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1 - 121. 습격 (3)
7층의 천장 – 그러니까, 8층의 바닥이 산산이 부서졌다. 나는 한꺼번에 두 층을 뚫고 상승해 8층과 9층의 중간쯤에서 멈추었다. 시야에서 바닥과 천장의 파편이 붕 떠올랐다. 희미하게 보이는 7층의 바닥에서는 나탈리가 팔을 쭉 뻗은 채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새카맣게 흘러나오는 재앙의 마력이 꿈틀거렸다.
“놓치지 않아요.”
마력은 촉수를 감싸더니 다시 내게로 쏘아졌다. 나는 파편을 발판 삼아 얽혀 오는 촉수로부터 달아났다. 촉수는 파편을 으스러뜨리며 소용돌이처럼 휘감겼다. 마치 오러처럼 촉수를 감싸 안은 새카만 마력은 닿는 물질을 먼지로 분해하고 있었다.
“검사의 칼보다도, 제 촉수가 훨씬 예리해요.”
훈륜의 힘이 아니었다면 위험할 뻔했다. 나는 꽤 오랜만에 느껴지는 육신의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나탈리의 말대로다. 오러를 씌운 검 따위, 아주 간단하게 부숴버릴 수 있는 위력을 지녔다. 웬만한 기사들은 뼈도 못 추리고 당해버리겠지.
“검이 없는 교수님이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발판이 불안정하다. 마력으로 허공에 나를 붙들고 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조금만 더 머뭇거리면 저 촉수들이 내 사지를 붙잡아 찢어버릴 거다. 혹은, 지금처럼 저렇게 날 꿰뚫어버릴 작정으로 쇄도하든가.
그러니, 흘린다.
탈력(脫力). 커다란 힘을 다룰 때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하는 몸, 마음가짐. 나는 그대로 힘을 풀어버렸다. 성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강함을, 강함으로 제압하려 들지 말라고. 나는 촉수의 끝자락에 가볍게 발을 가져다 대었다.
“잡았다.”
“끝까지 대상에서 눈을 떼지 마세요, 나탈리. 제가 일전에 가르쳐드렸을 텐데요.”
나탈리의 번득이는 눈과 내 내려다보는 시선이 교차했다. 내가 가벼운 웃음을 흘리자, 나탈리의 얼굴이 의문에 물들어갔다. 그녀는 아직 내 발이 그녀의 촉수를 딛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다. 반발은 단 한 순간이면 된다. 무릎에 힘을 불여넣어, 촉수를 박차고 몸을 크게 돌렸다.
“방심도, 확신도 금물입니다. 설령 상대를 쓰러트리더라도, 심장을 꿰뚫어 죽여버리더라도 싸움이 끝나지 않은 이상 결과에 대한 어떤 판단도 내리지 마세요.”
휘잉. 하고 귓가를 바람이 스쳤다. 나는 8층의 벽면으로 붕 날아가 안착했다. 거리가 벌어지니 시야가 넓어졌다. 판단할 시간을 벌고, 대처법을 떠올린다.
“…육탄전으로 시간을 벌면서, 10층까지 가는 수밖에 없어.”
의지해야 하는 건 순수한 내 육체뿐이었다. 사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10층에서 성검이나 너울을 회수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빠져나가시네요.”
8층에 난 구멍 위로 나탈리가 쏙 빠져나왔다. 촉수를 다리 삼아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모습이, 꼭 영화에 나오는 기계 문어 아저씨를 연상케 했다. 새카만 마력이 꼭 눈화장처럼 그녀의 눈에서 일렁였다. 그 섬짓한 귀화(鬼火)는 나를 찍어누르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멀리서 그리 공격하는 건 비겁하지 않을까.”
“저는 마법사예요, 교수님. 적을 멀리서 공략하는 게 당연하죠. 마법사가 기사를 상대할 때 절대 어기지 말아야 할 제1 수칙. ‘거리를 주지 말라’. 아시잖아요?”
촉수가 다시 뭉쳐 들었다. 나는 촉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두둑, 꺾었다. 당장이라도 나를 향해 튀어올 것 같은 태세를 갖춘 촉수들. 아마 내가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럼 교수님은 거리를 좁히는 게 당연하겠죠?”
발걸음을 뗀다. 동시에, 촉수가 내 움직임을 봉쇄하려 날아든다. 예상한 대로의 궤적. 나는 고민하지 않고 그대로 촉수를 낚아채었다. 새카만 재앙의 마력이 나를 침식하려 날뛰었지만, 내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나탈리의 표정이 순간 굳어버렸다.
“-?!”
“전투에 정답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닙니다, 나탈리.”
나는 촉수를 확 잡아당겼다. 힘의 전환은 빠르게 이뤄지지 못했다. 나탈리는 그대로 끌려와 벽을 무너뜨리며 처박혔다. 나는 그녀를 끌어당기며 다시 위로 걷어찼다. 8층의 중앙에서 차올려진 나탈리는 그대로 천장에 처박혔다. 나는 이에 그치지 않고 벽을 박차고 도약해 천장과 함께 나탈리를 날려버렸다.
그리고는, 9층 바닥에 안착해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뭐가 이렇게 단단해.”
무슨 강철을 걷어찬 것 같았다.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나탈리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정신을 잃으라며 걷어찬 것이었는데, 어지간히도 튼튼했다. 그리고, 나를 노려보는 나탈리는 고개를 휘휘 흔들더니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역시 교수님은 상냥하네요.”
상처 하나 없었다. 머리에 흙이 좀 묻은 정도일까. 비늘로 뒤덮인 피부는 더러워지지도 않는 것 같았다. 위협적으로 들어올린 촉수를 바라보며, 나는 혀를 쯧, 내찼다.
“여태 모든 공격에서 나를 죽이려는 의지는 느껴지지 않았어. 나는 이렇게 당신을 죽이려 하고 있는데 말이에요.”
“내가 단순히 바보같이 상냥해서 너를 죽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탈리는 그렇지 않냐며, 아주 희미한 미소를 띄워 보였다.
“내게 기술을 가르치고, 마음을 주어 사람과 함께하게 하면 나를 바꿀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닌가요? 아니, 그러지 못해요.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나탈리를 바라보았다.
“아니. 내가 너를 죽이지 않은 이유는 고작 그런 믿음 때문이 아냐. 사람의 목숨은 구할 수 었어도,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나탈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도 저를 죽이려 하지 않는 건가요?”
“악신 숭배자들은 최대한 살려둬라. 특히 놈들의 핵심의 있는 자일수록. 널 살려 생포해야 할 이유가 내게는 있다는 소리야.”
내 말에, 나탈리의 미소가 약간 더 진해졌다.
“거짓말.”
==
또.
다프네는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괴물들을 일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소음은 격해지고 있었다. 마탑이 전무 파괴되고 무너져내리는 동안 혜성을 막을 자료들은 무사히 지켜지고 있었지만,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다프네에게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넬라 씨는….”
넬라는 무사한지, 일로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괴물들이 마탑 안에서만 난리를 치는 건지, 혹은 마탑 밖, 왕도 전체가 이 꼴이 되어버린 건지.
익숙한 상황이었다.
다프네는 문밖을 노려보았다. 일로이가 안개 안으로 들어가 버렸을 때도, 마리안느가 그 뒤를 쫓아 들어갔을 때도. 다프네는 바라보고 기다리는 쪽이었다.
이제 홀로 움직여도 괜찮을 힘을 얻었는데도. 도대체 뭐가 두려워서 가만히 있는 거야.
다프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력은 남아돈다. 이 장소의 방호 마법을 완벽하게 유지하면서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전투할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5서클의 끝자락에 있을 넬라만큼은 잘 싸울 자신이 있었다.
“…일로이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들은 적도 없잖아.”
다프네는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며 정신을 다잡았다. 방은 방호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다고 해도, 다프네가 멀리 떨어지면 마력의 공급이 불안정해질 수도 있다. 그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다프네는 자료를 파헤치고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밤잠을 설쳐가며 작성한 수식의 결과물. 종이에는 마력의 순환을 나타내는 원과 술식의 구조를 드러내는 문자와 기호가 작성된 진(陣)이 그려져 있었다.
“계산이 단순할 필요는 없어.”
그건, 3서클 이하의 일반 마법사에게 해당하는 이야기. 다프네에게는 복잡하고 고등한 술식으로 마법의 완성도를 높이는 편이 더 나았다. 마력은 심장에서 발현된다. 거미가 거미줄을 엮듯, 다프네의 발치에서 마나의 실이 묶이며 술식을 만들어냈다.
“‘결계’를 이용해서,”
공간의 변형. 확장, 축소, 그리고 격리. 세상의 법칙을 뒤틀기 시작한 심장의 마력 서클이 타들어 갔다. 다프네는 그 고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술식을 완성했다. 푸른 마나로 만들어진 마법진이 공간 전체를 감싸며 빛나기 시작했다.
“이 방 전체를 하나의 독립된 세상으로 만든다.”
다프네는 결계의 개념을 입으로 읊었다. 소리 내어 말하는 건 마법의 정립에 도움이 된다. 여섯 번째 고리를 달고 나서는 마력에 불필요한 마나가 소모되는 과정도 막을 수 있었다. 맹렬하게, 혈관을 따라 순환하는 마력이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다시 뜬 다프네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푸른 광망이 서렸다.
“이렇게 하라는 말이지.”
연구실 전체가 강렬한 빛에 감싸였다. 그리고, 빛이 가라앉은 뒤, 다프네는 폐허가 되어버린 복도에 서 있었다. 다프네는 눈을 깜박이고, 주먹을 몇 번 쥐어보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됐다.
콰과광-!!
그리고, 복도 저편에서 괴물들이, 그러니까, ‘이식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못해도 그녀가 상대한 게 여태 10마리 정도. 죄다 재앙의 파편을 스스로 이식받은 악신 숭배자들일 거다. 다프네는 다시 손을 뻗어 다가오는 이식자들을 막아냈다.
“…대체 몇 명이나 있는 거야.”
다프네는 마력을 펼쳐 10층을 다시금 조사했다. 십수 명의 기척이 복도를 기웃거리고 있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다프네는 동공을 떨며 그 기척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로이?”
용사의 기척이었다. 그렇게나 강대하면서도 꺼림칙하지 않은 기척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일로이 하나뿐일 거다. 그리고 일로이의 기척은 무언가와 뒤엉키며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일로이만큼 강대하지는 않지만, 지극히 불길한 마력을 지닌 무언가. 다프네의 눈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언제 마탑에 돌아온 거야? 그리고 대체 무엇과 싸우고 있는 거고.
기척은 아래, 9층에서 느껴진다. 길게 생각할 틈도 없이, 다프네는 발걸음을 옮겼다. 중요한 건, 지금 용사의 상황이 썩 좋지만은 않다는 사실. 절대 일로이가 질 싸움이 아닐 것 같았는데, 일로이는 밀리고 있었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짓을 또 하고 있는 거야.”
기척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프네는 한숨을 내쉬고는 기척이 다가오는 곳을 향해 달렸다. 부서지고,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래에서 위로 상승하며 가까워지는 기척은, 마침내 다프네의 바로 발치에 이르렀다.
“-!!”
그리고, 바닥이 무너져내렸다.
다프네는 반사적으로 마력의 바람을 일으켜 몸을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그리고, 바닥을 뚫고 올라온 일로이는,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프네를 보며 놀랐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옷은 엉망진창이 되어있었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이제 그만 도망갈 때도 되지 않았나요?”
그리고,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 다프네는 마찬가지로 상승하는 기괴한 외형의 소녀를 마주했다. 얼굴과 검은 머리카락. 다프네는 소녀의 이름을 떠올리고는 어째서 일로이가 계속 밀리고 있었는지 또한 깨달았다.
“네? 교수님?”
“그래, 이제 그만 도망갈 때도 된 거 같네.”
일로이는 나탈리에게 대답하며 다프네에게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서린 장난스런 미소. 다프네는 일로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대번에 깨달았다.
“그거, 제가 지금 가지고 있어요.”
일로이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다프네는 마주 웃어주며 결계를 불러냈다. 일로이는 갑자기 허공에 생긴 균열에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 균열 너머에서 익숙한 검이 떨어지자 눈을 다시 화등잔만 하게 떴다.
“선물이에요.”
일로이는 손안으로 쏙 날아오는 성검을 잡으며 씨익 웃었다.
“고마워.”
그리고, 10층이 다시 빛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