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0 - 110. 봄이 오고 (3)
1위. 나탈리
2위. 유진 그레이슨
3위. 코라 포이스
4위. 빅터 야넨코
5위. 얀 비그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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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치고사가 끝났다. 표정이 있는 신입생들은 대체로 좌절하고 있었다. 무표정한 이들은 자신의 순위를 예상했다는 듯 점수판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무렇지 않게 떠났다. 아카데미의 순위에 비밀은 없었다. 아래에 있는 학생들에게는 사냥해야 할 목표를. 위에 있는 학생들에게는 자리를 지켜야 할 이유를 보여주었다.
“…에라이. 망했구만.”
“무슨 배치고사가 그래? 학생들 단체로 엿 먹이랴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별 생각이 없는 이들은 도태된다. 겨우 첫 번째 시험에서 자신감과 향상심을 모두 잃어버린 이들이다. 아카데미에 들어왔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하는 이들. 그리 중얼거리는 학생들을 다시 한심하게 바라보며 다른 신입생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채점 기준은 대체 뭐야? 그냥 숲에 마물 풀어놓고 누가 나중에 뜯어먹히는지에 따라 순위를 채점하기라도 하는 거야?”
“체계가 없군. 그냥 보고 교수들 마음에 드는 대로 점수를 매기는 거 아니야?”
눈앞에 놓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의 불만은 공유되며 커졌다.
“저 1위는 또 뭐야. 성이 없잖아? 천애 고아라도 되는 건가?”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천애 고아라도 성은 있잖아. 아니면 그 성을 받을 기회조차 없었나. 그레이슨 가문이나, 포이스 가문은 당연히 이해하지만 이건 뭐. 아카데미도 다 죽었군.”
그들의 질투심은 바로 위에 있는 이들을 향했다. 1위에 떡하니 박혀있는 귀족도 아닌 이름. 명문가의 자제들은 위에 서는 게 당연했지만, 출신 없는 천한 것은 위에 서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어중이떠중이 신입생들은 하나같이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1위 얼굴은 아냐? 이름은 들어본 적 있고?”
새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신입생들은 또 동지가 하나 왔거니 하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니. 별로 관심도 없다. 어차피 조만간 나가떨어질 떨거지 아니냐.”
“니들 바로 뒤에 있는 이분 되시는데.”
신입생들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돌아보았다. 신입생들은 검은 머리의 소녀와 그 등 뒤에 선 한 남녀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더더욱 놀랐다.
“유…유진 그레이스? 코라 포이스?”
키가 그리 크지 않은 유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열다섯부터 전혀 나이를 먹은 것 같지 않은 얼굴로, 유진은 앞으로 걸어 나섰다. 유진의 옆에 선 코라는 유진과 키가 비슷했다. 한데 모아 묶은 머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그녀는 유진을 아니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도, 걸어가는 그를 따라갔다.
“언제까지 그 앞을 점거하고 있을 거냐. 비켜.”
유진은 심드렁하게 말했고, 신입생들은 그 고압적인 목소리에 눌리며 뿔뿔이 흩어졌다. 유진은 순위표를 한참이고 바라보다가, 옅게 숨을 내쉬고는 제 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검은 단발머리의, 자신보다도 반 뼘은 작을 것 같은 키. 나탈리는 등 뒤의 두 사람이 있는 둥 없는 둥 순위표를 바라보며 건조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우리 둘을 꺾은 소감이 어때, 나탈리? 그 정도면 자부심을 한껏 가져도 좋아.”
“별로. 내 목표는 겨우 이런 게 아니니까.”
순위표의 가장 위에 박힌 제 이름. 그 아래로 줄지어 선 쟁쟁한 가문 최고의 인재들. 나탈리는 그들을 보고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유진은 그런 무관심한 나탈리의 태도에서 더 흥미를 느낀 건지,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계속 말을 걸었다.
“그래? 그럼 네 목표는 뭐냐. 마력에 대한 이해가 정말 남다른 것 같던데. 서클은 또 어떻게 되고? 아니, 애초에 쓰는 마법이 기존의 마법에 구애받지 않는 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묻는다고 다 대답해줄 것 같았으면 우리가 얘를 졸졸 따라다닐 이유도 없겠지.”
가만히 지켜보던 코라는 뾰족한 목소리로 유진에게 말했다. 유진은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걸음 물러섰다. 그레이슨 가문의 천재. 입탑한 후, 탑의 꼭대기를 노려볼 만한 인재. 이미 네 번째 고리를 만들어낸 어린 마법사.
유진은 나름 제 재능과 능력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대륙 어디를 가도 1인분 이상은 할 수 있다. 그리고 대륙 어디에서도 1인분 이상을 할 수 있는 열여덟 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소녀는 그 이상이란 말이지.
“그럼 하나만 물어보자. 네 목표는 그리 궁금하지 않아. 어차피 계속 아카데미에 다니다 보면 알게 될 테고, 네 목적을 알아낼 바에야 내 목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게 낫지. 그러니까, 지금 네 서클이 어떻게 되냐?”
나탈리는 마침내 순위표를 바라보는 걸 관두고는 뒤로 돌아섰다. 유진과 코라는 소녀의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머리카락처럼 새카만 눈동자. 그녀의 얼굴은 조각가가 빚어냈다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네가 생각하는 거 이상.”
아주 담백하고, 핵심을 비껴가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나탈리의 대답에 만족하며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자신의 주가를 올리는 법을 안다. 이 소녀는 유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했다.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비밀을 품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뭐, 알겠어. 일단 나 이상으로 강하다는 사실은 아주 잘 알겠다.”
그 결계 속에서, 유진은 나탈리의 행적을 아주 똑똑히 보았다. 그녀가 그 많은 마물을 도륙하는 데 사용한 마법은 딱 한 종류였다. 마법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움직임. 이미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몸이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마치 몇 번이고 전장을 오간 사람처럼.
“아주 인상 깊은 모습이었을 거야. 네가 1위를 하지 못했으면 내가 더 놀랐을걸.”
교수가 말하는 ‘아카데미에 올 필요가 없는 인재’는 말 그대로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하는 인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눈앞의 이 소녀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 유진은 그런 상상을 하며 나탈리를 바라보았다.
“할 말은 그게 다야?”
나탈리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치 할 말 다 했으면 이제 볼일 보러 가보라는 것 같은 태도였다. 유진은 넉살 좋게 손을 내저으며 옆의 코라를 보았지만, 코라는 알아서 하라는 듯 팔짱을 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정말 1위를 차지한 정체불명의 소녀에 흥미를 갖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기사 교육으로 노선을 잡아서 그런가.
“같이 가자. 어차피 조만간 수강 신청도 함께해야 하잖아? 교수진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도 같이 이야기나 나눠 볼 겸.”
아직 이 소녀에게 침을 바른 가문은 없을 거다. 추후 그레이슨으로, 정확히는 유진 그레이슨의 사람으로 포섭한다면 후계 경쟁에서 아주 큰 도움이 될 사람이었다. 유진은 자신을 매몰차게 대하는 소녀에게 굴욕감을 느끼기는커녕, 앞날의 계획만을 생각하며 나탈리을 따라갔다.
“이번에는 교수진에 꽤 힘을 준 것 같더라고. 누구라도 흥미를 품을 만한 사람이 있다는데.”
교수진이라는 말에 나탈리가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 그녀의 관심을 끈 건가? 유진은 걸음 속도를 올리며 다시 그녀의 옆에 붙었다.
“누가 있는지 알고 있냐? 뭐, 어디에나 공개된 정보는 아니겠지만….”
“너는 그 입이 방정이야, 유진.”
“어차피 알게 될 일이잖아. 나도 그 정도는 구분하고 있어, 코라.”
유진은 코라의 딴죽에 눈살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그리고는 다시 목을 가다듬고 나탈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탈리는 말해보라는 듯이 오만한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유진은 그런 나탈리의 표정이 호기심을 애써 감추려는 사람의 표정이라 생각하며 웃었다.
“용사.”
유진의 나직한 목소리에, 나탈리의 기세가 착 가라앉았다. 마치 마물과 전투할 때의 그녀를 보는 것 같았다. 유진과 코라는 목덜미 아래로 느껴지는 그 서늘함에 숨을 죽였다. 하지만 나탈리는 이내 기세를 거두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별일이네. 마탑은 능력도 참 좋네. 이런저런 일로 바쁠 사람을 다 채용하고.”
“용사의 의지가 없었으면 이런 것도 불가능했겠지. 어째서 이런 강사직을 수용했는지는 알 방법이 없지만 말이야.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가령, 정치적 거래라던가.”
유진의 의심에 코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이래서 마법사들이란. 용사님의 업적을 돌아보지는 못할망정 의도를 의심하다니. 이러다가 재앙을 물리친 것도 정치적 거래라고 하겠어.”
“그럴지도 모르지. 뭐든지 의심부터 하고 시작하라는 말이 있잖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는 걸 보통 의심이라고 하지는 않지.”
둘의 다툼은 진심으로 논쟁을 벌인다기보다는 친구 사이의 장난에 가까운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나탈리는 그 둘을 흘긋 바라보고는, 기척을 감추며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향했다.
“아무튼. 용사의 강의는 필수로 들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필수가 아니라도 모두가 들으려 하겠지. 그나저나 얘는 어디로 사라졌어?”
“…그러게.”
유진과 코라는 사라진 나탈리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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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그 결과란 말임미까.”
탑주, 라우라는 내가 내민 종이를 읽고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악신 숭배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는 신입생의 명단. 사람을 상대로 이런 꺼림칙한 짓을 벌이는 건 처음인데.
“철저하게 왕도 출신이 아니면서도 연고가 없는 사람을 위주로 조사했네오. 배경이 불분명한 사람을 위주로 말이에요. 잔인하면서도 확실해. 정말 당신과 일을 같이 해도 괜찮을까 생각했는데….”
라우라는 종이를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와 의심하는 사람이 일치하는군요. 저도 나름대로 조사를 진행하던 중이었으니 말임미다.”
라우라는 종이를 돌려 내게로 내밀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에게 붉은 표시가 되어있는 이유는 무엇임미까?”
라우라가 손가락으로 짚은 부분에는 조사를 진행해야 할 사람 중 가장 위에 올려놓은 세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나는 라우라가 가린 나탈리의 이름을 흘긋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배치고사.”
라우라는 계속해보라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마물이 등장하고 나서 첫 습격에 대처할 수 있었던 세 사람입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오?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에 마물을 물리칠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뒤로 이 사람들은 별 힘도 쓰지 못하고 탈락했던데.”
한 번 정도라면 운으로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묻는 라우라의 표정에게, 나는 떫은 시선을 돌려주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 그저 내가 어떻게 반박할지 궁금한 듯했다.
“운으로 생각하고 배제하는 것도 멍청한 행동일 겁니다.”
내가 제대로 하라며 핀잔을 섞자, 그때야 라우라는 진지한 모습을 되찾았다.
“좋슴미다. 그렇다면 이 세 사람. 어떤지는 조사해보셨슴미까?”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자벨 하쉬. 나이는 일반적인 입학생보다 많은 스무 살이라 하고. 특기할 사항은 없네요. 출신 지역은…아리드. 남방입니다. 가족은 있지만 후원자가 딱히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아카데미 이전에 뭘 하고 지냈는지 전혀 정보가 없어요. 감시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다음으로 손가락을 짚었다.
“이반 발코. 열여덟 살에, 테이트리 출신. 마찬가지로 출신성분은 있습니다. 이 친구는 후원자가 있는 것 같지만, 그 자금이 어디서 들어오는지는 정보가 없습니다. 수상한 거로 따지면 이반 발코라는 친구가 가장 수상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턱.
마지막으로 난 나탈리의 이름을 짚었다.
“나탈리. 성도 없고, 출신까지 불분명한 전액 장학생. 게다가 이미 완성에 가까운 기량까지 지녔습니다. 제가 말하지 않더라도 이 아이는 감시 리스트에 올려놓았으리라 믿어요.”
라우라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들려준 설명을 가만히 곱씹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중 누가 악신 숭배자들이 보낸 스파이라고 생각하시는 검미까?”
그거야, 애당초 정해졌지.
나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