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14화 (115/158)

Chapter 114 - 114. 파고들기 (1)

“검끝이 날이 갈수록 예리해지는군.”

백중세였다. 두 가검(假劍)의 검끝은 한 점에서 만나 중심을 이뤘다. 흩어지지 않는 기세가 모여 당긴 시위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하는 가운데, 검사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심장박동이며 내쉬는 숨조차도 균등하고 비밀스러웠다. 여왕은 내 눈을 들여다보았고, 나는 시선에서 단서를 주지 않으려 그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움직임을 읽히지 말아라. 잘 새겨듣고 있는 모양이구나.”

여왕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녀를 상대할 때 전투 외의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엇비슷한 수준으로 겨루기 위해서는 저 말에 대답을 들려줘서도 안 된다. 여왕이 슬쩍 축이 되는 발을 뒤로 물렸다. 빨려 들어가지 않는다. 간격에서는 내가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그리고,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이 말도 잘 기억하고 있군.”

여왕은 미소로 나를 치하했다. 성은이 망극하다고도 하지 못하겠다. 언제 그녀의 검이 변화를 일으킬지 몰랐다. 바로 힘으로 누르려 다가올까. 아니면 뱀처럼 내 검신을 엮어 뿌리치려 할까, 그것도 아니면, 정면으로 상대하는 걸 피할까.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나와 여왕은 눈을 통해 끊임없이 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의외성은 재능의 편린을 드러내지만, 의외성에 의존하는 건 재능의 한계를 드러낸다. 네게는 의외라고 생각되는 행동을, 상대는 전부 읽고 있을 수 있으니.”

여왕은 그리 말하며 가검의 끝을 슬쩍 밀어붙였다. 나는 쏠리는 힘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뒤로 물러섰다. 나와 여왕의 힘은 평평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여왕은 그 균형이 어느 방향으로든 무너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움직여볼까.

여왕의 노림수는 언제나 뻔한 듯 뻔하지 않았다. 선택지를 눈앞에 던져놓고 물기를 기다린다. 물론 진짜 선택지 따위는 없다. 언제나 둘 다 미끼일 뿐. 나와 여왕의 전투는 언제나 미끼를 문 내가 여왕을 물속으로 끌어들이느냐, 여왕이 나를 물 밖으로 끌어내느냐의 여부로 결정되었다. 칼과 칼 사이 보이지 않는 선 속에서 나는 머릿속으로 검로를 하나 그렸다.

“-호오.”

순간의 번득임. 나는 밀고 들어갔다. 팽팽했던 균형이 무너졌다. 여왕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지만, 이내 그녀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여왕은 그녀의 본능이 시키는 대로 대처한다. 머릿속에 전투에 대한 공식을 만들어내는 다른 기사들과 다르게 말이다.

그렇기에, 여왕의 검은 수동적이다. 상대가 먼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자신이 먼저 나서지 않는 신중한 듯 장난스러운 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기에, 하려 하지 않는다.

“먼저 들어오는 건 오랜만이구나. 전법을 바꾸었더냐.”

대답은 검으로 들려주면 된다. 힘으로 몰아치는 건 소용이 없었다. 내가 먼저 나가떨어질 뿐이었으니까. 내 검에 대응하려는 듯 달려든다면, 나는 내 할 일을 하면 된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 검을 꺾지 않고,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전진하는 것.

여왕이 검을 내리쳤다. 공격을 위해 들어 올려진 왼손의 검은 여왕에 의해 가로막혔고, 오른손은 자유로워졌다. 나는 그대로 오른팔의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

여왕이 허리를 뒤틀었다. 나는 그녀를 쫓아 더 빠르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여왕은 대응하지 못하고 이따금 일격을 내주었다. 성검이 말했었다. 결국 위로 올라서는 건, 움직이는 쪽이라고.

“정말 날 한 번도 실망하게 하지 않는구나, 일로이.”

여왕이 진한 미소를 지으며 내 검을 받아냈다. 이번 대련의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음에도, 여왕은 즐거워 보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여왕의 옥체 위로 검을 떨어뜨리다가 멈추었다. 내 검날은 여왕의 머리 바로 위에서 멈추었다. 여왕은 검을 땅에 내려놓고 땅바닥에 주저앉은 자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몸 이곳저곳이 쑤셨다. 여왕을 몰아붙이는 사이 여왕의 반격에 피해가 누적된 탓이었다.

“졌다. 요새 부쩍 네 승률이 늘어나는 것 같아 재미있구나. 이걸 시작한 보람이 있어. 네가 날로 강해지는 것도 보고, 내 부족함도 함께 깨우치고.”

여왕은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일어났다. 나와 비교해, 여왕은 입은 상처가 없다시피 했다.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지고 뺨이 베인 정도.

…잠깐, 얼굴에 상처는 안 된다.

나는 재빨리 여왕에게 다가가 뺨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내었다. 그렇게 무심코 나온 내 행동을 바라보며, 여왕은 멍하게 서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일 없다.”

여왕은 조금 흐트러진 목소리로 대답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 가까워졌나 싶어 슬쩍 물러나려고 할 때, 여왕은 장난스럽게 뒷걸음질 치는 내 옷깃을 잡았다.

“왜 물러나려 하느냐? 내가 잡아먹은 것도 아니고.”

“…송구합니다.”

여왕은 내 코앞에서 슬쩍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전히 등골을 고드름으로 찌르는 것 같은 미소였다. 여왕은 나를 조금씩 더 끌어당기려다, 훅 놓아버리고는 뒤로 휙 돌아섰다.

“보고해봐라. 수업도 이제 몇 번 했을 거 아니냐.”

“악신 숭배자의 첩자라 특정할 수 있는 학생은 아직 없습니다. 의심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다만, 진척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여섯 번째 재앙에 대항할 단서를 발굴하고 있으니까요.”

“희소식이군. 하지만 악신 숭배자는….”

다시 내게 돌아선 여왕은 홍조가 감도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의심만으로 잡아 가두기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놈들이 어떻게 암약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아니더냐.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불만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폐하, 지난날의 마녀사냥이 어째서 발발했는지 아십니까.”

나는 여왕의 말에 질문으로 대답했다. 여왕은 눈살을 슬쩍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에게 의심과 공포를 조장합니다. 이 사람이 마녀다. 마녀는 나쁘니 죽여야 한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 사람들 사이에 퍼진 공포. 그리고 주어지는 정당한 이유를 통한 권위. 미약한 의심은 무고한 사람을 마녀로 만들기에는 충분합니다.”

나는 가검에 묻은 흙먼지를 얼추 털어내고 칼집에 집어넣었다. 여왕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 사람이 마녀가 아니더라도, 척결관과 군중이 그 사람을 마녀라 몰아간다면 마녀로서 죽게 되거든요. 진짜 마녀는 군중 속에 숨어서 비웃고 있죠.”

“계속 말해보거라.”

“단순히 의심된다는 이유로 사람을 잡아 가두기 시작한다면, 본질이 흐려지기가 너무나 쉽다는 말입니다. 악신 숭배자라는 누명을 씌워 정치적 도구로 이용해 먹기 쉽다는 말이죠.”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여왕에게 다가가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작 진짜 악신 숭배자는 잡아내지 못한 채 말입니다.”

여왕은 내 말을 듣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 말 안 듣는 놈들에게 써먹기 좋은 방식이겠구나. 물론 그리하면 네가 나를 싫어할 테니, 네가 내게 주는 정보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지는 않으마.”

나는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내게 반발하는 것도 너다워서 좋은 이유다, 일로이. 나였다면 그걸 왕실 안위를 지키는 데 사용하고, 정보를 제한해서 멋대로 휘두를 생각부터 했겠지.”

여왕은 그리고서 쓰게 웃음을 지었다.

“네가 용사여서 다행이다.”

여왕은 마찬가지로 검을 정리하며 말했다. 나는 여왕의 목소리에서 안도감과 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주 미약한 죄책감까지도. 그녀는 항상 나를 마주할 때마다 일말의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아이들을 구태여 가르치겠다고 나선 것도 네 품성을 증빙하는 거겠지.”

“그렇게 착한 사람은 아닙니다. 단순히 자기만족일 수도요.”

여왕은 어느덧 평소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가 노기사에게 그녀가 사용하던 검을 건네었다. 노기사는 나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내 수련용 검까지 가져갔다. 저 영감님의 웃음은 어쩐지, 손자라도 보는 듯했다.

“허면, 일단 네 보고로 돌아가도록 하지. 의심되는 이를 잡아 가두지 않을 거라면, 어떻게 악신 숭배자가 마탑 내에서 설치는 걸 막을 생각이냐?”

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정말 통할지는 미지수였지만.

“미끼를 던져야죠.”

“그렇게 신중한 이들이, 겨우 미끼질에 넘어오리라 생각하느냐.”

“악신 숭배자라면 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나는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의 여왕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

“…별로 좋지 못한 기억이 떠오르는군.”

유진은 숲속을 거닐며 중얼거렸다. 빽빽하게 지붕처럼 드리운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낮이라 말하고 있었는데, 숲의 그림자는 여느 저녁만큼이나 어두웠다. 나무와 바위 사이로 언뜻 보이는 그림자들은 마물과 닮았다. 유진은 그림자에 속아 함부로 마법을 날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하필이면 홀로 이 숲에서 마물의 습격을 버텨내야 하는 실습이라…. 정신병 걸릴 거 같아.”

유진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유진의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 근처에서 무언가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 소리를 잘못 들은 건가. 유진은 두방망이질하는 심장과 자꾸만 구토처럼 솟아오르려는 마나를 억누르며 숨을 죽였다.

“…차라리 그냥 빨리 튀어나와라.”

그리고, 습격은 시작되었다. 유진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재빨리 마법을 날렸으나, 그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불줄기는 애꿎은 나무를 터뜨렸을 뿐이었다.

“뒤-!”

유진은 그렇게 외치며 땅을 굴렀다. 간발의 차이로, 마물의 발톱이 땅을 할퀴었다. 닿지도 않았는데 옷자락이 잘려나간 광경에 유진이 마른침을 삼켰다.

크르릉-!

목을 긁는 마물에게, 유진은 자비 없는 마법을 쏘아냈다. 마물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숯덩이가 되어버렸다. 공포에 빠져 마법을 난사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만으로 그는 이미 충분히 상위권의 학생이었다.

“다음!”

그리 말하자마자, 마물 두 마리가 한꺼번에 양쪽에서 덮쳐왔다. 유진은 보호막을 형성한 후, 마물의 공격을 일차적으로 막아냈다. 그것과 동시에, 두 마물의 숨통을 끊어놓을 마법이 유진의 손아귀에 완성되었다.

“두 놈 정도야-!”

얼음 창이 마물의 몸을 꿰뚫었다. 긴장한 탓일까. 마법의 완성도는 평소보다 훨씬 높았지만, 그만큼 마력 소모가 심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마력 소모를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오, 진짜.”

마물은 계속 불규칙적으로 닥쳐왔고, 유진은 네 마리를 더 쓰러트리고 흰늑대의 어금니에 목이 찍혀 탈락했다. 결계 밖으로 튕겨 나온 유진은 먼저 탈락해 착석한 수많은 신입생의 감탄 어린 시선을 받고 있었다.

“유진 그레이슨, 처치한 마물 일곱 마리. 버틴 시간은… 20분이네요. 충분히 잘했습니다.”

얼굴만큼이나 잘생긴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올린 유진의 눈에 보인 건, 빛을 등지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용사의 얼굴이었다.

“…제가 몇 번째로 탈락한 건가요?”

“이제 두 명 남았군요. 삼 등입니다.”

남은 둘은 코라와 나탈리인가.

유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혀를 내찼다. 그리고 그가 혀를 찬 동시에, 결계 밖으로 코라가 데굴데굴 튕겨 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유진을 보았고, 유진은 한껏 찌푸린 표정을 되돌려주었다.

“코라 포이슨. 처치한 마물 여덟 마리. 버틴 시간 23분입니다. 잘했어요.”

용사의 칭찬에, 코라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무표정한 나탈리가 결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용사는 나탈리를 향해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어 주었다.

“나탈리. 처치한 마물은 열네 마리. 버틴 시간이 30분이네요. 정말 잘했습니다.”

나탈리는 용사의 칭찬에도 고개를 가볍게 끄덕일 뿐이었다. 유진은 딱 두 배의 마물을 처치한 나탈리의 솜씨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그녀도 결국 탈락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반쯤 안도했다. 그렇게까지 괴물은 아닌 듯했다. 어째, 마물에게 당해 죽은 것치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오늘 결과는 다들 잘 기억해두는 게 좋을 겁니다. 그 기록을 발판삼아 점점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셔야 할 테니까요.”

용사는 시계를 바라보고는 다시 학생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수고가 많았어요.”

““수고하셨습니다!””

학생들은 하나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우루루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유진과 코라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탈리를 데려가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쩐지 용사를 향해 당돌하게 다가가는 나탈리의 모습을 보고는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쟤는 뭘 하려는 거야.”

용사는 조금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나탈리를 맞이했다. 그리고, 유진은 맹랑하게 입을 여는 나탈리의 말을 듣고는 경악하며 입을 떡 벌렸다.

“교수님께 따로 가르침을 받고 싶어요.”

용사의 눈이 더한 당혹스러움에 물들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