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4 - 124. 도약과 준비 (1)
습격이 있기 3일 전. 마탑의 관측실.
“그러니까, 대략 거대한 산 하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돼. 솔직히 충돌했을 때의 피해는 정확히 추산할 수조차 없어. 충돌하는 순간, 카이로스 왕국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알던 대륙은 그날로 사라진다고 생각해야 할 거야.”
칠판에는 울퉁불퉁한 바위처럼 생긴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넬라는 교편을 들고서 칠판을 탁탁, 두드렸다.
“혜성을 이루는 물질은 얼음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건 재앙이라, 대체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지. 그냥 대략적인 크기만을 알 수 있을 뿐이고. 눈앞에서 맞닥뜨려야만 저게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을 거야.”
일로이는 넬라의 말을 귀담아듣는 듯하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넬라는 가자미눈을 뜨고 일로이를 노려보았다. 먼저 설명을 요청한 건 그였으면서, 지금 모양새는 어째 용사를 붙잡아두고 일장 연설을 늘여놓는 것 같았다.
“듣고 있어? 너 표정이 어째 완전히 딴생각하는 모양인데.”
“잘 듣고 있어. 다시 받아쓰기라도 해줄까?”
“…아니, 됐어. 이야기나 계속할게.”
그래. 자신은 부탁한 것만 들어줄 뿐, 거기서 무엇을 얻을지는 온전히 용사에게 달린 일이었다. 넬라는 올라오려는 짜증을 다스리며 다시 교편을 들었다.
“세상 모든 마법사들을 끌어모아 저걸 파괴한다고 해서 피해를 온전히 막아낼 수는 없을 거야. 작은 언덕 규모의 혜성 수백 개가 쏟아지는 결과만 초래하겠지. 대륙이 초토화되는 건 똑같아. 한 대 맞고 끝나느냐, 몇 대씩 맞고 끝나느냐의 차이일 뿐.”
넬라의 보고는 그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일로이의 표정에서는 걱정하는 기색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저 녀석의 생각을 알아맞힌 적이 있었나 싶지만.
“그래서, 몇 가지 방안을 함께 의논했지. 혜성의 궤도를 비트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예 우주 공간에서 혜성을 먼지로 만들어버리는 방법까지…. 물론 허황한 방안이 대부분이었지만. 무엇보다, 저건 일반적인 천체가 아닌 악신의 피조물이야.”
넬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격으로 따지자면 전혀 달라. 하늘에 뜬 별과 같은 급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내가 말한 건 혜성이 단순히 산만 한 얼음덩어리라고 가정한 후 한 말이야.”
일로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넬라는 교편을 내려놓았다.
“자, 설명은 끝났어. 네가 잘 알아들었든 못 알아들었든 난 전혀 상관하지 않을 거야. 저게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적을 좀 더 자세히 알아야지. 그래야 상대법을 더 잘 강구할 수 있지 않겠어?”
일로이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법 비장한 표정이었다.
“…너 좋을 대로 해라.”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일로이는 아직 할 말이 남아있다는 듯 넬라를 보았다.
“뭐야.”
“고맙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아닌 용사의 인사에, 넬라의 볼이 확 달아올랐다. 넬라는 눈치 없이 달아오른 뺨에 손을 가져가지 않으려 애를 썼다. 들어오는 빛이 역광이라 다행이었다. 그래도, 파티에 있을 적에는 나름 마음에 들어 했었는데.
“그런 인사는 일이 다 끝나고 나서 해. 낯부끄럽게 말이야.”
넬라의 짜증은 귀여운 투정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대체 저런 말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서 일로이는 걸어갔다. 그게, 아마 넬라가 마지막으로 본 일로이의 웃는 모습이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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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폐하. 국민의 원성이 자자합니다.”
용사를 음해하려던 이들이 국정에서 대거 물러나게 된 건 맞지만, 무조건 그를 찬양하는 이들만이 궐내에 남아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아그네스는 곤란한 속내를 애써 숨기며 말을 꺼낸 대신을 바라보았다. 큰일을 맡기기는 망설여지지만, 대국에 있어 충언을 아끼지 않는 좋은 신하다. 그의 비판과 물음은 모두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이해한다. 다만, 나도 지금 용사가 어디에 있는지는 말하지 못한다.”
아그네스는 그리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암군(暗君)이 될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될 차례였다. 고개를 내젓는 아그네스를 바라보는 대신들의 표정이 굳어갔다. 여섯 번째 재앙에 관한 보고를 올릴 때가 언제인데, 그것이 어떤 해악을 끼칠지에 관한 이야기를 얼마나 나누었던가.
“말씀하지 못한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대들은 백성들 사이에 퍼진 헛소문을 수습하는 데만 총력을 기울여라. 국정을 돌보어야 할 이들이 어찌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느냐. 용사에게 의지할 생각만 하지 말고, 그대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용사라는 존재는 너무나 당연시되고 있었다. 아그네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용사가 승전을 거듭하니, 그가 이기는 건 당연하게 되었고, 지는 건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 올바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이의 어깨에는 너무나 많은 게 걸려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 짐을 바라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마탑의 복구에 총력을 다하라. 왕도 외의 마탑에서 관측이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해도 왕도의 마탑이 기능하지 않으면 구심점 없이 중구난방의 연구만이 계속될 뿐이다.”
아그네스는 침착하게 대처 방안을 제시했다. 일말의 불안감도 보이지 않는 여왕의 표정에, 걱정이 가득하던 대신들이 조금씩 평정을 되찾아갔다. 용사를 찾는 목소리는 줄어들고, 왕도 마탑의 기능을 대체할 방법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아그네스는 계속되는 그들의 토론 속에서 일말의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용사의 빈자리는 누가 메우면 되겠습니까, 폐하.”
물론, 이 질문에는 그녀도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용사가 돌아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경들이 정 불안하다면, 그를 대신하여 이 세태를 타파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지.”
대신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그네스가 다음 말을 내뱉을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들키지 않도록, 작게 숨을 들이마신 후 입을 열었다.
“내가 그의, 용사 일로이의 역할을 당분간 대신하여 맡겠다.”
떨어진 여왕의 선언에 대전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를 만류하려 입을 여는 대신들은, 여왕의 단호한 눈빛에 금세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허나, 폐하…. 어찌 일국의 주인 되신 몸으로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나이까.”
“이 나라의 왕이기에, 그리 말하는 거다. 허면, 경들은 나 이외의 적임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 나라에서 나보다 검을 잘 쓰는 이가 있다면 그리하겠다. 나보다 그 무게를 잘 견딜 수 있는 이가 있다면 또 그리하겠다.”
대신들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군주는 멀리 나가지 않는 법입니다, 폐하. 말씀을 거두어주소서. 차라리 북부대공, 퀘노어 스트로프에게 서신을 보내어 왕도로 들게 하겠나이다. 그라면 충분히 용사의 자리를 메워줄 수 있을 겁니다. 무예 또한 결코 용사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북부의 이들은 당연히 부를 생각이었다. 허나 그들은 정말 세태가 위급할 때만 중앙으로 들게 하겠다. 용사의 자리가 비었다는 사실을 공식으로 공표할 생각은 없느니라.”
아그네스의 의지는 결연했다. 대신들은 용사와 여왕이 어떤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것인지 막연하게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용사는 정말 죽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큰 부상을 당한 채로 잠적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용사라는 지위를 내버려두고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일까.
“섣부른 추측은 금물이다. 그대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지 말라.”
아그네스의 엄한 목소리가 대신들을 타일렀다. 말로 불안을 가라앉힐 수는 없겠지만.
“용사는 반드시 돌아올 거다. 그러니 그대들은 저잣거리에 나도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그 불안감 자체를 해소할 마음가짐으로 국정에 임하라.”
““예, 알겠습니다.””
해산을 명한 대전이 분주해졌다. 아그네스는 길게 숨을 내쉬면서 일로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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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휴가가 길게 이어진다고 생각했더니.”
게오르그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서신을 내려놓았다. 마리안느는 옆에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들이밀었다. 게오르그는 고개를 내젓고는 마리안느에게 서신을 쥐여 주었다.
“자, 너도 읽어봐라. 무슨 일로 이렇게 일로이, 그놈 없이 여기 모였는가 했는데.”
마리안느는 아리송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서신을 읽기 시작하더니, 점점 그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내 게오르그와 정확히 같은 표정으로 서신을 내려놓았다.
“다프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맞은편에서 서신을 전달해준 다프네가 어깨를 슬쩍 으쓱해 보였다.
“말 그대로, 악신 숭배자들이 마탑을 불구로 만들어버렸어요. 습격이 있었던 게 아니라, 내부자들이 교란 작전을 펼쳤고요. 교수 중 실종자로 기록된 이들, 태반이 종말 숭배에 빠진 사람들이었어요. 똑똑한 사람일수록 이상한 데 물들기 쉽다더니.”
고개를 젓는 다프네. 그녀의 표정도 썩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 녀석은 괜찮은 거냐? 어째 안개 때가 생각나는데.”
“참아주세요. 꽤 중요할 때인 것 같으니까. 거기는 성녀님 외에는 아무도 출입할 수 없어요.”
다프네는 고개를 내저었다.
“죽지 않은 건 확실하지? 도저히 그 녀석이 남긴 말은 안심하고 들어줄 수가 없어.”
“네. 마지막까지 사람 놀라게 한다니까요.”
다프네는 입을 비죽거렸다. 그때, 불타는 마탑에서 피투성이가 된 일로이가 지어 보이던 미소가 자꾸만 다프네의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일로이!’
‘소리 지르지 마. 아직 살아있어.’
그러니까, 그리 말하는 일로이의 복부에서는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프네에게 찡그린 표정을 내비치는 목소리는 딱히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라는 걸 다프네는 잘 알고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어요.’
‘2단계를 개방하면 힘 조절이 힘들어. 그때는 나탈리도 나탈리지만 그냥 마탑을 통째로 날려먹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다프네는 제 옷깃을 찢어 둘둘 두른 후 일로이의 환부를 압박했다. 일로이의 잘생긴 얼굴이 한껏 찡그려지고 있었다.
‘…출혈이 좀 많아요. 일단 서둘러 밖으로 옮겨야겠어요. 저 아이는….’
다프네가 눈을 돌린 곳에는 팔다리가 잘린 나탈리가 누워있었다. 저 정도 부상이라면 의식을 잃거나 죽을 만도 한데, 멀쩡하게 눈을 뜨고 일로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구속해서 함께 옮겨줘. 반항하지 못하게. 규격 외의 괴물이니,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을 거야. 곧 밖에 손님이 한 명 올 거거든.’
‘손님이요?’
‘나가면 알아.’
그리고, 다프네가 나가 맞이한 손님은 다름 아닌 아이시스였다. 아이시스는 반 시체가 되어 실려 나온 두 사람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죽은 듯이 있겠다는 게 이런 소리였나요.’
일로이는 말로 대답하는 대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녀석은 왜 갑자기 죽은 척하면서 두문불출 하는 건데? 정말 남은 악신 숭배자들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 작전 하나뿐이야?”
불만스러운 게오르그의 목소리에, 다프네는 비밀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마리안느와 게오르그의 시선이, 한꺼번에 다프네에게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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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기에도 참신하긴 한데, 바보 같은 방법이었다.”
나는 좌우로 고개를 꺾으며 ‘그녀’의 붉은 눈을 바라보았다. 불만인 듯 고개를 내젓고 있었지만, 정작 그 목소리는 나쁘지 않다는 듯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이번에는 뒤로 한데 모아 묶은 은발이 고개가 흔들릴 때마다 함께 흔들렸다.
“수련할 시간이 필요했어. 현실에 머물러 있으면, 이런저런 방해가 많을 것 같았거든.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 동안 조용히 여기서 원하는 경지까지 올라야지.”
“심상 세계의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고는 해도 한계는 있다. 언제까지고 이곳에 있을 수는 없을 거야. 여기 네가 오래 머무르는 것도 좋지만은 않고.”
성검이 짤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서서 두 자루의 검을 손에 쥐었다. 성검은 나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별을 베는 검 말이더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재앙을 꺾으려면 필요하지.”
성검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살랑 흔들었다. 순식간에,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우주 공간 위에서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런 우리의 발아래에, 갑자기 정체불명의 행성이 하나 떡하니 나타났다. 성검은 검을 살짝 들어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잘 봐둬라.”
검이, 떨어진다.
나는 그 움직임, 호흡, 검을 쥔 근육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바라보았고, 성검이 쥔 검은 깃털 하나 베지 못할 것처럼 속절없이 하강했다.
그리고 내 눈앞에서, 한없이 가벼워 보였던 성검의 검이 별을 두 갈래로 베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