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25화 (126/158)

Chapter 125 - 125. 도약과 준비 (2)

“…아니, 이게 도대체.”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기울어지는 천체의 질량을 느꼈다. 지닌 무게가 달랐다. 산을 베는 것, 거인을 베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단순히 저것이 이루고 있던 균형이 무너지는 것만으로 물리 법칙이 꼬이는 것 같았다. 성검은 ‘이런 느낌이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별을 벤다는 것은, 곧 하나의 세상을 베어 가르는 것.”

성검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부서지는 행성을 배경으로 하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소리도 내지 않고 세상이 무너진다. 잘게 부서지는 별의 파편이 사방으로 궤도를 이탈하며 먼 공허 속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성검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건 무식하게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로이.”

“당연히 그럴 줄은 알고 있었지만….”

방금 성검의 움직임은, 지금의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번의 참격. 그러니까, 참격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검의 움직임. 다만 느낄 수 있었던 건, 검날이 그리는 검로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거다. 나는 검집을 매고 있는 성검의 허리춤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느꼈느냐.”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흔들림이 없이, 아주 정직하고 올곧았어.”

“그 정도면 아주 정확하게 본 거다, 일로이. 그리고, 많이 본 것이기도 하지. 아직 이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거다. 그 편린을 느끼기라도 한 건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그동안 나나 그 여자와 싸우며 아예 깨닫지 못한 건 아니구나.”

자랑스럽고 뭐고, 나는 아직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별을 베는 검은 막연한 추상이라 생각했건만, 눈앞에서 정말 별이 베어지는 모습을 보니 농담조차 할 수 없었다. 성검은 얼이 빠져있을 내 표정을 바라보며 쿡쿡 웃음을 내뱉고는 다가왔다.

“자, 그 충격을 뇌리에 잘 새겨두어라. 눈을 감았을 때, 그 모습이 선하게 떠오르도록.”

성검의 목소리는 바로 귓가에서 들려왔다. 성검은 팔을 쭉 뻗어 내 눈을 가렸다. 나는 그 따뜻한 손길이 내 눈에 와닿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내가 별을 베었을 때의 움직임, 베어지는 별의 모습. 사라지는 하나의 세상.”

눈을 감아도 별이 보였다. 별은 성검의 파리한 손짓에 베였다 붙었다 하기를 오갔다. 마치 암시처럼, 성검의 말이 내게 각인되었다.

“그 모든 걸 방금 일어난 일처럼 기억하는 거다, 일로이. 그게 네 변화의 출발점이 될 거다.”

물이 천에 스미듯, 성검의 목소리가 내 귀에 스미었다. 내 눈을 가리던 성검의 손이 떨어지고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우주와 별무리는 오간 데 없었다. 우리는 이전의 그 하얀 방과 같은 공간에 마주보고 서 있었다.

“기억할 수 있겠느냐, 일로이.”

흐릿하게 깜박이는 시야 앞에, 뒷짐을 지고 나를 바라보는 성검이 있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의 감각이 내 것이 아닌 기분이었다.

“응.”

“검을 쥐어봐라.”

검을 쥐었다. 성검이 다시 손을 흔들었고, 눈앞에 흔히 훈련용으로 쓰이는 허수아비가 하나 나타났다. 성검은 허수아비를 툭툭 두드렸다. 나무와 짚 더미. 팔을 쭉 벌리고 선. 그 모습을 담아내는 내 시선이 평소와는 다른 걸 보는 것 같았다.

“네가 무엇을 베고자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일로이. 구상(具象)을, 겉껍데기만을 베어내는 데에서 그치면 안 된다. 네가 베어야 하는 건 그 너머에 존재한다. 형상은 과정에 존재할 뿐이다. 네 검로가 지나가는 길일 뿐이라는 소리이니라.”

성검은 허수아비를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걸 베어낸다면, 네가 베지 못할 건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원한다면 어디든지 닿을 수 있을 거다. 설령 신이라고 해도 말이지.”

검을 들어 올렸다. 마나가 날뛸 줄 알았는데, 잠든 듯, 새벽의 호수처럼 고요했다. 힘은 필요한 만큼만 주어도 된다. 검자루를 쥐는 손바닥. 자루는 내 손에 깊이 뿌리를 내린 것 같다.

검을 그어 내렸다. 성검이 보여주었던 움직임을 계속 되뇌며, 내 검은 곧은 궤적을 그리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날은 깔끔하게 허수아비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이게 아닌데.”

나는 검을 빼며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 참격에서는 베었다는 감각이 있었다. 안 된다. 베어내는 물체가 검로 위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거다. 여태 내가 시도했던 모든 베기 중에서 가장 깔끔하고 무결했지만,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움직임을 따라 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일로이. 다시 모든 걸 떠올려봐라.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거다. 그걸 머릿속 이론으로 구체화하는 건 다음 단계다.”

“한 번만 더 보여줄 수 있을까.”

성검은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첫 번째 인상이 희미해지게 두어서는 안 된다. 나는 네가 그 경지에 다다를 때까지는 다시 그 참격을 보여주지 않을 거다.”

성검은 단호했다.

“그 신비에, 환상에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 네 환상을 더 더듬으면 더듬을수록, 그를 더 구체화하려면 할수록 너는 더 가까워질 테니까.”

그녀가 다시 팔을 휘두르자, 조각난 허수아비가 붙으며 일어섰다. 나는 아쉬움을 느낄 사이도 없이 다시 검을 붙들었다.

“다시. 홀로 탐구해라. 시간은 충분히 주도록 하마. 얼마나 오래 걸리든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들어 올렸고, 본격적인 수련이 시작되었다.

==

“어쩔 수가 없군요. 제 사무실을 개방하도록 하겠씀미다. 연구와 회의는 이곳에서 진행하도록 하세오. 저는 다른 곳을 쓰면 되니까.”

라우라가 한숨과 함께 그리 말했다. 뒤이어 새어 나온 넬라의 한숨은 안도의 한숨이었다. 라우라는 색이 각각 다른 그 눈동자로 넬라를 바라보았다.

“미묘하게 분위기가 바뀌었네오, 넬라. 지난번의 습격 때문에 많이 놀란 검미까?”

넬라는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아뇨. 놀라긴 했지만, 제가 그 정도 일로 이렇게 후유증을 앓는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착 가라앉은 느낌임미다. 그럼 그 습격 때문이 아니라면…, 재앙 때문임미까? 아니면 혹시 현재 생사 불명, 행방불명의 용사님 때문임미까?”

“누가 그 녀석 때문에 기분이-!”

넬라는 슬쩍 떠보듯 말하는 라우라에게, 정색하며 소리를 빽 질렀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힘을 쭉 빼며 의자 위로 가라앉았다. 넬라도 그녀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용사 따위, 어찌 되든 좋은데. 괜히 그 녀석의 표정이 생각나서 심란했다.

“용사님 때문이 맞는 것 같슴미다만.”

“됐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하죠.”

복부가 뚫린 채로 피를 줄줄 흘리는 용사. 그것과 비슷한 모습의 용사를, 넬라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세 번째 재앙, 크라켄과의 싸움에서 큰 상처를 입고 해변의 구석에 쓰러진 일로이를 기억했다. 다리가 부러지고, 팔이 이상한 각도로 뒤틀린 채 입에서는 피를 한 움큼 쏟아내고 있던 일로이를 기억했다. 세 번째 재앙을 억지로, 닿지도 않을 힘으로 베어낸 대가였다.

‘살아남았어…. 물리쳤어.’

성녀는 의지가 되지 못했다. 그녀는 전투 중에 심각한 상처가 누적되던 게오르그를 돌보느라 가진 기력과 마력을 모조리 소진하고서 탈진한 채 다른 구석에 누웠다. 게오르그 역시 완전히 지쳐서 곯아떨어졌고, 아르옌은 늘 그렇듯 아이시스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넬라는 구석에 아주 간단한 응급처치만을 마치고 누워있는 일로이를 향해 다가갔다.

‘살아있어?’

‘그럭저럭.’

용사는 괴로워하지 않았다. 넬라는 그를 안타깝다 여기지는 않았다. 아프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때는 아직 자신이 파티를 박차고 나가기도 전이었으니까, 용사와도 사이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다. 용사와 용사 파티를 순전히 제 출세 수단이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때만큼은 다른 기분이었다. 누구보다 함께 죽음에 가까웠던 사람들이니까.

‘안 아프냐.’

‘별로. 네 걱정이나 하지.’

일로이는 무뚝뚝하게 대답하고서 일어났다. 대체 저런 상처를 달고서 어떻게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넬라는 한숨과 함께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수고했어.’

넬라는, 일부러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용사는 절뚝거리며 막사로 돌아갔다. 평소와는 다른 색의 파도가 모래사장을 덮었다. 저기, 눈앞에 쓰러진 거대한 괴물과 마물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체액과 피로 더러워진 바닷물이었다.

지금은 어떡하고 있을까. 용사는 다프네와 무슨 대화를 나누더니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다. 넬라는 다프네의 완고한 태도에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다만 볼 수 있었던 건, 미안한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일로이의 청록색 눈동자였다.

“그래서, 어떡할 생각임미까?”

넬라는 라우라가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회상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눈앞에서 자꾸만 어른거리는 그날의 풍경을 지워보려 애를 썼다. 어디까지 말했더라. 그래, 탑주의 사무실을 어떻게 이용할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가.

“11층이 완전히 제 기능을 되찾기 위해서는 한 달이나 되는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그때까지 관측을 미룰 수는 없으니 옥상에서 여섯 번째 재앙의 관측을 이어나갈 생각입니다.”

망원경은 예비가 딱 하나 남아있었지만, 기존에 쓰던 망원경만큼의 성능은 아니다. 물론 없는 것보다야 훨씬 사정이 낫다. 혜성이 만약 등속으로, 혹은 계산대로의 일정한 수준으로 가속하며 다가오고 있다면…. 넬라는 머릿속으로 복잡한 계산을 이어가다, 라우라를 쳐다보았다.

“탑주께서는 재앙에 대처할 방안을 생각하고 계셨나요.”

“지금으로서는 당신과 다프네씨가 제시한 방안이 가장 좋다 생각함미다. 단순히 멸망을 막아내는 게 아니라, 아예 피해를 없애는 방법으로 가겠다니.”

라우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저 이후의 마탑도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요. 이렇게 훌륭한 후임 마법사들이 자라고 있다니.”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으면 차기 탑주를 누구로 내정해야 할지는 결정됐네요.”

변함없는 넬라의 말에, 라우라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도록 하겠슴니다. 정말 이 방안으로 여섯 번째 재앙을 막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말이에요.”

넬라는 작게 혀를 찼고, 라우라의 미소는 진해졌다.

“그럼, 설계는 맡기겠습니다. 제가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보다는, 발안자에게 맡기는 편이 훨씬 나을 거 같거든요. 이전에 없던 유형의 마법인지라, 일이 잘 끝나고 나면 학회에 논문을 제출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군요.”

라우라는 그리 정리하며 화제를 매듭지었다.

“자, 그럼 이제 다른 걸 좀 이야기해볼까요.”

그리 말하면서 라우라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때, 넬라의 그림자에서 무언가 솟아나며 라우라의 손아귀에 회수되었다. 넬라는 제 그림자에 숨어있던 그것을, 화등잔만 해진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저건…. 저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던 겁니까?”

“용서해주세오. 그럴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씀미다. 마탑의 거의 모든 마법사에게 붙여놓은 것이기도 했고요.”

한순간 화가 끓어오른 넬라였지만, 돌변했던 에드윈의 얼굴을 생각하면 납득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마탑 내부에 그런 인간들이 몇 명이나 숨어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다. 눈앞에 앉아있는 저 마녀 빼고는. 넬라는 분노를 가라앉히며 눈을 떴다. 지금 여기서 화를 내봤자 뭐가 달라지나.

“이번 습격과 관련된 일이겠죠? 이제는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대체 그 사람들은 뭐였는지, 에드윈 교수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라우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씀미까.”

“…네, 뭐. 쓸데없는 질문만 아니라면.”

떨떠름한 넬라를 바라보는 라우라의 표정은 생각보다 진지했다.

“당신은 앞으로도, 이번 일 이후로도 이 세상을 위협하는 존재와 싸워갈 자신이 있습니까? 당신이 용사 파티를 떠났다고 하더라도?”

혀짤배기소리가 아니었다. 라우라는 얼굴을 찌푸리다가, 이내 끄덕였다.

“아직은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았으면 하니까. 전 아직 욕심이 많거든요.”

“그럼, 이 세상이 멸망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하겠씀미다.”

라우라가 작은 미소를 띠며 두 손을 모았다.

“세상이 멸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

당혹스러운 표정을 내비치는 넬라를 향해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령, 집과 터전이 모두 파괴되어버린 바크틴스의 난민들이라든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