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7 - 117. 파고들기 (4)
중간고사.
벚꽃이 가장 아름다울 때 불헌 듯 찾아오는 봄비처럼, 중간고사는 신입생들이 가장 즐겁게 시간을 보낼 때 다가왔다. 시험 기간이 되면 마탑은 어김없이 침묵에 잠긴다. 문제를 출제하느라 골머리를 앓는 교수들…, 아니, 조교들의 음침한 신음과 공부를 시작한 학생들의 괴로움이 교차하며 요상한 사이비 종교에서나 볼 법한 광경을 자아내는 건 덤이었다.
“…이번에 ‘서클 마법학 개론’ 시험 범위 아는 사람?”
학생 식당에서, 유진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기사든, 마법사든 무조건 들어야 하는 전공 기초 과목이었다. 입학해서 학교 다닌 지가 얼마나 됐다고 시험 범위도 안 챙기다니. 그렇게 타박하는 표정으로 코라가 유진을 노려보았다.
“몰라. 진도 나간 데까지겠지. 알아서 공부해.”
“한 번만 길 잃은, 불쌍한 어린 양을 구원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요.”
“지랄. 입 다물고 공부나 해. 내가 정리한 자료 받아먹을 생각이잖아.”
기사답다고 할까, 그렇지 않다면 시험 기간이라 예민해져서 그런 것일까. 코라의 말은 거침없었다. 마법사가 마법 과목을 알려달라 빌고, 기사가 그를 바라보며 한심해하는 구도. 흔치 않은 모습에 근처의 신입생들이 신기하다는 듯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나탈리…. 한 번만 도와주라. 어차피 수업 내용은 내가 대부분 알고 있던 거라 제대로 수업을 못 들었단 말이야. 어디는 나오고, 어디는 안 나오는지 정도만….”
나탈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유진의 구걸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유진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탈리와 코라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물론 두 사람은 가뿐하게 유진의 시선을 무시하고 있었지만.
“너는 며칠 전부터 어째 계속 꽁하다?”
유진은 나탈리를 보며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말수가 적던 나탈리는 아예 입에 접착제라도 발라놓은 것 같이 말을 하지 않았다. 눈살은 언제나 조금 찌푸려져 있었고, 눈은 걸어가는데도 앞을 보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은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공부를 하는 건지 마는 건지, 페이지가 도통 넘어가지를 않았다.
“…그래. 말 못하는 고민이 있을 수도 있겠지.”
유진이 제멋대로 해석하며 교제를 두드리자, 그의 눈앞에 불쑥 쪽지가 날아들었다. 유진이 심드렁하게 쪽지를 받아 들고는, 그 내용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1장부터 4장 102페이지 까지.’
유진은 눈을 반짝이며 쪽지를 건네준 코라를 바라보았다. 코라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기 할 일에 몰두했다. 싱글벙글, 유진은 웃으면서 드디어 책을 펼치고는 펜과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그 공격.’
나탈리는 한편, 머릿속에서 용사의 움직임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속도를 완벽하게 잡아내고 있던 시선. 그보다 몇 수는 위에서 놀고 있던 움직임. 움직임으로 용사를 이기기에는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는 사실을, 나탈리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녀를 용사의 공격에 대처할 수 있게끔 한 건 본능이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며, 공격을 막아내고 피해를 최소화했다.
‘다음번에는 보일 거야.’
그리고, 그 10분 남짓한 시간은 나탈리에게 있어서 성장의 밑거름이자 부족한 경험을 채워주는 귀중한 한 합이었다.
‘나탈리 씨가 다음 연장 수업 때 좀 더 그 힘을 잘 활용할 수 있다면, 대련을 고려해보겠습니다. 오늘처럼 강행돌파하는 것보다는 더 좋은 방법이 있겠죠.’
용사는 그리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나탈리는 표적의 미소를 바라보며 숨을 내쉬었다.
‘다음에 제가 준비할 과제. 목숨 다섯 개 이내로 수행할 수 있다면 대련을 고려해보겠습니다.’
그래. 아직은 용사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 부족했다. 더 전투 경험을 쌓고, 학습해야 했다. 그러기 위한 잠입이었으니까. 나탈리는 유진과 코라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 각각 다섯 번이 아닌 한 명이라도 그 속에서 죽으면 깎이는 기회. 어떻게 해야 이 두 사람을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단련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탈리, 공부하고 있기는 한 거야?”
나탈리는 처음으로 유진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유진은 노려보듯 그를 바라보는 나탈리의 시선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갑자기 그렇게 쳐다보고는. 무슨 일이라도 있어?”
나탈리는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다음 특강까지 저 두 사람을 어떻게든 전투에 더 익숙해지게 만들어야 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마물 전투의 기초적 이해와 탐구’. 그거 시험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말씀 없었나?”
“몰라. 실습 시험이니, 종이랑 펜 가지고 치르지는 않을 거 같아. 교수님 본인도 그렇게 시험을 치르기를 원하지는 않을 거고.”
코라와 유진의 대화에서 단서를 얻은 듯, 나탈리가 고개를 팍 쳐들었다.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나탈리의 행동에 동시에 어깨를 움츠렀고, 나탈리는 책 위로 손을 탁 얹으며 말했다.
“훈련해야겠네.”
“갑자기?”
“마물 전투의 기초적 이해와 탐구. 너희 전부 점수 잘 받고 싶지 않아?”
유진과 코라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단순히 성적의, A+의 문제가 아니었다. 용사에게 어필할 기회. 확연히 더 성장할 기회였으니까. 의구심이 들었던 과목이었지만, 이제 그 의구심은 모두 사그라들었다.
“당연하지…. 당장은 전공과목 하나 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시험이지.”
공부가 벌써 질린 건지, 혹은 정말 그 시험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 건지, 유진은 웬일로 눈을 빛내며 나탈리의 말에 동의했다. 서클 마법학 개론 따위. 망쳐도 재수강하면 그만이지만, 이건 한 번뿐인 기회였다. 모범생 코라 또한 그 말을 아주 부정하지는 못했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훈련하겠다는 거야? 우리 권한으로는 결계를 발동할 수도 없잖아.”
“훈련장.”
나탈리는 그리 말하며 책을 덮고 일어섰다. 유진과 코라는 덩달아 엉거주춤 책가방을 챙기며 함께 일어섰다. 셋 중에서 가장 마이웨이에 막무가내인 쪽은 나탈리였다. 유진과 코라는 그런 나탈리의 모습에 이따금 휘둘리고는 했다.
“…설마 네가 우리를 상대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유진과 코라는 황급하게 나탈리의 뒤를 쫓았다. 나탈리는 거침없이 도서관을 빠져나가 익숙한 발걸음으로 훈련장을 향해 걸어갔다. 불길한 예감이 둘의 등골을 엄습했다. 차라리 공부하겠다며 도서관에 남아있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꽃바람이 불어오는 교내의 전경.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세 사람은 훈련장의 정문에 도달했다.
“너희 둘은 각각 보면 약해.”
나탈리는 훈련장의 문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유진은 나탈리의 말에 눈썹을 구부렸고, 코라는 납득하려는 듯 고개를 아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럼에도 반발할 마음이 들지 않는 건, 두 사람이 직접 나탈리의 실력을 여태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같은 1학년이면서, 잘도 평가하는구만. 뭐, 네 시선에서 보면 틀린 말은 아니겠지.”
유진은 투덜대면서도 나탈리의 말을 받아들였다. 아카데미 수준이라면, 전 학년을 통틀어서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나탈리는 이미 아카데미 수준을 벗어난 괴물이니.
“그래. 같은 1학년인데다가, 성조차 없는 천민이 그레이슨 가문의 아들과 포이슨 가문의 딸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자기는 잘나봤자 얼마나 잘났다고 말이야.”
그리고 들려오는 이죽거리는 소리. 코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고, 유진은 심드렁하게 눈을 돌렸다. 2학년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세 사람의 뒤에서 비웃음 어린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행동하는 게 말이다. 꼭 자신이 무슨 명문가 출신의, 뒷배 짱짱하고 실력까지 두루 갖춘 유망주인 양 행동하고 있어. 1학년들 사이에서 말이 많다며?”
학생 중 하나가 다가오며 허리를 슥 숙였다.
“조심하고 다녀라. 자중하고. 이건 선배로서 해줄 수 있는 진심 어린 충고야. 나중에 학교생활 힘들어지기 싫으면 말이다. 네 옆의 저 애들이 언제까지 네 친구인척 해줄 수 있을 거 같나?”
그러면서 상급생은 유진과 코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도, 언제까지 이 아무것도 없는 놈이랑 친하게 지낼래? 너희들이 다 받아주니까 자기가 정말 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잖아. 이 녀석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몰라도, 언제까지 그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 같냐? 그만하고 명문회에나 얼굴 보여라. 그레이슨과 포이슨이라면 충분히 한 자리 먹을 수 있을 테니.”
상급생은 그리 말하며 등을 돌렸다. 그 뒷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던 유진이 슬쩍 입을 열었다.
“귀족이라면서 하는 짓은 꼭 뒷골목 잡배들 같네.”
확실히, 그들 보고 들으라며 하는 말이었다. 유진의 목소리에 걸어가던 상급생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유진은 한심하다는 듯 비틀어진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내가 얼굴을 모르는 걸 보니, 어차피 당신들도 그 명문회 선배들의 똘마니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 아냐? 보나마나 그 선배들이 시켜서 경고나 하러 온 거겠지. 그 관리 철저하게 하는 사람들이 직접 평민 차별적 발언을 하러 친히 납시진 않았을 거고.”
상급생들이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뜨렸다.
“말조심해, 후배님. 거기서 멈추면 우리도 그냥 못 들은 체하고 넘어가 주지.”
“못 들은 체 안 하셔도 되는데요.”
이번에 나선 건 코라였다.
“치졸하고 찌질하기가 그지없어. 겨우 그런 식으로 말한다고, 포이슨과 그레이슨이 오냐오냐 따를 줄 알았다면 아주 큰 오산이에요. 명문회의 사람들이 큰 착각을 하고 있거나….”
코라는 유진의 옆에 서서 나탈리를 가로막아주었다. 나탈리는 눈을 깜박거리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선 두 신입생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이 얼마나 개새끼처럼 쫄래쫄래 따르는지를 시험해보는 거겠죠. 안 그런가요?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한 번 해보는 게 어떨까요?”
상급생들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가왔지만, 두 사람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버티고 섰다.
“권력으로 우리를 찍어누르고 싶으면 그쪽 가문 이름이나 밝히고 그러시죠. 조금은 겁먹은 척 해줄 테니까. 뭐, 조금만 알아봐도 어디서 온 누구인지 정도는 알 수 있겠지만. 보나 마나 작위만 높은 허수아비들이겠죠.”
“계속 그런 식으로 입을 놀리다간 후회할 텐데.”
유진은 상급생의 말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돌아가서 명문회의 선배들한테 고자질하게? 그레이슨의 망나니가 괴롭혔쪄요~ 이렇게 말이지? 퍽이나 들어주겠다.”
킬킬거리며 눈물을 훔치는 유진이 말을 덧붙였다.
“그 사람들은 ‘아 그래? 뭐, 그럼 걔네 마음대로 놀게 둬’라고 하겠지. 친구로 만들지 못할지언정 적으로 돌리려 하지는 않을 테니까. 어지간히 멍청한 게 아닌 이상 말이야.”
상급생들의 표정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굴욕에 물들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상급생들은 표적을 나탈리에게로 돌렸다.
“이 건방짐이 다 저 천민 출신과 어울려서 생긴 거라 생각하면 되겠지. 쯧. 이래서 질서를 모르는 천민 놈들은.”
간신히 그들의 행동을 수습하는 상급생들. 그리고, 유진의 비틀린 미소는 어느덧 환한 것으로 바뀌었다. 상급생들은 그 표정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 말, 교수님 앞에서도 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교수? 하. 무슨 교수를 말하는 건지. 교수 대부분은 내 말이 옳다고 고개를 끄덕이겠지.”
코라는 눈앞에 닥친 현실을 깨닫지 못하는 상급생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훈련장 앞에서 머뭇거리지 마세요.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에, 상급생들은 한 건 잡았다 싶어 고개를 휙 돌리다가 얼어붙었다. 용사, 일로이가 한 손에 서류철을 들고는 신입생과 선배들의 대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분은 시험 기간인데 공부는 안 하시나요?”
“그 시험 공부를 방해하는 선배들과 대치하는 중입니다. 덤으로 평민 차별 발언까지.”
용사는 상급생들을 흘긋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열다섯 먹은 꼬마들도 아니고, 시비가 웬 말입니까. 상급생이 후배들 괴롭히는 것도 꼴불견이니, 돌아가서 공부들 하세요. 당신들이 신입생처럼 여유 부릴 틈은 없을 텐데요.”
용사가 손을 내저었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상급생들은 꽁무니를 빼었다. 그를 지켜보는 유진은 더욱 유쾌하게 웃었고, 코라도 속이 시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훈련장 앞에서 여러분이 웬일입니까?”
“아, 교수님의 시험에 대비해서 훈련이나 좀 할까 해서요.”
“내가 시험을 어떤 식으로 출제할지는 말한 적이 없을 텐데.”
용사는 그러면서 나탈리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나탈리는 용사의 시선을 피했다. 용사는 그를 보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뭐, 들어가 보세요. 여러분의 그런 태도, 저는 아주 보기 좋다고 생각합니다.”
용사의 칭찬에, 코라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도 기쁨을 애써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그러고는 의욕이 상승했는지, 두 사람은 재빨리 훈련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좋은 친구들을 뒀네요, 나탈리. 앞으로도 계속 사이 좋게 지내면 좋으려만.”
나탈리는 멍하니 동급생들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굳이 나설 필요는 없었는데.”
“친구 좋은 게 그런 점 아니겠습니까.”
용사의 말에, 나탈리는 고개를 돌려 용사를 응시했다. 그는 어쩐지 자신을 향해 짙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