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1 - 111.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1)
“…벌써 시간이 다 됐군요.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교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학생들은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났다. 유진은 성질 급하게 일어서는 학생들을 지나쳐 보내며 멍하니 앉아있다가, 제 짐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입생들은 저마다 흘긋, 서열 2위에게 시선을 주었다.
벌써 4서클의 경지에 다다른 괴물. 어쩌면 아카데미 과정을 졸업하기 전에 다섯 번째 서클을 바라볼 수도 있는 재능. 신입생들 대부분이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 4서클에 다다를 수 있을까 말까를 생각해야 할 때, 유진 그레이슨은 바라보는 목표가 이미 까마득히 달랐다.
“말이라도 걸어볼까. 저 녀석 아직 친구가 많지는 않지?”
“아서라. 벌써 저렇게 수업을 집중해서 듣고 있는데, 우리랑 말이나 섞으려 하겠어? 저 녀석은 이미 까마득히 앞에서 달려 나가고 있다고. 이미 평소에 같이 다니는 애들이 배치고사 3위, 1위, 4위 이런 놈들인데. 우리가 눈에 차기는 하려나.”
“하긴, 생긴 것도 곱상하게 잘생겨서는. 옆에 여자들이나 끼고 다니고 싶겠지.”
멍청이들. 다 들리는데.
유진은 그가 없는 곳에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의 말을 들었다. 대개는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시시덕거리는 신입생들이 전부 나가자, 유진은 그때야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가방을 둘러매고 책걸상의 숲에서 빠져나왔다.
“멋대로 네 이야기를 하고 있던데.”
강의실의 가장 뒤편. 코라는 벽에 기대어 서서 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악우에게 쏟아진 품평과 악담 아닌 악담에 조금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유진은 날카로운 눈으로 신입생들의 뒤통수를 쫓는 코라를 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게 그 녀석들의 그릇인 거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놈들이 줄었으니 좋잖아.”
대응하면 피곤하기만 하다. 내버려 두면 알아서 도태될 녀석들이다. 죽을 만큼의 노력도 해본 적 없는 놈들. 백 명 중 하나 정도의 흔한 인재들.
“알고는 있었지만, 아카데미 수업이 확실히 다르기는 하네. 어지간한 귀족 가문의 교육과는 비교하는 것조차 실례인 정도야.”
유진은 은근슬쩍 주제를 돌렸다. 떨거지들에게 시간과 생각을 할애하기 싫었다. 그런 유진의 대처가 그리 마음에 들지만은 않았는지, 코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넌 다음 강의 뭔데. 바로 연강이야?”
“지금 들으러 가는 게 그 유명한 수업 되시겠다. 너도 신청했잖아.”
유진의 말에 코라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월요일, 수요일 세 시에 떡하니 자리 잡은 수업. 신입생뿐만이 아니라 아카데미의 모든 학생의 이목을 끄는 수업이었다.
“‘마물 전투의 기초적 이해와 탐구’”
교수. 용사 일로이. 그리 말하는 코라의 눈에 흥분감이 담겼다. 유진은 덤덤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기대가 되는 건 사실이었다. 호기심이 일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학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용사는 과연 어떤 수업을 준비했을까. 아니, 수업이 쓰레기와 같더라도 용사가 걸어온 길. 그 경험을 듣는 것만으로 굉장한 도움이 될 거다.
“솔직히 수업 이름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렇지?”
코라는 인정하기는 싫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용사의 팬인 코라도 인정하고 있었다. 수업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궁금한 건 사실이야. 대체 용사는 어떤 수업을 준비해왔을까. 마물 수업이라고 해도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어차피 마물이라고 해봤자, 그냥 강해지면 끝 아닌가. 상대해야 할 이들이 아니라, 그들이 사냥해야 할 상대였다. 상대법이 특별히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당장 용사가 어떤 상대법이 있어서 그 많은 마물과 재앙을 도륙 낸 건 아닐 테니까.
“그건 이제 곧 알아낼 수 있겠지.”
유진은 중얼거리며 반쯤 열린 강의실의 문을 당겼다.
“…오우.”
그리고는,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을 보고는 질렸다는 듯 경탄했다. 수업을 경청하는 건 신입생뿐만일 텐데, 이미 입학식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앉아있었다. 이 아카데미 내의 모든 1학년을 한데 모아놓은 듯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신입생뿐만이 아닌가. 군데군데 도강인지, 아니면 돈으로 청강권이라도 구입한 건지. 신입생으로 보이지 않는 이들도 앉아있었다.
“유명세 앞에서는 체통이고 뭐고 없는 건가.”
유진이 중얼거리자, 코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걸 유명세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도 신기하네. 너는 언제까지 그렇게 덤덤한 척할 거야?”
“아니. 그것보다, 일단 그 녀석이나 좀 찾아보자. 나탈리 있잖아. 그때 기억나?”
코라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라는 말에 유달리 예민하게 반응하던 아이였다. 그 목덜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사납게 와닿던 적의를 기억했다. 용사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는 걸까. 코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유진을 불렀다.
“나탈리는 정말 괜찮은 걸까.”
“아무런 문제도 없을 리는 없겠지. 그런 말에 이렇게 날카롭게 반응할 정도라면 말이야. 내가 걱정하는 건, 나탈리가 이 수업을 혹시 안 들으려 하지는 않을까야.”
그렇게 열심히 고개를 돌리던 유진의 눈에 윤기가 반질반질한 검은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유진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돌았고, 코라는 유진에게 손목을 붙들린 채로 끌려가다시피 하며 나탈리의 비어있는 옆자리에 다가갔다. 유진은 오른쪽에 앉으라며 손짓했고, 그는 나탈리의 왼편으로 슬금슬금 접근했다.
“그렇게 에워싸지 않아도 도망가지는 않아.”
유진이 나탈리의 왼편으로 앉자, 나탈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유진을 보았다. 유진은 뻘쭘한 척하는 웃음으로 나탈리의 말을 흘려 넘겼다.
“아니, 나는 또 네가 우리를 피하고 있는 줄 알았지.”
“‘우리’라면서 너랑 나를 은근슬쩍 엮지 마. 따지고 보면 나도 네게 휘둘리는 피해자니까.”
코라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타박했지만, 유진은 아예 코라를 무시하면서 나탈리에게 주목했다. 나탈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닥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렇게 다물어진 나탈리의 입을 열기 위해 유진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용사를 싫어하는 줄 알았어.”
나탈리는 그때와는 달리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때 감정을 잠시 드러냈다는 게 실수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탈리는 대꾸하지 않으며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냈다. 아예 무시당해버린 건가. 유진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용사를 왜 싫어해?”
갑자기 들어온 질문. 나탈리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아이와 같은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유진은 순식간에 바뀌어버린 그 태도에 당황하며 입을 어물거렸다.
“아니…. 싫어할 수 있다고 생각해. 신이라고 해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는 거잖아? 용사라고 해서 모두가 용사를 사랑하지는 않겠지. 증오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유진은 그렇게 둘러댔다. 나탈리는 그다지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깔았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는 용사를 싫어하지 않아. 내가 용사를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
유진은 달싹이는 나탈리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나탈리의 표정은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였기에, 유진은 눈살을 조금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 이상으로 그녀에게 용사 이야기를 해도 좋을지, 아니면 그저 그녀를 자극해서 비호감을 사는 결과로 끝날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럼 그때 보였던 반응은 어째서 그런 거야?”
그런 유진을 구해준 건 코라였다. 유진은 구원자를 만난 듯 코라를 향해 반짝거리는 눈빛을 향했지만, 코라는 복수를 돌려주려는 것처럼 유진을 무시했다. 나탈리는 코라를 돌아보았다.
“그때 보여줬던 반응?”
“용사님을 언급했을 때 네가 보여줬던 적의. 그건 누구를 향한 적의였어?”
“적의라기보다는.”
나탈리의 목소리가 연기처럼 가벼워졌다. 유진과 코라는 생각에 잠긴 나탈리의 얼굴에 주목했다. 그녀는 정말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질투심.”
나탈리는 그 감정을 질투심이라 정의했다. 그녀는 그리 말하고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정당화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나탈리는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강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응. 그래, 질투심에 가까운 것 같아.”
질투심. 유진은 눈살을 더욱 찌푸렸다. 원래라면 용사에게 질투심을 느낀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하고 넘겼을 거다. 그건 마치 여왕에게 질투심을 느낀다거나, 먼 옛날의 영웅들에게 질투심을 느낀다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저 재능이라면.
“질투심이라. 그럴 만도 한가.”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나탈리의 재능. 아카데미에서 성장기를 거칠 필요는 있을까, 생각되게 만드는 실전성. 4서클에 불과한 자신이 바라보는 세게도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다른데, 하물며 자신을 뛰어넘는 나탈리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떤 질투심이야? 저 자리에 네가 있었어야 했다는 것?”
나탈리는 그 이상으로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 싸늘한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유진은 내심 움찔했으나, 더는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겠다며 물러났다. 이미 충분히 그녀를 알아볼 만한 정보를 얻어냈다. 사람을 얻을 때는 물러날 때도 있어야 했다.
“알았어, 알았어. 말해줘서 고마워.”
“왜 내게 그런 걸 물어보려는 거야?”
나탈리의 질문에, 유진은 머쓱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탈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유진이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너와 친해지고 싶으니까 말이지. 너에 대해 더 알고 싶은 건 당연하잖아?”
나탈리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물론, 유진은 거절당했다는 사실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자신을 밀어내려 하지 않는다는 점. 그저 무신경한 성격 때문일 수도 있지만, 유진은 끝까지 매달려보기로 했다. 이 사람은 매달릴 만한 가치가 있다. 유진은 그렇게 확신하면서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저 녀석이 귀찮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옆에서 코라가 슬쩍 물어보았다. 유진은 쓸데없는 말을 하는 코라를 향해 무언의 신호를 보냈지만, 코라는 단단히 삐쳐버린 듯 유진의 신호를 무시했다.
“그다지.”
하지만, 나탈리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리고 유진은 저 대답을 긍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귀찮을 만큼 들이대고 있었다. 누군가가 유진 그에게 이런 식으로 들이댔다면 무시하다 못해 쫓아내려 했을 거다.
“의왼데? 저렇게까지 들이대는데 귀찮지 않다고?”
나탈리는 눈을 천천히 깜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애초에 신경이 쓰일 정도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귀찮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존재도 아니라는 소리기도 하겠지. 그걸 간접적으로 말해주려는 건가 싶어 유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유진은 그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코라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 온다.”
분위기를 시끌벅적하게 만들고 있던 유진이 조용해질 즈음, 강의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코라는 재빨리 노트를 펼치며 눈빛을 반짝거렸고, 유진은 실망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 둘의 관심에서 벗어난 나탈리는 서늘한 눈빛으로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반갑습니다.”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강단의 스포트라이트 아래로 다가온 용사의 눈은 비취보다 짙은 청록으로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몇몇 여학생들이 작게 환성을 흘렸다. 용사는 웃지 않았다. 뭔가, 온화하고 상냥할 것 같은 느낌은 존재하지 않았다. 상상했던 것보다 날카롭고 상상했던 것보다 차가운 눈이, 신입생들을 훑어보았다.
“이번 학기, ‘마물 전투의 기초적 이해와 탐구’를 맡게 된 일로이라고 합니다.”
용사는 자신을 용사라고 칭하지 않았다. 유진이 눈을 떨었다. 가까이서 본 용사가 내포한 거대한 기운. 유진에게는 그것을 훑어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생각보다도 훨씬 많은 분이 제 강의를 신청해주셨더라고요. 뭐, 아카데미 측에서는 인원 제한 없이 강의를 진행해도 좋다고 했으니,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용사의 말은 여느 교수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학생들은 모두가 숨을 죽이고 용사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일단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 이야기해보죠.”
용사는 칠판으로 다가가며 분필을 집어 들었다. 다시 뒤로 돌아보는 용사의 시선은, 정확히 유진, 코라와 나탈리가 앉은 곳을 향했다.
“여러분은 현재, 마물과 싸우는 방법을 아예 모릅니다. 배치고사 때 느꼈겠지만요. 지금 여러분을 다시 전장에 투입하면, 이 중 열 명은 살아 나올 수 있으려나.”
그리 단언하는 말에, 신입생들이 숨을 죽였다. 누군가는 용사의 말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마물과 싸울 일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 아닙니까. 정말 싸울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그렇게까지 빡빡하게 대비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게 던져진 말. 용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코라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질문이 들려온 곳을 노려보았다. 지금 누구 덕분에 우리가 마물과 싸우지 않아도 되는 건데-!! 유진은 이를 부드득 가는 코라를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뻗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네에. 대비할 필요가 있어요.”
하지만, 용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무례한 질문에 대답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한 번은 있을 겁니다.”
용사의 눈이, 진중하게 좌중을 찍어 눌렀다. 그 말에 담긴 무게는, 신입생들 모두를 닥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강의의 제1 목표는, 그때를 맞이할 여러분이 허무하게 목숨을 날리지 않게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