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18화 (119/158)

Chapter 118 - 118. 파고들기 (5)

“당신이 저를 먼저 보자고 하다니.”

거리에는 봄꽃의 향이 가득하다. 주말, 간만에 시간이 난 나는 왕도의 그나마 한적한 변두리에서 내가 부른 손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별일이네요, 일로이.”

아이시스는 싫지만은 않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뒷짐을 지며 내게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봄의 햇살을 받아 호수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옷차림은 봄날의 아씨가 입을 법한 하얀 원피스. 그녀와 제법 잘 어울리는 옷차림이었다.

“일이 바쁘지는 않았어? 내가 괜히 부른 건 아니려나 모르겠네.”

지금은 나만큼이나 바쁠지도 모르겠다. 내가 걱정스럽게 묻자, 아이시스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다행히, 전후의 정리는 착착 돌아가고 있어요. 누군가의 방해도 없고, 지원도 잘 들어오고 있고요. 무엇보다 제 실력이 늘어서 일이 한결 편해졌어요. 당신이 날 불러도 내가 여기 올 여유를 부릴 정도는 됩니다.”

아이시스는 손에 신성력을 피워 올려 보였다. 각성했을 때보다도 훨씬 정순해진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수련을 게을리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뭐, 여유가 되지 않았어도 어떻게든 왔겠지만.”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아이시스는 그리 덧붙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더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한 그녀와 보폭을 맞추었다. 그녀의 옆에 다가서자 작은 콧노래가 들려왔다.

“그래서, 저는 무슨 일로 부른 건가요? 새로 부상자를 치료해야 할 일이라도 생겼나요?”

“응.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그냥 한 번 던져본 말이 적중하자, 아이시스는 놀란 듯 내게로 고개를 확 돌렸다.

“정말인가요? 아니, 그것보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게 무슨 뜻인가요? 제가 필요할 정도의 환자라면 악신 숭배자가 관련되었거나, 아주 심각한 환자라는 뜻이잖아요.”

당장 거기로 안내해주세요- 라며 부산스러운 아이시스를 보며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시스는 내 웃음이 불만스러운지 눈살을 찌푸리며 볼을 부풀렸다.

“웃지만 말고 무슨 일인지 똑바로 설명해줘요. 당신이 괜히 나를 여기까지 부르지 않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단 말이에요.”

“미안해, 하지만 조만간 네가 돌볼 환자가 생길 거라는 건 사실이야.”

나는 길에서 멈춰서며 아이시스를 바라보았다. 아이시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그녀의 눈동자를 떨기 시작했다.

“잠깐.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거 같거든요. 일로이, 당신 또 설마….”

“조만간 내가 죽었다는 소식이 퍼질 거야.”

그럼 그렇지. 아이시스는 그렇게 말하듯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잘 정돈되었던 금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래서 실제로는요? 왜 뜬금없이 죽은 척을 하려는 거예요? 아카데미에서 잘만 교수 생활 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진짜 시체처럼 지낼 예정이야. 내가 기다리던 일들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라고 하면?”

“그 녀석들이 움직이는 걸 기다리는 거지.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을 거야.”

“…잘도 먹힐 방법이네요.”

아이시스는 헛웃음을 내뱉었지만, 반쯤은 농담이라 여기고 아마 내 속을 짐작하지는 못할 거다. 나는 정말, 말 그대로 시체처럼 지낼 생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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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부진하군.”

그림자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한 질책의 기색을 담고 있었다. 나탈리는 질책에도 불구하고, 무표정하게 서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림자 속의 눈은 나탈리를 빤히 노려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혀를 쯧, 내찼다.

“별다른 소식이 없구나. 네 쪽에서나 다른 곳에 심어둔 쪽에서나 말이야. 뭐라 급격한 전진이 있으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만, 몇 주 째 아무런 변화 없이 기다리는 것도 좋진 않아.”

그림자 속 목소리는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때가 가까워졌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다. 혜성이 근접하고, 움직임이 일어나기 전에 일을 일으켜야 한다. 요인들을 붙잡고, 재앙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해. 뭐, 안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재앙은 아니겠지만…. 그분께서 무어라 생각할지.”

손톱을 뜯어먹거나, 이를 가는 듯한 뿌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위에서 직접 지시를 하달하겠다고 한 지가 어느덧 한 달이다. 손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를 노릇이고. 위에서 또 우리를 시험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최대한 빨리 내부에서 혼선을 일으켜야 한다.”

목소리는 이제 나탈리에게 말하는 것이 아닌,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섞여드는 건 좋지만, 그들에게 동화되었다고 하지는 않겠지. 어차피 나중에 모두 죽여야 할 것들이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한 선에서만 그쳐라.”

“예, 알겠습니다.”

“기억해라. 용사를 죽여야만 한다.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림자의 기척이 나탈리의 방에서 사라졌다. 나탈리는 사라진 그림자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기숙사의 침대는 푹신했다. 잠을 거의 잘 필요가 없도록 설계된 그녀였지만, 수면은 그녀에게 이제 취미와 비슷한 것이 되었다.

“….”

나탈리는 침대보를 가만히 쓸어보다가 위로 풀썩 드러누웠다. 졸음은 찾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잠들고자 하면 언제든지 잠들 수 있었다. 나탈리는 천장을 바라보며 용사의 가르침들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어떻게 해야 그 목에 제 손끝을 닿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이내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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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에 있을 중간고사는 여러분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을 겁니다.”

일로이의 말에, 신입생들이 술렁였다. 일로이는 가만히 그들의 소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최근 들어 강의 장소가 아예 훈련장으로 바뀐 것 같았다. 꽤 단정하게 차려입고 등장했던 용사 또한, 복장을 움직이기 편한 것으로 바꾼 지 오래되었다.

“하나의 시험. 그 속에 여러분을 몰아넣고 지켜보겠습니다. 얼마나 성장했는지, 얼마나 제 가르침을 잘 흡수했는지도 확인하고요.”

용사는 늘 가지고 다니는 가검으로 바닥을 쿡쿡 내리찍었다. 훈련장의 모습이 뒤바뀌었다. 바닥이 풀로 뒤덮이고 나무가 자라났다. 용사는 주위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물은 실전에서 여러분의 강함을 고려해주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여태 제 수업을 들었다면 아는 사실이겠지만, 저는 그렇게 융통성이 좋은 사람도 아니에요. 난도는 배치고사 때보다는 훨씬 어려우리라 생각합니다.”

신입생들은 저마다 불안에 떠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용사는 안심하라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가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괜찮습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강해졌어요. 아직 실감하고 있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니, 너무 불안에 떨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용사의 말에는 이상한 울림이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이라면 그 어떤 허무맹랑한 말이라도 신뢰하게 되는, 그런 울림. 신입생들은 어느새 동요가 가라앉은 모습으로 용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자, 시험 이야기는 여기까지. 우선 오늘의 수업을 진행해보도록 하죠. 오늘은 추격과 도주의 기초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마물의 추격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반대로 우리는 마물을 어떻게 추적하고 추격해야 하는지. 자, 예시로 들 마물은 ‘크롤러’입니다….”

수업은 어수선한 와중에 진행되었다. 신입생들은 시험 생각에 꽉 찬 머리를 붙들고 어떻게든 용사의 수업 내용을 욱여넣으려 안간힘을 썼다. 용사는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학생들을 배려하며 수업을 천천히 진행했다.

“…오늘의 실습은 한 번 쉬도록 하겠습니다. 이대로 실습을 진행하는 건 그냥 하지 않으니만 못할 거 같네요. 일단 푹 쉬든, 다른 과목의 공부를 하든, 남은 시간은 원하는 대로 쓰면 됩니다. 대신 특강반 수업은 꽤 일찍 시작하게 되겠군요.”

용사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학생들은 구원받은 듯한 눈으로 용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특강을 듣는 학생들은 기쁨 반 절망 반으로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그럼, 특강반이 아닌 학생들은 교실을 나서도 좋습니다. 오늘 특강은 이참에 이론 수업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가보도록 할까요.”

용사는 결계를 해제하며 말했다. 특강반이 아닌 학생들은 우르르 훈련장을 빠져나갔고, 특강반은 긴장한 표정으로 용사를 바라보았다. 다시 펼쳐진 숲은 눈에 덮여있었다.

“나탈리 씨는 따로 잠깐 저 좀 보도록 하죠.”

나탈리는 갑자기 자신을 따로 부르는 용사에 놀란 듯 눈썹을 움찔거렸다. 나탈리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는 유진과 부럽다는 듯 그녀를 응시하는 코라를 지나 보내고는 숲의 출발점에 용사와 나란히 섰다. 슬쩍, 옆을 훔쳐 보니 용사가 그립다는 듯한 눈으로 숲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것도 참 오래된 일이네요. 제가 네 번째 재앙을 쓰러트릴 때만 해도 참 약했어요. 오늘 여러분께 내준 과제도 수행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나탈리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용사를 응시하는 나탈리에게, 용사는 웃음을 되돌려주었다.

“믿기 힘든 말이에요.”

“누구나 성장합니다. 물론 무력만 강해지며 힘만 센 어린아이가 되는 게 아니라, 힘을 어디에 사용할 줄도 아는 어른이 되어야겠지만요.”

나탈리의 콧잔등에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제가 가르치려는 것도 당신이 그 힘을 어떤 식으로 이용해야 하는지입니다.”

“어떤 식으로…?”

“당신이 가진 힘을 가지지 못한 이들을 지키는 법. 당신보다는 약하지만, 곁에서 당신에게 힘을 보태줄 이들과 함께하는 법.”

용사의 말에 나탈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목적은 누군가를 지키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었다. 지금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 남자를.

“저는 그런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아요.”

함께 용사를 죽일 사람이라면 모를까. 유진이나 코라가 그런 역할을 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위장을 위해 잠시 함께할 뿐인 사람이다.

“저는 당신이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나탈리는 혼란에 빠진 눈으로 용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느낀 용사는, 자신과 비슷한 부류였기 때문이었다. 그 지나친 다름과 인간다움에, 나탈리는 불가해함을 느끼고 있었다. 호기심과 감정을 배우지 못한 소녀라도, 불가해함에서 느껴지는 거부감은 본능에 가까웠기에, 나탈리는 저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가요.”

“배우는 겁니다. 하나씩 말이죠.”

“누구에게 그런 걸 배운 건가요?”

“날 둘러싼 수많은 사람. 그리고 내가 구했어야 한 사람들,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나탈리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역시, 저는 용사님을 이해할 수 없을 거 같아요.”

“…그런가요.”

“이해하지 못해서 다행이에요.”

나탈리의 손끝에 따뜻한 액체가 와 닿았다. 새빨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용사의 핏물이었다.

“지금 용사님은 죽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아득히 먼 곳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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