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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26화 (127/158)

Chapter 126 - 126. 도약과 준비 (3)

“날 살려둔 이유가 뭐죠.”

오늘, 성국의 수용소에서는 드물게도 비명이 울려 퍼지지 않았다. 깨끗하게 치운 것처럼 보이지만, 벽면의 얼룩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었는지 그대로 남아있었다. 핏물은 처음부터 바위와 한 몸이었던 것처럼 스며붙어 그림자와 함께 일렁인다.

“그건 순전히 용사님의 의지입니다. 저는 알 수가 없지요. 당신의 생사여탈에 관여할 생각도 없고 말입니다, 물론 당신 때문에 사람이 한 명이라도 죽었더라면, 용사님도 당신을 살처분하는데 가차 없이 동의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안드레 주교는 성유물에 구속된 채 바닥에 앉아있는 호문쿨루스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쏘아 보냈다. 나탈리는 다시 흑발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당신이 받은 명령이 무엇인지 말하시죠.”

“나한테서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을 거예요. 고문한다고 해도 마찬가지. 내가 당신이 듣고 싶어하는 정보를 부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호문쿨루스는 똑똑했다. 순전히 무력만 갖춘 바보가 아니라 상대하기도 훨씬 까다로웠다. 주교는 고개를 내저었다. 고문이라. 용사가 원치 않을 테니 기각이었다. 애초에 소녀의 모습을 한 괴물이다. 고문하는 데 거리낌이 생길 리가 없었다.

“그럼 됐습니다. 당신에게 물을 건 없습니다.”

안드레 주교는 그리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탈리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일어나는 주교를 올려다보았다.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던져봐야 의미가 없다. 당장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니니, 주교는 심력을 쏟지 않기로 결심했다. 여기 매달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잠깐 얼굴 정도는 보게 해주지요.”

주교는 나탈리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나탈리는 제 손목을 묶고 있는 올가미를 내려다보았다. 조금만 힘을 주면 찢어질 것 같은, 낡은 밧줄로 만든 올가미였다. 하지만 그걸 어째서인지 찢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니, 무슨 뜻이에요?”

안드레 주교는 부러 나탈리의 물음을 무시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코를 꿴 가축처럼 나탈리는 얌전히 주교를 따라갔다. 긴 지하의 복도를 지나는 동안, 나탈리는 그를 죽이고 탈출하는 상상을 했다. 죽일 수 있을까? 이 사람을 죽이고 도주하면? 다시 머릿속에 입력된 대로 움직여야 하나? 내게 다시 연락이 돌아오려나? 무엇을 할지 알려줄까? 아니, 애초에.

“그 올가미, 풀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저걸 죽일 수는 있나?

안드레 주교의 시선이 칼날처럼 나탈리의 시선을 베고 지나갔다. 나탈리의 폐부 깊숙이 한기가 스며들어 숨통을 조였다. 기습은 소용없다. 저 사람은, 기습하는 자가 기습에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틈을 타 목을 벨 기량을 가졌다.

“반항할 생각일랑 하지 마십시오. 내가 용사님께 변명해야 할 일을 만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주교의 목소리에, 나탈리는 탈출할 생각을 일단 접어두었다. 복도는 길었다. 그리고 나탈리는 쏘아 보낸 화살이나 다름없었다. 맞추든 빗나가든, 쏘아진 화살은 뒤를 돌아볼 수 없다. 쏜 사람은 나간 살을 보고 이리 가라, 저리 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살은 쏘아진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만 할지 알지 못했다.

“이쪽입니다.”

갈림길에서 멍하니 선 나탈리를 향해 주교가 말했다. 좁은 통로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주교는 계단의 첫 층계에 발을 올려놓고는 나탈리를 바라보았다. 지하의 어슴푸레한 빛과는 다른, 눈을 찌르는 하얀 빛이 끝에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의 얼굴이라도 보고 말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냥 모르는 체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심문도 통과하고 진술서까지 작성했어요. 고작해야 두 달 남짓한 우정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나탈리는 눈을 깜박였다. 주교가 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 그녀의 머리에 잘 와닿지 않았다.

“당신도 저 사람들의 얼굴이나 보고 대화해보시죠.”

나탈리가 들어선 방에는, 유진과 코라가 책상에 바짝 얼어붙은 채로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나탈리의 표정을 보고서는 반 안심, 반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너는 그런일을 겪고도 어째 멀쩡한 표정이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어? 갑자기 사라져서 사람 걱정하게 만들고 그래.”

각각 유진과 코라의 말. 나탈리는 그저 어리둥절한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너희가 여기는 도대체 왜.”

“그걸 말이라고 하냐. 우리에게 말도 없이 사라진 대가는 치러야지.”

입이 대발로 튀어나온 유진이 그리 말하며 책상 위로 손을 얹었다.

“자, 어떻게 된 건지 이야기나 해봐. 말하고 싶지 않은 건 빼고, 대략적인 것만.”

성국에서 정보를 얻어내려 이런 짓을 시켰을 리는 없다. 두 사람이 그 정보를 얻어 쓸 데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나탈리는 쉽사리 말을 시작하지 못했다. 유진과 코라는 그런 나탈리를 채근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

그리고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안드레 주교는 조용히 취조실을 나섰다. 등 뒤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나탈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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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꼬리를 잘도 자르고 도주했다고 생각했는데.”

교황은 보고서를 읽어내리며 감탄과 질림, 혐오와 한숨이 뒤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이른 오후였다. 길어진 낮이 아직 쨍쨍한 햇살을 교황의 방에 드리우고 있었다.

“슬슬 놈들의 알뿌리에 닿으려 하는군.”

“지독했습니다. 하지만 털뿌리도 자르지 않고 잡아당기다 보니 깊이 들어가는 길을 보여주더군요. 죽지 않았어도 될 이들이 몇 희생되었습니다만.”

안드레 주교는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추격의 세월 동안 이단심문관은 많이 줄었다. 남은 이들은 죽음의 이유와 의미를 구태여 찾지 않는 이들이었다. 이단심문관들은 죽은 이들의 편의를 도모하지 않았지만, 운구하는 일을 번거롭다 여기지도 않았다. 죽음을 별일이라 여기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게 놈들의 본신에 닿는 일이라면 기꺼워하겠죠.”

“시신은 잘 수습했나? 교회의 지하에 두어야 할 이들이 또 늘었겠군.”

교황의 말은 무미건조하고 씁쓸했다. 쌓인 관만큼, 두 사람이 태우는 담배가 늘었다.

“카이로스 왕국에서 있던 습격은…. 놈들이 실패했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용사를 살해하거나, 마탑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주교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훅 내뱉는 숨에 담배 연기가 남아있었다.

“그래. 그 미치광이들은 정말 용사나 마탑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더군. 그저 재앙을 이 땅에 도래하게 할 수만 있다면 된 거야.”

“그놈들이 그렇게까지 멸망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행동하는 것을 보면, 단순히 멸망이 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으니까요.”

교황의 얼굴에 수심이 깃들었다. 세상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았다. 여태 꽁꽁 싸매고 있던 악신 숭배자들이 갑자기 베일을 벗고서 그들의 모든 게 드러나도 상관이 없다는 듯 움직이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터였지만, 교황과 주교는 그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럴수록 용사가 고마워지는군. 그렇게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생포할 생각을 다 하다니.”

“…뭐, 용사님은 딱히 그런 의도로 녀석을 살려둔 건 아닌 듯합니다만.”

의도가 무엇이 중요한가. 교황은 답답한 한숨을 애써 삼키며 담배를 하나 더 집어 들었다.

“용사의 소식을 알 수 없는 게 이렇게까지 답답할 일이었나 싶군. 아이시스는 문을 걸어잠근 채 두문불출이라고 하더군.”

“딱히 저도 감시를 붙여놓은 건 아닙니다. 그 아이와 용사님을 믿으니까요. 시간을 달라고 했으니 저는 그 부탁에 따라 행동할 뿐입니다. 물론 재앙과 악신 숭배자의 감시 또한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죠.”

대화가 끊겼다. 방은 교황이 뻐끔거리며 연기를 내뿜는 소리만 가득했다. 교황은 반쯤 피다 만 담배를 재떨이에 던져 넣고 다시 입을 열었다.

“추적을 계속해라. 우리가 예상보다 놈들의 규모가 훨씬 크다. 일망타진할 생각일랑 버려두고 움직임에만 눈을 두고 있어야 해. 성국의 힘만으로 처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야. 재앙과 동등한 위협이라 인식해야 할 수도 있어.”

교황은 주교를 흘긋, 흘겨보았다. 주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커피를 홀짝거렸다.

“혼자 또 미친 짓 하지 말라는 소리야. 알겠나.”

“예, 예. 알겠습니다.”

자기 말을 제대로 듣기는 하는 건지. 교황은 늘어가는 주름을 매만지며 안드레 주교에게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호문쿨루스의 구속구는 잘 기동하고 있나.”

“걱정하지 않아도 잘 관리하고 있습니다. 현재 그녀로서는 구속구를 푸는 게 불가능합니다.”

안드레 주교의 눈이 빛났다.

“외부와 접촉하거나, 구속구를 풀려 시도한다면 오히려 우리로서는 감사해야겠죠. 저 괴물이 그만큼 멍청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또….”

주교는 제 동기들을 대하던 나탈리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게 적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준다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풀려고 할 것 같지도 않고요.”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만 묻겠다.”

교황은 깔끔하게 말을 끊어냈다.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사서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용사님은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성국 내로 옮겨오지는 않았다는 건 알고 있는데 말이죠.”

“정확한 위치는 발설하지 않기로 계약했다. 내게 말해준 것도 일국의 군주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를 베푼 것이었으니. 궁금하겠지만 알려줄 방법이 없군.”

안드레 주교는 바로 단념했다. 그렇게까지 요구했다면, 용사도 절대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표한 거다.

“어디 가는 거지?”

“뿌리를 계속 잡아당겨야죠. 입질이 올 때 당겨야 합니다.”

지나치게 서두르는 건 아니겠지. 교황은 안드레 주교에게 그리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애초에 현장에 가본 적도 없는 교황이 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피를 묻히는 일은 피를 묻혀본 사람에게 맡기는 것. 교황이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재앙이 끝이라면 다행이겠죠.”

아니라면, 그 뒤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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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쥘 때마다 손에 닿는 자루의 감각이 낯설었다. 새로 쥐는 것 같아 그런 게 아니다. 아예 검을 처음 쥐고 휘둘러보는 사람처럼, 알지 못하는 감각이 손바닥에 돋는 것 같은 기분이다.

“삼 단계의 개방은 단순히 힘을 다루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 옆에 자리해 앉아있던 성검은 그리 말했다. 나는 허수아비 하나를 제대로 베어내지 못하고 여전히 쩔쩔매고 있었다. 내 검로 위에 허수아비는 계속 존재했다. 내 검로는 계속 틀어졌고, 내가 베어내기가 무섭게 허수아비는 복구되었다.

“힘의 영역을 넘어섰다는 걸 넌 이미 깨달았겠지.”

성검이 세 번째 개방의 조건을 제시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별을 베고 세계를 무너뜨리는 힘에 편리한 조건 따위는 존재할 수 없었다.

“너 스스로 그곳에 다다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다시, 검이 내려갔다. 이번에도 허수아비는 검로 위에 존재했다. 육체의 피로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검을 땅에 꽂아 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보는 시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었다. 한참이고 허수아비의 단면을 들여다보던 내 앞에, 성검이 다가왔다.

“일로이.”

나는 성검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성검은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한 번 내게 죽어볼 테냐.”

이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리야.

황당한 표정을 짓는 나와는 달리, 성검의 눈은 진지했다. 나는 허리춤의 검자루로 향하는 성검의 손끝을 바라보며 몸을 흠칫 떨었다.

“내가 너를 한 번 베어보마.”

뭔가, 단단히 잘못 걸린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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