뻗었다.
“수고하네.”
나는 다프네의 옆으로 커피 한 잔을 내려놓으며 앉았다. 다프네는 일로이가 옆으로 다가와 앉자 잠시 풀린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마저도 잠시, 다시 심각한 얼굴로 돌아와 종이 위로 무언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떤 규모의 마법으로 대처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적어도 이걸 막는 데 참여할 마법사는 5서클 이상은 되어야 할 거 같은데. 적어도 그런 사람이 백 명은 있어야 할 거 같고. 이런 대규모 마법이 시행된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다프네는 커피를 두 손으로 쥐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탑주님과 함께 더 의논해볼게요. 7서클의 시선으로 보면 뭔가 또 다른 게 있겠죠.”
다프네는 보고를 마치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눈 아래로 슬슬 다크서클이 드리우려 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대학원생이다.
“일로이 쪽은 어때요? 알아낸 건 있어요?”
“대충 눈만 그쪽으로 두고 있어. 적극적으로 움직일 때는 아니니까. 더군다나….”
나는 그저께 나를 불러냈던 의외의 손님을 떠올렸다.
“…진짜 위험한 녀석들은 지금 저 아래에 있을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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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확인해보겠습니까.”
오랜만에 다시 만난 안드레 주교의 눈은 훨씬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언제나 그가 식사하는 식당. 주교는 샐러드를 앞에 두고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주교가 건네주는 종이를 받고는 눈살을 확 찌푸렸다.
“…아카데미 입학 공고? 이걸 왜 주교께서 제게 주는 겁니까?”
“악신 숭배자들이 이걸 지니고 있었습니다.”
주교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교롭게도, 용사님이 마침 마탑에서 여섯 번째 재앙의 관측을 시작할 때와 겹치는군요. 공교로운 건지, 아니면 악신 숭배자들의 정보력이 그만큼 뛰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나는 피에 젖은 입학 공고를 문지르다가, 탁자 위로 올려놓았다.
“놈들이 아카데미에 첩자라도 침투시키려는 걸까요.”
나는 주교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이미 악신 숭배자들은 마탑 깊숙이 침투해있습니다. 여기서 굳이 추가로 첩자를 투입해 꼬리를 늘리려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악신 숭배자들은 도통 알 수 없는 짓을 벌인 것 같다.
“…하지만 놈들의 끄나풀이 신입생에 섞여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가 없겠네요. 차라리 그쪽부터 수사망을 좁혀가는 게 나으려나.”
어떻게 보면 강사로 배정된 게 다행이었다. 적어도 학생과 접촉할 명분은 얻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한창 머리를 굴리는 나를 바라보던 안드레 주교는 포크를 집고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조심하십시오, 용사님.”
평소의 주교라면 하지 않을 말. 나는 긴장한 주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악신 숭배자들. 이번에는 진지하게 용사님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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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입생 명단을 펼쳐 보았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조금이라도 의심쩍은 녀석은 죄다 동그라미 표시를 해놓았다. 나는 그 명단을 훑어내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혼자 점검하다 보니 동그라미 표시를 해 놓은 학생이 너무 많았다.
…일단은, 배치고사를 참관하는 게 우선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