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2 - 112.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2)
허무하게 죽는다고? 우리가?
내 말을 들은 신입생들의 표정은 정확히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아직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아먹지 못한 신입생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하긴, 알아먹을 턱이 있을까. 저들이 겪어본 전투다운 전투는 배치고사가 보여주었던 환영뿐일 테니.
“저, 허무하게 목숨을 날린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학생 하나가 질문을 던졌다. 전투 방법을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지 질문했던 학생이다.
“말 그대로. 마물과 싸워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그냥 죽는 걸 말하는 겁니다. 여태 봐온 많은 전장에서 겪어봤듯이 말이에요.”
나는 알고 있다. 10년 동안 검 하나만 바라보고 수련한 기사가 눈 깜박할 사이에 죽는 곳이다. 수십 번의 전장을 거쳐 살아남은 병사가 마물의 첫 공격에 절명하는 곳이다. 이곳의 강사로 부임하게 된 김에 내가 마음속에 내세운 또 다른 목표는,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이들까지 지키겠다는 욕심이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한 번은 마물과 전투를 치를 거라는 말씀은 또 뭔가요? 혹시 아카데미의 시험으로 우리의 목숨이 위험한 시련을 내주기라도 한다는 뜻입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이 왕국의 미래를 짊어질 수도 있는 이들이, 고작해야 자기들의 사인(死因)으로 생각해낼 수 있는 게 아카데미의 시험이라니. 내가 틀어막은 재앙은, 그 재앙이 닥쳐온 지역 외의 사람들에게는 먼 세상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위기가 당장 눈앞에 닥쳐온다고 하여 위기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이건 여러분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에 따라 달렸네요.”
나는 그리 대답하고는 분필로 칠판을 툭툭 두드렸다. 떨어지는 혜성을 느끼고 도망가기 위해 왕도로 몰려오는 마물의 떼. 원작에서는 그 마물의 떼를 막아내기 위해 수백 명의 기사와 마법사가 희생되었고, 그중에는 아카데미의 학생들도 대거 포진해있었다. 정말 혜성을 피해 없이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이 수업을 듣는 학생 중 절반은 살아남을 수 없을 거다.
“자, 시간이 조금 지체됐군요. 그럼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칠판에 마물. 이라고 쓰고는 분필을 내려놓았다.
“마물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처럼, 체내에 마력을 품고 있는 생물을 뜻합니다.”
“또, 다른 의견은 없습니까?”
강의실은 조용했다. 아마 교과서대로의 정의라면 저렇게 정의할 수 있겠지. ‘나는 알고 있다’라는 눈을 한 사람이 있을지 둘러보았지만, 학생들은 저 정의에 대부분 동의하는 듯했다.
“[요즘 인간들은 참, 위기의식이라는 게 없는 건지, 아니면 발전 속도가 더딘 건지.]”
뭐, 그저 나서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잖아. 저기, 중간에 앉아있는 수상한 녀석처럼.
나는 나탈리를 흘겨보며 성검의 말에 대답했다. 일부러 그녀를 향해 가끔 시선을 흘렸지만, 나탈리는 내 시선을 굉장히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악신 숭배.’
세뇌인지, 자처해서 가입한 것일지, 아니면 내가 처음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걸지. 나는 지금은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 강의부터.
“마물은 모두 체내에 마력을 품고 있지만, 마물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게 아닙니다. 영물과 마물을 구분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죠.”
그렇다면, 마물을 다른 생물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해의(害意)입니다. 인간을 향한 무조건, 문답무용의 살의. 인간의 기척이 느껴지면 적극적으로 인간을 찾아 나설 정도의 맹목적인 증오에 가까운 해의.”
나는 ‘인간을 향한 해의’라는 키워드를 칠판 위로 써내려갔다.
“그렇기에 마물은 인간을 상대할 때면 상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에는 제 목숨보다 인간 한 명을 더 죽이는 게 우선인 마물도 있으니까요.”
특히 지능 수준이 떨어지는 마물이라면 더 그렇지. 나는 게거품을 물고 내게 달려들던 거대한 잿빛곰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게 살갗을 베이면서도, 눈을 허옇게 뜨고 동물의 본능으로 나를 찢어 죽이려 움직이던 그 모습을. 그 잿빛곰 한 마리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서 몇 명이나 될까.
“그러니까, 대 마물 전투는 여러분이 지닌 전투에 대한 상식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특히 대규모 전투일 경우에 말이에요.”
나는 그러면서 칠판 위에 써놓은 마물이라는 말 아래로 가계도를 그리듯 두 갈래 가지를 그려냈다. 학생들이 점차 내 말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마물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지성이 있는 쪽과, 지성이 없는 쪽.”
지성이 있다고 하여 인간을 향한 살의가 옅어지는 건 아니다. 둘의 차이는, 살의와 본능에 지배당하는가 당하지 않는가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제 본능을 통제할 수 있는 마물은 그 살의를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 걸 즐기기 시작한다.
혜성으로 인한 마물들의 대이동을, 지성이 있는 마물들은 기회라고 생각할 거다. 그들을 통솔해 대규모로 사람들을 죽이고 잡아먹을 기회. 통솔된 마물의 위험성은 이미 북방에서 충분히 겪어보았다. 문제는, 이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
“우선은, 그들에게 어떤 차이가 있고, 이들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지성이 있는 마물을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질문하시는 분은 없겠죠?”
모두가 속으로 품고 있던 의문을 입 밖으로 내자, 학생들이 동요한 반응을 내비치는 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조금은 한숨이 나오려 했다.
“[네가 너무 활약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그게 도리어 부주의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 조금은 쓰라리지만 말이지. 경각심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뭐, 저 녀석들이 경각심을 가질 때가 되면 이미 늦은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자, 그러면 기초부터 차근차근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성이 없는 마물에 대해 먼저 전반적인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지피지기. 이 순수한 학생들의 머리에 지식이라도 때려 박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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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땠어?”
강의가 끝났다. 강의실을 나서는 신입생들은 완전히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진과 코라, 나탈리는 나란히 강의실을 나서며 멍한 감상을 공유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유진이었다. 그는 아직 멍하니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코라를 불러 세우며 말을 걸었다.
“어땠냐니…. 몰라. 그냥 좋았지.”
유진은 코라의 대답에 얼굴을 확 찌푸렸다.
“네 팬으로서의 감상 말고. 강의가 어땠냐고.”
“…새로웠어. 마물에 대해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건 완전히 처음이었으니까. 모험가들이나 할 법한 발상도 아니야. 그건 정말 철저하게 적으로 접근하는 느낌이었지.”
용사가 한 건 분석이었다. 적군을 상대하듯 철두철미한 분석. 한 번도 마물을 세력의 일종으로 생각하고 접근하지 않았던 학생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람을 언제든 위협하고 죽일 수 있는 의문의 세력.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마물에 위협받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왜 그들과 싸워야 하는지도 설명했다.
“세상을 보는 눈 자체가 우리와는 다르구나. 그런 생각을 했지.”
그 말에는 유진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용사는 괜히 용사가 아니었다. 그가 하는 말의 근간에는 사람을 위한다는 인식이 아주 깊이 깔려 있었으니까.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평온한 인간으로 보여도, 그 속에 품고 있는 신념만큼은 그들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굳세었다.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얻어가는 게 많을 거 같아. 빌어먹을. 이건 인정하고 넘어가야겠네. 들어봤던 어떤 수업보다도 훨씬 인상이 깊었다.”
용사의 팬도 뭣도 아니었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아카데미의 학생들에게 뒤쳐질 테니까. 용사의 생각, 태도, 그리고 저 실력의 편린을 조금이라도 더 흡수하는 쪽이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다 집중하는 건 처음 봤어. 배치고사 때도, 입학식 때도, 하물며 입학시험 때도 정신 팔고 있는 놈들이 많았는데.”
유진은 투덜거리며 노트를 팔락거렸다. 넘어가는 페이지 사이로 언뜻언뜻 용사의 강의록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렇게 오만한 신입생들을 죄다 잠재워버릴 수 있는 건, 그의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특별히 기운을 내뿜은 것도 아니지? 그냥 지극히 평범한 기세로 등장했잖아. 어떻게 한순간에 그 공간 자체를 장악할 수 있었던 거야? 단순히 화술이 뛰어나다, 정도로는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잖아.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어떻게 한 거야?”
코라는 드디어 제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진의 말에 동의했다.
“맞아. 나는 그렇다 치고, 자리에 있는 모두가 홀린 듯…. 아니, 그냥 말 그대로 압도돼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용사의 이름이라고 해도 코웃음을 칠 것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피식자들.”
들려오는 나탈리의 목소리에 코라와 유진이 고개를 돌렸다. 나탈리는 착 가라앉은 기색이었다. 눈에 띄는 적의도 없고, 평소의 무신경한 모습도 아니었다. 꼭 전투를 앞둔 사람이 기세를 가다듬는 것 같은 모양새.
“피식자라고?”
“본능이 아는 거야. 저 존재보다 내가 훨씬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마주하는 것만으로 머리보다 네 피부가 먼저 알아차리는 거라고.”
나탈리의 말에, 유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같은 사람인데? 용사가 우리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바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바다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들어?”
코라와 유진은 미간을 좁혔다.
“그야…. 사람이라면 압도당할 수밖에 없겠지.”
압도당한다. 그제야 그 표현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용사는 바다처럼 그곳에 있을 뿐이다. 위해를 가하지도, 칼을 뽑아 들지도 않지만 마치 거대한 현상처럼 인간을 압도한다. 사람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뜻인가. 유진은 나탈리를 돌아보았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던데.”
반쯤 의기소침한 말투로 말을 걸어오는 유진에게, 나탈리는 코웃음을 쳤다.
“너와는 그릇이 다르니까.”
“…그릇이 크셔서 참 좋겠습니다.”
덤덤하게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는 모습에, 유진은 드디어 질렸다는 듯한 반응을 내비쳤다. 그녀를 포섭하기 전에, 더 많이 알아갈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용사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조금은 수상쩍었고.
“너 대체 용사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거야? 나도 용사의 팬은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덤덤하게 대하지는 못한다고.”
유진의 말을 무시하며, 나탈리는 걸어갔다. 코라는 유진의 질문에 동조하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탈리의 얼굴을 보았으나,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안 말해줄 거면 밥이나 먹으러 가자. 같이 밥 정도는 먹을 수 있잖아?”
나탈리는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알 수 없는 아이였다. 차라리 아예 완강하게 두 사람을 밀쳐냈다면 말이라도 걸지 않았을 건데. 그냥 사람 대하는 게 서툰 것일까 싶기도 하고.
“어디 보자…. 오늘 메뉴가.”
식당에 도달한 유진과 코라가 턱을 매만지며 가만히 메뉴를 보고는 배식받으려던 찰나, 나탈리는 메뉴를 바라보지 않고 식당의 한구석을 응시하고 있었다.
“뭐야, 어딜 그렇게 보고 있는 건데.”
식판을 꽉 채운 유진이 나탈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고는, 얼굴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함께 고개를 돌린 코라는 그 자리에서 동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저 사람이 왜 여기…. 왜 그런데 아무도 못 알아보는 거야?”
나탈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혼자 식당의 창가에서 유유자적하게 밥을 먹고 있는 용사의 앞으로.
“용사님.”
용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세 사람을 마주했다. 용사를 부른 건 나탈리였고, 다음으로 입을 연 건 코라였다.
“하, 함께 식사해도 괜찮을까요?”
용사는 얼굴을 아주 미세하게 찌푸렸다가, 이내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