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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20화 (121/158)

Chapter 120 - 120. 습격 (2)

괴물은 빨랐다. 넬라가 쏘아낸 불줄기는 괴물을 맞추지 못하고 허공을 가르며 애꿎은 연구실 하나를 폭파해버렸다. 피하는 건 상정 내였다. 넬라는 제자리에 서서 크게 발을 굴렀고, 바닥을 뚫고 얼음송곳이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아무것도 모르고 접근하던 괴물은 제자리에서 온몸이 꿰뚫린 채 전진을 멈추었다.

“이건 도대체 뭐야?”

얼음송곳을 타고 거무죽죽하고 점성이 강한, 타르와 같은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넬라는 송곳의 높낮이를 조정하며 괴물을 들여다보았다.

“합성체? 키메라 같은 건가…. 대체 누가 이런 꺼림칙한 형태로.”

인간의 머리가 달려있긴 한데, 머리털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머리털은커녕 속눈썹과 같은 체모 한 올 나지 않았다. 눈은 허옇게 까뒤집어져 동공도 보이지 않았고, 송곳이 관통한 턱 안으로는 돌기같은 이빨이 소용돌이 꼴로 수백 개씩 달려있었다.

“그리고 이 마나….”

넬라는 느껴지는 불길함에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가 익히 느껴본 적이 있는 마력이었다. 1년 전, 그 바다. 수천 마리의 마물이 쏟아져 내리는데도, 그것의 마력은 피부에 칼로 새긴 듯 생경하게 느낄 수 있었다. 넬라는 괴물의 사지에 달린 몇 갈래의 촉수를 바라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이건, 확실하게 재앙의 마나였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산발적으로 들려오던 비명은 이제 격렬한 전투의 소음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경험 적은 마탑의 마법사라고 해도, 아직까지 비명이나 지르고 있으면 마법사 실격이었다. 그렇다면 아래쪽은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고, 문제는 첫 번째 폭발이 일어난 위쪽.

넬라가 그렇게 결단을 내리고 고개를 들어올린 순간, 괴물들이 뚫린 천장을 통해 바닥으로 착지했다. 넬라는 벌레라도 씹은 듯한 표정으로 마력을 재차 끌어올렸다.

그워어어어.

시체가 낼 법한 소리와 함께 괴물들은 곧장 넬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문어숙회를 만들어버릴까 보다.”

불덩이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었다. 넬라는 손에 맺힌 불꽃의 크기를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주먹만 했던 불덩어리는 어느새 넘실거리는 불의 파도가 되어 아지랑이를 피워냈다. 넬라는 괴물들이 돌진하기 전, 불의 파도를 앞으로 쏘아 보냈다.

“죽어-!”

층 전체를 다 태워버리고도 남을 화염의 파도가 전방을 휩쓸었다. 파괴된 층에 그나마 남아있던 설비들이 마력의 불꽃에 전소되었다. 그사이에 끼었던 괴물들은 움직여보지도 못한 채로 한 줌 재가 되어 무너져내렸다.

“…일단 처리했고.”

10층의 반절이 녹아내리기는 했지만, 물리친 건 물리친 거다. 넬라는 괴물들이 뚫고 떨어진 곳을 향해 다가가며 위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마법으로도 조금 녹아내리고 끝난 마탑의 바닥을 대체 무슨 수로 뚫어버린 건지.

“누가 수작을 부린 건가.”

가늘게 눈을 뜬 넬라의 시야로 휑하니 뚫린 천장의 구멍이 보였다. 10층에서 솟아나는 연기가 11층의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고, 넬라는 희미하게 11층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볼 수 있었다.

“…불을 꺼야 해…! 자료들은 다 어디 있는 거야…!”

“…조교들은 지금 어디 간 거야! 당장 불러와! …교수는 이 와중에 어디로 사라졌어?!”

들려오는 소리와 돌아다니는 그림자들. 난리도 아니었다. 교수들이 어떻게든 일을 수습하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는 것 같았지만, 이따금 처절한 비명이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일이 잘 수습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넬라는 혀를 쯧, 구멍이 뚫린 천장으로 다가가 강한 돌개바람을 일으켰다. 넬라의 가벼운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라 11층으로 상승했다.

“넬라 부교수님-!!”

연기를 바람으로 몰아낸 넬라가 도착하자, 조교들이 울먹이며 넬라를 맞아주었다. 평소에는 실내에만 갇혀 있어 허옇게 떠 있던 얼굴들이었지만, 지금은 검댕과 상처에 뒤덮여 여느 병사 못지않은 몰골이었다.

“다른 교수들은 어디 있습니까.”

“대부분 11층으로 달려와서 침입자를 물색하려 하고 있어요. 최초 신고자가 사망한 채로 발견돼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누가 침입자인지도 알 수가 없어요. 지금은 마탑 곳곳에 돌아다니는 괴물들을 우선 잡고 있어요.”

조교 하나가 폐부의 모든 숨을 쥐어짜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는 연기를 들어 마신 듯 쿨럭거리며 기침했다.

“대체 무슨 괴물입니까, 저건? 교수님들도 아는 눈치가 전혀 아닌데…. 사람처럼 생기긴 했지만 사람은 절대 아니고, 마물조차 아니에요. 저런 건 배운 적도 없습니다.”

“난들 알겠어요. 나도 저런 건 처음 봐요. 웬만한 마물보다는 훨씬 강하지만, 그래도 안 죽는 건 아니에요. 3서클 이하의 마법사들이 상대하긴 무리가 있겠지만….”

마법이 관통하는 느낌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 괴물들은 강했다. 4서클은 되어야 안정적으로 상대할 수 있을 거다.

“일단, 저 괴물들이 마탑 밖으로 빠져나가게 둬서는 안 될 겁니다. 아카데미 학생에게는 무리에요. 순식간에 저 녀석들에게 목을 따이겠죠. 내려가는 길은 전부 봉쇄했나요?”

조교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자동 차폐 체계가 잘 작동해서, 비상계단까지 모두 막혔습니다. 최대한 돕겠습니다, 교수님. 뭘 하면 될까요.”

넬라는 도끼눈을 뜨고 조교를 바라보았다. 3서클의 지극히 평범한 마법사. 이 사태에서 조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기껏해야 괴물들이 어디로 가지 못하게 붙들고 있는 정도. 그러다가 운이 좋으면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거나 도망갈 수 있을 거고, 재수 옴 붙었으면 아카데미의 학생과 다를 바 없이 끔찍하게 살해당하겠지.

“연구 자료는 어떻게 됐습니까.”

자료라도 온전히 지키고 있으라고 말하려던 건데, 조교의 표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무너졌다. 넬라는 굳이 그의 대답을 듣지 않고서도 자료에 무슨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백업한 자료는 있겠죠.”

“…물론 있습니다만, 하필이면 백업 전날에 일이 일어나서…. 근 일주일간의 자료는 대부분 전소되었을 겁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조교는 머리를 땅에 박을 기세로 사과했지만, 넬라는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가장 중요한 자료는 다프네가 지키고 있을 거다. 관측 자료쯤이야 사건이 끝나면 재관측할 수 있고….

잠시만, 재관측?

넬라의 사고가 얼어붙었다. 여긴 11층. 다가오는 혜성의 관측과 연구에 필요한 모든 자료, 도구를 한데 모아놓은 장소다. 대처법 하나 지켰다고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넬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걸 본 조교가 다시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교, 교수님….”

“지킬 수 있는 자료는 전부 지켜야 해요.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전부 동원해서!”

“예, 옙! 알겠습니다!”

넬라가 벌떡 일어나자, 조교 또한 차렷 자세를 취했다.

“나는 다른 교수들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고, 빌어먹을 침입자를 찾을 테니까요.”

넬라는 반쯤 폐허가 된 11층의 복도를 가로질러 뛰어갔다. 눈앞에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괴물들이 나타나 길을 가로막고 섰다. 괴물들을 향해 마법을 발사하려던 넬라의 손이, 한순간 멈칫 멈추었다.

“너네…뭐야?”

이번에 나타난 괴물은 몸에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저 하얀 가운은 넬라에게 굉장히 익숙한 옷이었다. 연구실의 사람들이 입는 옷. 넬라는 찢어지고 불에 탄 가운을 보며 눈살을 확 찌푸렸다.

“내가 그런다고 너네한테 마법을 쓰지 못할 거 같아?”

넬라는 자신에게 말하듯 그리 중얼거리며 마법을 쏘았다. 연구원의 옷을 걸친 괴물은 넬라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마법에 옷과 함께 불타 사라졌다. 넬라는 입술을 꾹 깨물며 괴물의 시체를 넘어 나아갔다. 지금 마탑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어지러운 넬라의 머릿속에, 문득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일로이. 망할 용사 자식.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자빠진 거야.

넬라는 그러다가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아니. 그 자식에게 의지하지 않기로 결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넬라는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일로이의 얼굴을 떨쳐내며 다시 마법을 쏘아냈다.

“네 생각따위 한 적 없다고-!”

콰광-!!!

11층의 복도가 성대하게 폭발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도착한 테라스는 넬라가 예상한 것보다는 멀쩡했다. 가운데, 완전히 부서져 버린 망원경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렇게 될 줄은 알았는데….”

넬라는 망원경의 잔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망원경은 누군가가 노린 것처럼 처참하게 산산조각이 났다. 넬라의 손아귀에서 부서진 망원경의 렌즈가 투두둑 떨어졌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개폐형 유리 돔 또한 깨져버린 듯했다. 수복할 수도 없을 듯한 잔해를 바라보며, 넬라는 이를 부득 갈았다.

노렸다.

누군가가 철저하게 여섯 번째 재앙의 공략을 방해하기 위해 이런 짓을 저지른 거다. 하지만 대체 누가? 외부에서 침입은 불가능하고, 답은 안에서 멀쩡하게 11층까지 뚜벅뚜벅 걸어와 일을 벌였다는 건데, 내부자가 아니라면 할 수 없다.

“나는 망원경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네. 옛 천문학자들이 그랬듯이 말이야.”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넬라는 뒤로 휙 돌아보았다. 아주 익숙한 실루엣이, 뒷짐을 지고는 천천히 넬라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렇게 둘이 독대하는 건 오랜만이군, 넬라 타르 부교수. 상당히 급해 보이는 얼굴인데.”

“에드윈 블류브…!”

“이런, 자네가 그렇게까지 적대적으로 대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에드윈 교수는 허허, 사람 좋은 웃음을 내뱉으며 한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넬라는 일그러진 얼굴과 함께 주먹을 콱 쥐었다. 침입자의 정체. 넬라는 전에 없이 불길한 기척을 풀풀 풍기는 에드윈을 노려보았다.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겁니까. 마탑에 자격지심이라도 있어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런 괴상한 괴물들을 풀어놓고 날뛰는 거예요?”

“자네, 뭘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에드윈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내가 어째서 천문학에 입문했는지 아나?”

“별로 알고 싶지도 않거든…!”

넬라는 손에 마력을 피워올렸으나, 에드윈 교수는 우습다는 듯 그를 보고 피식, 헛웃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는 넬라가 공격할 준비를 하든 말든, 제 할 말에만 집중했다.

“난 어렸을 적부터 하늘을 올려다보는 걸 사랑했네. 맨눈으로 말이지.”

산산이 부서진 유리 돔 너머로, 땅거미가 황혼을 잡아먹으며 나타나고 있었다. 하나둘씩 떠오르는 별들 위로, 새하얀 반쪽짜리 달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눈으로 보면 그 거대함이 훨씬 잘 느껴지지. 망원경으로 보는 것보다 가깝다는 생각이 들거든. 그러니, 내게 망원경은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었어. 나는 특정 별을 바라보려고 한 적이 없었네. 우리는 저 하늘 속 수억 개의 별 중 하나에 살고 있을 뿐이라고, 끝없이 내게 되새기며 말이다.”

에드윈의 웃음은 텅 비어있었다. 넬라는 그 공허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긴장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생물이란 말일세, 이치에 거스르면 안 돼. 멸망을 피하려 발악해봤자 더 끔찍한 최후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 이치는 더욱 뒤틀리게 될 걸세.”

넬라는 에드윈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어떻게 해야 저 마법사를 한 번에 쓰러트리고 구속할 수 있을지만을 생각할 뿐이었다. 4서클. 완숙한 5서클인 넬라가 전력을 다한 마법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다 같이 죽자고 이런 짓을 벌인 거냐?”

“우리는 필멸이네, 넬라. 언젠가는 하나하나, 크게 보면 다 함께 죽을 운명이지. 그리고 인류는 아주 오래 전에 그 운명을 한 번 거슬렀어. 영웅이라는 이름 아래, 시행되어 마땅한 멸망의 운명을 피해왔다는 말이야.”

에드윈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우리’는 그 마땅한 멸망을 집행하는 사도일세, 넬라. 자네 하나가 우리를 막을 수는 없어.”

“‘우리’? 네놈 말고도 더 있다는 소리냐?”

“물론이지. 멸망을 막는 것도 한 사람이 하지 못하는데, 멸망을 실행하는 걸 한 사람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넬라는 대화로 시간을 끌며 마력을 몰래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에드윈 교수, 저 작자는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드러난다네, 넬라 부교수.”

“그래? 그렇다면 당연히 이것도 막을 수 있겠네-!”

넬라의 발치에서 얼음송곳이 빠르게 돋아나며 에드윈을 노렸다.

“얄팍해.”

그리고, 에드윈의 앞을 고기 방패들이 나타나 가로막았다. 촉수가 달린 괴물들이었다.

“장난으로 노예, 노예 했지만…, 지금은 정말 내 노예가 되어버렸지 뭔가.”

공격을 가로막아준 괴물들 외에도, 에드윈의 등 뒤에서 괴물들이 더 나타났다. 넬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들 내 친애하는 동지들이었지. 멸망을 위해 모인 사람들 말이야.”

에드윈은 지휘관처럼 그들의 뒤에 딱 버티고 서서 넬라를 바라보았다.

“어디, 지난번에 자네를 회유하려 했지만 너무 딱 잘라서 거절하더라고.”

에드윈의 웃음에, 넬라의 표정은 한층 더 썩어갔다.

“어때. 이번에는 생각이 좀 있나?”

에드윈의 물음에, 넬라는 비웃음을 날리며 중지를 펼쳐 보였다.

“대답이 되었나?”

“…잡아서 뜯어 죽여라.”

괴물들이 동시에 넬라를 향해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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