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2 - 122. 습격 (4)
“어이가 없어. 마법사의 긍지는 어디다 갖다 버린 건지.”
그리 말하는 넬라의 발치에는 두 마리의 괴물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직은 이 녀석들을 상대하는 데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에드윈은 멀찍이 가만히 서서 넬라를 바라보고 있다.
“이런 괴물들에게 의존해가며 싸운다고? 사역마를 다루는 술자도 아니면서 말이야.”
“안타깝지만 넬라 부교수. 한 번도 마법사라는 집단에 소속감이나 자긍심을 가진 적이 없네.”
에드윈은 건조하게 그리 답했다. 마탑에서 족히 30년은 근무했을, 4서클의 마법사에게는 대체 어떤 사정이 있었길래 제 입으로 그리 말할 수 있는 걸까.
“당신의 세월을 부정하는 게 그리도 쉬운 일이었어?”
“시간과 세월 따위, 실존하는 절대성 앞에서는 무용한 것이네. 넬라, 자네는 절대적인 존재와 마주한 적이 있는가? 진실과 거짓이 무용한 그 눈동자 아래, 존재의 의미 자체를 상실해본 적이 있냐는 말일세.”
에드윈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했다.
“그걸 마주하면 말이지…. 30년의 세월이든, 300년의 세월이든, 3만 년이 되었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네. 그냥 우린 한 줌 먼지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지. 자네의 세월이든 나의 세월이든, 여왕의, 용사의 세월이든….”
에드윈은 그리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찮은 이들의 발버둥에 불과하게 된다는 소리일세. 재앙도 마찬가지로 말이야.”
“웃기시네. 재앙의 발끝도 본 적이 없는 주제에. 그것과 맞서려고 한 적도 없는 주제에, 그 입으로 함부로 재앙과 멸망을 논하지 마.”
넬라는 차가운 목소리로 에드윈의 말에 반발했다.
“설마. 나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다네. 설령 재앙들이 다가온다고 해도 그분들의 발끝에는 전혀 미치지 못할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에드윈이 떠벌리는 동안 괴물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의 등 뒤를 지키고만 있었다.
“그건, 굳이 몸으로 겪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야. 개미와 코끼리 중에 무엇이 더 큰지는 두 눈으로 보지 않아도 얄 수 있지 않나.”
넬라는 재앙을 개미에 치부하는 에드윈의 태도에 눈살을 확 찌푸렸다. 더 저 인간의 말을 들어줄 이유는 없다.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쓰러트리고 들어도 늦지 않다.
“그들이야말로 신이라 불리기에 적합한 존재들이네, 넬라. 혼란스럽고, 불가해하고, 강대하고, 지극히 우둔해 보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지혜롭지.”
에드윈은 그러면서 넬라의 손에 피어나는 마력의 빛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심장을 쥐어 짜내서 만들어내는 마법 한 번도, 그들의 숨결 한 번, 발걸음 한 번이 일으키는 일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6서클, 7서클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대마법이라고 해도 숨결 한 번에 사라질 걸세.”
저벅, 저벅. 에드윈은 괴물에게 다가가서 그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이렇게 말이지. 이렇게.”
콰드드득. 에드윈의 손과 함께 괴물의 머리가 뽑혀 나갔다. 괴물의 척수를 뽑아버린 에드윈의 손은 이상할 정도로 힘줄이 돋아 있었다.
“자네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네. 영원히 모를지도 모르지. 자네들이 얼마나 의미 없는 발악을 하는 건지, 진정한 의미의 절대성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일세. 우리가 탐구하던 건 모두 허상이었고 그것만이 진리에 다다를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되고서는 절망하는 이들도 있지.”
에드윈은 뽑아버린 그 머리통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괴물은 그대로 바닥에 무너졌다.
“괴물에 의존해서 싸워서 불만이었나? 자네의 그 잘난 지론을 펼쳐 보이려면 일단 이 괴물들을 전부 물리친 뒤에나 말할 수 있을 걸세.”
“…아 그래?”
넬라는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그래봤자, 괴물 뒤에 숨어서 자신과 맞서지 못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겁쟁이. 넬라는 마법의 구성을 끝마쳤다. 고리 다섯 개분의 마나를 쏟아부어 구성한 마법. 넬라가 구사할 수 있는 마법 중 가장 살상력이 높은 마법이 펼쳐졌다.
“이건 그럼 어떠려나.”
조용한 넬라의 목소리와는 달리, 펼쳐진 마법은 끔찍한 위력을 담고 있었다. 거대한 불기둥이 바닥에서 솟아올라 11층의 반절을 잡아먹었다. 넬라는 심장에 한껏 모아두었던 마력의 반절 이상이 증발하는 걸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해치웠나?”
마지막 말은 하지 않았어야 했나. 화염의 여파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는 넬라가 혀를 찼다. 예상한 대로, 넬라의 대마법에 잔챙이 괴물들은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모조리 타죽었다.
“내가 마법을 어째서 발악이라 깎아내린 줄 아나, 넬라?”
에드윈의 목소리는 기괴하게 변조되어 있었다. 꼭 강판에 성대를 갈아버리고 나서 말하는 것처럼, 거칠고 잡음이 잔뜩 낀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드러난 에드윈의 모습은 괴물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덩치가 두 배는 커져 버렸지만.
“마법으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에, 그들의 힘은 순식간에 도달할 수 있게끔 해주네.”
“…그런 엿같은 모습이 되어서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정도(正道)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마법의 본 목적이 무엇인지 잊은 거 아닌가, 넬라?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이뤄내기 위함이잖나.”
에드윈의 손에 시커먼 불길이 타올랐다. 괴물 같은 모습이 되어도 마법은 쓸 수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것도 마법이라고 할 수 있겠지. 아니, 그 전의 마법을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릴 수도 있어. 자네가 불태워 죽여버린 조교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지.”
“…굉장히 한심한 발언이네, 그거.”
말은 멀쩡하게 하고 있었지만, 넬라는 내심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연속된 전투에 마나를 많이 소모했다. 그리고, 눈앞에서 촉수를 꿈틀거리는 에드윈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은 적어도 6서클. 넬라가 이길 수 있는 선을 한참 넘어섰다.
“이 이식자들을 불태워버린 건 아깝지만, 넬라, 자네라면 이들을 보충하고도 남을 전력이 될 테지. 어때, 전향을 한 번 고려해보지 않겠나?”
“이 상황에서 그걸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 아니겠지?”
“물론 농담일세. 자네를 죽이기 전에 나도 죄책감을 덜 기회는 있어야 할 거 아닌가.”
넬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노려본다, 딱 한 번 저 녀석의 공격을 제대로 방어할 수 있다면 달아날 기회는 온다. 멍청이처럼 여기서 목숨을 걸고 싸워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유언 정도는 들어주도록 하지. 내 이식자들을 물리쳐서 그 정도 자격은 있다고 생각하니.”
넬라는 다른 마법을 구성했다. 에드윈은 그조차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저항인가?”
마지막 저항은 무슨 마지막 저항이야. 도망갈 건데.
넬라가 눈을 빛내며 탈출 경로를 모색했다. 가장 가능성 있는 건 저 깨진 유리 돔 너머로 뛰어내리는 것. 바람 마법을 어떻게든 조절한다면 크게 부상을 당하지는 않을 거다. 넬라의 시선을 따라 에드윈의 눈이 돌아갔다.
“잔머리를 굴리려…!”
콰과광-!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넬라의 앞에서 기세등등하게 촉수를 펼치던 에드윈이 대포알처럼 옆으로 튕겨 날아가 버렸다. 탈출을 준비하던 넬라는 눈이 휘둥그레 바뀐 채 흙먼지에 휩싸인 입구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중요한 순간에 등장한 원군. 넬라는 자신도 모르게 그 이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일…로이?”
더듬거리며 내뱉은 용사의 이름. 하지만 흙먼지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은 여자의 그것이었다. 탑주라고 보기에는 키가 좀 큰데…. 저 6서클 가량의 괴물을 누가 한 번에 날려버린 거야.
“일로이의 이름이 왜 거기서 나오죠?”
그리고, 먼지가 가라앉고 등장한 건 익숙한 분홍 머리였다.
“설명해보실까요, 넬라 씨.”
넬라의 얼굴이 수치심에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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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검 하나.
하지만 그 검을 손에 쥠으로써 용사는 비로소 용사가 된다. 적당히 치고받는 동안 달아오른 몸에 성검이 날개를 달아주었다. 나는 혈류를 타고 흐르는 찌릿한 마나에 고양된 미소를 지었다. 전력을 온전하게 갖춘 상태로 전투를 치르는 건 오랜만이었다.
“목표는 제압.”
“[두말하면 입 아프다. 제법 골치가 아픈 상대를 마주했구나, 일로이.]”
머리가 아프긴 하지. 내가 보기에는 아직 서로 간 보기밖에 하지 않은 것 같으니까. 나탈리도 전력을 드러낸 건 아닐 거다. 나를 상대하는 그녀의 표정은 아직 여유가 깃들어 있었다. 나와 거리를 벌리며 서서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던 나탈리가 입을 열었다.
“그게 바로 성검인가요. 역시 기세가 달라졌네요.”
나탈리의 허리에서 삐져나온 촉수가 허공에서 꼬리마냥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내 생각을 증빙하듯, 새카만 마력이 한층 더 짙게 뿜어져 나왔다. 눈앞의 상대는 지금도 더 강해지고 있었고, 제압은 더 어려운 일이 되고 있었지만 나는 평온했다.
“다프네.”
나는 뒤에서 마법을 준비하던 다프네를 향해 말을 걸었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내 말을 듣는 듯한 기색이 있었다. 눈은 나탈리에게서 떼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발치를 주시하며, 다프네에게 부탁을 남겼다.
“여긴 나한테 맡기고, 11층의 지원을 부탁할게.”
“11층이요…? 바로 위?”
“기척이 느껴져. 위에서 계속 싸움을 벌이는 기척. 아마 넬라가 분전하고 있는 거겠지.”
다프네는 더 묻지 않고 그대로 기척을 감추었다. 나는 한시름 놓은 뒤 온전히 나탈리에게 신경을 집중할 수 있었다. 나탈리는 다프네가 있던 방향으로 눈을 돌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굳이 1대 1로 대면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겠지.
“같이 싸웠으면 날 훨씬 잡기 쉬웠을 텐데. 다프네 교수님은 강하잖아요.”
“생각이 많으면 오히려 안 좋을 때도 있는 법입니다, 나탈리. 당신이 전투의 판세를 다 읽어내고 내 마음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초능력자라면 모르겠지만.”
“그럼 그게 무슨 생각인지 좀 가르쳐주실 수 있을까요, 교수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는 아무래도 더 통하지 않는 듯했다. 나탈리의 얼굴에는 조금의 동요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지는 않을 거 아니냐.]”
당연하지. 애초에 말로 설득할 수 있었다면 이 일이 벌어지기 전에 진작 교화할 수 있었겠지. 그렇게 쉽게 이번 일이 풀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성검을 두 손으로 거머쥐었다.
“[그래도 저 녀석을 네 제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더냐.]”
…부정하지는 않겠다. 일부러 냉정하게 판단하고 생각하려 해봐도, 그리할 수는 없었다. 악신 숭배자들이 정확히 그 지점을 파고든 것이겠지. 물론, 내가 어물대다가 피해가 확산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리고, 내게는 아직 믿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이제 슬슬 끝을 볼까요, 교수님.”
촉수가 날아든다.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날아드는 촉수는 대형 마법 따위는 아득히 넘어서는 위력을 품고 있었다.
쾅-!!
겨우 반 걸음 떨어진 곳의 바닥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허둥대지 않는다. 나는 빗나간 촉수에 성검을 들이밀었다. 조금의 저항 없이, 촉수는 잘려버렸다. 다음, 눈 깜박일 새도 없이 두 갈래로 촉수가 날아들었다.
이런 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
머릿속에 안개 속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다가오는 촉수의 움직임은 크라켄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저 촉수를 수백 번도 넘게 썰어보았다.
“간단하지.”
벤다.
아무리 촉수가 빨라져도, 위력이 강해져도 촉수는 내게 근접하지조차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악신 숭배자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악신이 직접 만들어낸 재앙과 같은 수준의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을 수 없을 테니까.
다시 벤다.
나탈리의 표정에 경악의 편린이 깃들었다. 나는 촉수를 잘라내며 조금씩 나탈리에게 다가갔다. 촉수가 잘릴 때마다, 나탈리는 눈을 움찔거렸지만 날 공격하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나탈리는 내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내가 그녀를 해하지 않으리라 굳게 믿는 눈치였다.
“그렇게 무섭게 다가와도 살기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잖아요.”
마지막 촉수가 내 검에 잘렸다. 나는 나탈리와 불과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나는 성검을 들어 올려 머리 위로 내려치려다, 옆으로 그어 내렸다. 나탈리의 얼굴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미소가 떠오른다.
“촉수를 다 잘라내도 날 죽일 마음이 없다면-.”
푹.
가슴이 무거웠다. 손의 궤도는 살짝 비틀린 채 가슴의 정중앙을 꿰뚫고 있었다. 입에서 피가 역류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빌어먹을 정도로 아팠다.
“이렇게 된다구요.”
“…그렇…네.”
나는 바닥에 허물어졌다. 나탈리는 미소와 함께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오른손을 뽑아 올린 후, 내게 뻗어왔다.
“…어?”
그리고, 이미 ‘베여 있던’ 그녀의 오른팔과 다리가- 스르륵 바닥으로 무너졌다.
“[일로이!]”
제압 성공.
나는 성검의 새된 비명을 들으며, 검자루를 붙들고 일어나 벽에 기대었다. 옆에서 날 바라보는 나탈리의 표정은 당혹에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