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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09화 (110/158)

Chapter 109 - 109. 봄이 오고 (2)

신입생들은 저들끼리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옆자리 학생의 전력을 가늠하고, 자신의 힘과 비교하며 속으로 만만한 상대를 따지고 들었다. 저 녀석은 내가 이겨볼 만하다. 저 녀석의 머리는 밟고 그 위에 설 수 있겠다. 모두가 서로를 잡아먹을 생각으로만 가득한 때였다.

“…해서, 이 격동의 시기 속에 피어난 새싹들인 여러분이 어떤 모습으로 자라날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를, 이 세상을 떠받칠 거목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축사를 읽어 내려가는 교수 대표의 말에, 광장에 집결한 신입생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다음 거목은 그들이 되리라고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극악한 아카데미의 입학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입학시험을 통과한 뒤로 그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는 교수였다.

“물론, 여러분 중 누군가는 바닥에 있어야 하고, 누군가는 꼭대기에서 내려다봐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꼭대기에 선 사람과 바닥을 기는 사람은 뒤바뀔 수 있지요. 그게 여러분들이 경험해본 적 없는 사회이며 세상입니다.”

갑자기 냉소를 머금은 교수의 목소리에 신입생들의 표정이 뒤바뀌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이들, 그리고 여전히 자신감에 들어차 짙게 미소를 짓는 이들, 뒤바뀐 교수의 태도에 굳어버린 표정을 짓는 이들. 그리고, 경계심을 끌어올리는 이들.

“아카데미가 상냥하게 여러분을 교육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주세요. 여러분들의 꼭대기에 설 사람들은 애당초 아카데미에 입학할 필요조차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교수는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세상을 멸망시킬 재앙을 세 개나 쓰러트린 용사님께서 아카데미를 졸업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무력과 현명함, 공명정대함으로 명성이 드높은 북부대공은요? 아니면 현세대 최고의 재능이라고 불리는 여왕 폐하는 어떻습니까.”

교수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은 신입생들은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이거나,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이거나.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였다.

“아, 참고로 현재 7서클에 도달한 탑주께서도 아카데미 과정을 넘긴 채 마탑의 정식 연구원으로 그녀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입탑했을 때는…. 본인의 힘만으로 세 번째 고리를 엮어냈다고 하던가요. 그녀에게는 여러분들이 받아야 할 기초적인 교육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이겁니다.”

교수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냉철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전히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이들이 보이자, 교수는 입을 비틀었다.

“다섯 살배기 애새끼도 통과할 수 있는 입학시험 하나 통과했다고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인간이 된 것 같다는 착각은 버리라고.”

교수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막대한 압력이 교수에게서부터 발산되었다. 신입생들은 교수가 내뿜는 기운에 짓눌리며 하나둘씩 표정을 바꾸기 시작했다. 차원이 다르다. 그들이 반발심을 갖는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오만한 표정은 집어치우세요. 여러분들은 저 위에 있는 이들을 따라잡아야 합니다. 오만하게 여러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교수는 그리 말하며 미소 지었다.

“싸우세요. 잡아먹으세요. 필요하다면 손을 잡고 내치고 배신하십시오. 그들을 조금이라도 따라가고 싶다면 이 좁은 세상에서 한 번이라도 정상에 서보십시오.”

신입생들이 저들끼리 눈길을 교환했다. 똑똑한 이들은 더욱 발톱을 숨겼고, 똑똑하지 않아도 되는 이들이나 똑똑하지 못한 이들은 발톱을 드러냈다.

“지금부터 치러질 배치고사. 아직도 입학시험 때의 성취감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밑바닥에서 시작하게 될 겁니다.”

교수는 말을 마무리하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한껏 아카데미에 들어왔다는 감격에 가득 차 있던 신입생들 위로 찬물이 끼얹어졌다. 그들은 멍한 표정으로 인솔자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교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병아리들을 바라보았다. 신입생들 기를 죽여놓는 건 연례행사였다. 그들의 선배들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같은 말을 듣고 아카데미 과정을 거치며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저들도 배치고사를 치르고, 과정들을 지나치고 나면 알게 되겠지.

“그래서, 좀 어땠습니까?”

학생들이 빠져나간 광장. 교수는 교수석에 기척을 숨기고 앉아있던 용사에게 다가갔다. 용사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걸어가는 학생들을 시선으로 쫓고 있었다.

“재미있는 친구들이네요.”

재미있는 친구들. 교수나 용사를 놀라게 할 정도가 아닌, 딱 흥미를 줄 정도. 그 정도인 학생들. 용사의 평가는 생각보다 정확했다. 교수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년 그렇습니다. 신입생이라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죠. 왕국이 필요로 하는 건 건실한 일꾼이지, 큰 꿈을 꾸는 야심가가 아니니까요. 현실을 깨달아야죠.”

교수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텅 빈 광장의 의자들을 바라보았다.

“뭐, 사실 저 태도를 끝까지 가져가는 녀석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 순간의 충격을 잊어버린 채 다시 건방 떠는 모습으로 돌아오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다정하시군요.”

용사는 그런 감상을 남겼고, 교수는 무슨 말이냐는 듯 다시 빙긋 웃었다.

“달콤한 거짓말로 저들을 허황된 꿈에 사로잡히게 하려 하지는 않았잖습니까. 그러면서도 희망의 끈은 놓지 않도록, 따라잡을 수 있다고까지 말해주고.”

용사는 교수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제법 교육자다운 모습이네요.”

“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이상한 기분이군요. 그건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으로서의 말씀인 겁니까?”

용사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표정을 확인한 교수는 용사에게 할 질문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인데요. 계층이니, 서열이니. 밑바닥이니 꼭대기니. 이 세상이 재앙에 의해 멸망한다면 그런 속 편한 소리를 할 사람이 남아있을까요?”

냉소적이지만 지극히 용사다운 말이었다. 용사는 그 말을 끝으로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척을 꽁꽁 싸매고 있어, 마치 그림자가 서서히 일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교수는 사색이 되어 용사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황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런 의도로 한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결코 용사님을 비꼴 의도는 없었습니다.”

용사는 너털웃음을 내뱉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이 정말 속세의 가치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기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 죄송하면 천문학회에 이따금 얼굴을 비추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많은 손이 필요할 때니까요.”

용사는 그리 말하고는 휘적휘적 자리에서 떠났다. 교수는 철렁 내려앉았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을 깔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용사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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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프네의 연구실. 나는 프로젝터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수정이 사출하는 영상을 바라보았다. 영상은 배치고사가 막 시작된 건물 내를 보여주고 있었다. 마탑 내의 모든 사람이 하던 일을 멈추고 관람할 만한 행사였다.

“결계라. 심상 세계와 비슷한 작용을 하는 거겠지?”

다프네는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력을 얼마나 쏟아부었냐. 결계의 설계자가 누구냐에 따라 정확도가 달라지겠지만, 원리 자체는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감각의 확장이라는 면에서요. 공간을 잡아 늘릴 수도 있겠지만, 고작 이 정도의 일에 공간을 뒤틀 정도의 마력을 투입하는 건 낭비죠.”

다프네는 어리둥절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신입생들보다는 결계의 작용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공간을 비틀어 격리한다…. 어쩌면 이번 재앙에 써먹을 만할지도 모르겠어요.”

다프네는 무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능력을 벗어나는 수준으로 일을 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다프네는 과로하고 있다. 안개를 격파한 이후로 더 그래 보였다. 밤낮없이 연구를 진행하고, 마력 수준을 끌어올리고, 새로운 마법을 습득했다. 성국에서 대여했던 마도서는 이미 보지 않고도 줄줄 욀 수 있을 정도로 읽었다고 했다.

“언제나 고마워.”

알고 있다. 다프네는 누구보다 내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저렇게 조급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뭘 새삼스럽게요.”

다프네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일로이에게 내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내게는 그 무엇보다 큰 보답이에요.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니까.”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다프네의 성장은, 그녀에게는 전혀 당연한 게 아니었다. 다프네는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대었다.

“그러니, 그대로 있어 줘요. 어디로 떠나지도 말고, 나를 떠나보낼 생각도 하지 말고.”

다프네의 머리카락에서는 라벤더 향이 났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프네는 킥킥 웃으며 내 턱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지금은 저 녀석들을 지켜봐야겠죠.”

어느덧 건물 안의 풍경은 깊은 숲으로 바뀌었다. 가장 비슷한 풍경을 떠올리라고 하면 에버노드의 외벽 너머에 존재하는 숲이 생각난다.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들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곳의 마물들은 왕도의 귀여운 곰돌이나 멧돼지와는 궤를 달리한다.

“아직 무리일 거 같은데.”

“그렇죠. 아무래도 정말 초장부터 기를 확 죽여놓고 시작하려는 것 같아요. 아니면 난이도를 좀 조절해서 저 초짜들이라도 상대할 수 있도록 해놓든가.”

다프네는 수정을 툭툭 건드리며 신입생들의 개인 화면을 분할한 후 띄워놓았다.

“자, 여기 눈여겨봐야 할 사람들의 분할 화면이에요.”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화면 속에 나타난 십수 명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중 몇 명만을 제외하고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색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나는 아주 가만히, 그리고 유심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물들이 나타났다.

신입생들이 당황해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결계 속에서 신입생들은 눈 깜박할 사이 죽어 나갔다. 내가 제대로 살펴볼 틈도 없이 개인화면은 족족 끊어졌고, 어느덧 세 개만 남겨둔 채 모든 화면이 검게 물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쓰러지는 속도가 더 빠르네요.”

다프네가 침음성을 흘렸다. 나는 셋 남은 화면을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았다.

“운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마치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안다는 듯, 한 검은 머리의 소녀가 카메라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다프네는 소녀의 눈빛을 마주하고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저 아이….”

“응. 보고 있어.”

이윽고 남은 두 사람의 개인 화면이 차례대로 검게 물들었다. 나는 그 검게 물든 화면을 흘긋 바라보고는 신입생 명단을 보았다.

“분명히 이름이….”

그리고, 내가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리기가 무섭게, 소녀가 마물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에 맺히는 건, 마력으로 형성한 불길이었다.

“나탈리라고 했던가.”

그리고, 소녀의 학살극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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