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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27화 (128/158)

Chapter 127 - 127. 도약과 준비 (4)

죽음을 실감했을 때가 언제였더라. 동굴 안에서 고립되어 처음으로 지성이 있는 마물과 마주했을 때? 처음으로 면류관의 시험을 받았을 때? 한계선을 돌파하고 거인과 마주했을 때? 그것도 아니라면, 안개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풍경을 맞이했을 때? 아니, 그때는 내 죽음을 떠올릴 겨를조차 없었지.

“긴장 풀어라. 정말로 죽는 것도 아니니까.”

지금, 나는 어느 때보다 죽음에 가깝다. 나는 무릎을 꿇고 정좌하고 있었고, 내 바로 앞에는 성검이 차분하게 검을 뽑아 들고 내 정수리에 날을 겨누고 있었다. 전혀 움직이지도 않는데, 살기를 발산하지도 않았는데, 저 날카로움이 내 골을 가르고 들어와 척수를 반으로 잘라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이런 방법을.”

“너도 알겠지만, 너는 무슨 일이든 겪어보고 나서야 크게 성장하더군. 제2 단계를 개방할 때도 말이다. 몸으로 부딪치며 헤쳐 나가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어.”

성검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그리 말했다. 도무지 사람을 베기 전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네게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원래 검술은 누군가에게 베여가며 성장하는 법이다. 나를 어떻게 베었는지, 살갗이 베일 때 얼마나 깊이 베였는지, 그때 몸을 베던 검의 감각은 어땠는지. 그를 떠올리며 제 검을 발전해나가는 거지.”

씁쓸한 말이었다. 그를 내뱉는 성검의 검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등골을 타고 서늘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러니까, 보고 있자면 그녀는 완벽하게 저 몸을 통제 아래에 두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생각을 해도, 말을 해도 그게 몸에 묻어나지 않는다. 몸은 그저 머리가 명령한 대로 움직이고 바뀌어 고정될 뿐이다.

“네게 그를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굳이 겪어야 한다면 내가 해주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했다. 여기서는 몸에 상처가 생기지도 않을 테니까.”

고개를 내젓는 성검. 그녀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좌우로 함께 흔들렸다. 그리고 성검은 검을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렸다. 저 움직임마저 검이 가는 길이었다. 나는 성검의 검끝을 따라 고개를 올리다가, 그녀의 붉은 눈과 마주쳤다. 눈은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피하지 마라, 일로이. 끝까지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 느끼는 거다.”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성검이 검을 그어 내렸다. 별을 베어버렸을 때는 그토록 느리다 느껴진 검격이, 순식간에 나를 가르고 지나갔다.

베인다는 기분은 이렇구나. 위에서 아래로. 양옆으로. 존재가 찢어지며 붕괴한다. 그 감각에 취하면 안 된다. 나는 희미해지려는 의식의 끝자락을 간신히 붙잡은 채 억지로 폐장에 숨을 불어 넣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연히 각인해야 했다.

그 검이 무슨 의지를 담고 있는지, 무얼 바라보고 있는지.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 검인지.

서걱.

무언가가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졌다. 추락하는 느낌도 없이, 나는 이미 의식의 밑바닥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쿨럭, 쿨럭!”

나는 바닥에 꼴사납게 고꾸라져 있었다. 입에서는 신물이 줄줄 새어 나오고, 왼손은 땅을 짚고, 오른손은 도움을 요청하듯 앞으로 쭉 뻗쳐 있었다. 베이지 않았다, 베이지 않았나? 전신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몸이 제대로 산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억지로 등을 뒤집으며 공기를 기도에 쑤셔 넣었다.

“어떠냐?”

성검은 내 앞에 앉아있었다. 나는 저 표정에 대답도 들려주지 못했다. 죽었다가 살아난 건가, 아니면 여기가 사후세계인 건가. 검이 날 베었다는 느낌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성검은 내가 몸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게 세상의 죽음이다. 너는 무엇을 느꼈느냐?”

나는 턱을 손등으로 훔치고는 성검과 마주 보고 주저앉았다.

“…내가 이걸 너무 얕보고 있었다는 생각.”

어째서 별이 베이는가. 나는 성검이 바닥에 꽂아놓은 검을 바라보았다. 오늘만큼 검날이 커 보인 적이 있었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별을 베는 게 어려운 일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

내 정수리에 성검의 손이 얹혔다. 나는 어깨를 움찔, 떨며 성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성검은 내가 개라도 되는 것처럼 머리를 마구 쓰다듬더니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해주었다. 이상하게 진정되는 손길이었다. 성검은 그리고서 내 양 뺨을 붙들었다.

“자, 일어서는 거다. 일로이. 검을 쥐고, 네가 가야 할 길을 가는 거다.”

나는 검을 쥐었다. 베였을 때의 감각이 뼛속 깊이 새겨졌다. 내가 그걸 잊어버릴 일은 없을 거다. 검. 내 몸에 새겨진 검. 검을 쥔 내 손이 후들거렸다. 무겁다. 그리고 차갑다. 땅에 끌리는 검끝과 자루에 전해지는 진동. 그 모든 감각이 익숙하지 않았다.

“검이 낯설어.”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네가 가야 할 길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성검은 내 엉거주춤한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몸에는 힘이 넘친다. 팔이 떨리는 건 순전히 내 마음의 문제. 곧이어 떨림은 멈추었다. 길이 언뜻 보인 듯하다. 그리로 걸어가야 한다.

“한 번에 다시 성공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백만 번을 해도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세상을 베는 거란 그런 거다.

성검은 그리 말하며 싱긋 웃었다.

“고민해라. 벽에 가로막혀도 끊임없이 부딪치고 밀어내라. 벽을 넘어설 수 없다면 좌절하지 말고 벽을 무너뜨려라. 시간이 많지 않지만, 너라면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허수아비가 생겨났다. 이번에는 그 우뚝 선 모형이 다르게 보였다. 베어야 한다는 강박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휘두르는 게 우선이다. 저걸 베는 건 확신이 생기고 난 뒤라도 충분하다.

“…그렇게 출발하려 하느냐.”

“응. 내 목표는 허수아비가 아니니까.”

성검의 얼굴 위에 띤 미소가 짙어졌다. 그녀는 대견하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올리다가, 제대로 팔이 닿지 않자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지금부터는 온전히 네 몫으로 두겠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너를 기다리는 것조차 방해될 거다. 저 허수아비를 베어도 좋다고 생각할 때. 그때가 되면 다시 너를 데리러 오마.”

성검의 목소리가 멀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던 그녀의 기척은 차츰 희미해지더니 떠나가는 뱃고동처럼 수평선을 타고 넘어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오롯이 혼자가 되었다. 정적만이 감도는 새하얀 심상 공간. 내 심장 뛰는 소리와 숨소리 외에는 그 무엇도 들려오지 않는다. 존재하는 건 나와 저 허수아비뿐이었다.

“널 베려는 게 아니야.”

무인도의 배구공을 말벗 삼던 아저씨처럼, 나는 허수아비에게 말을 걸었다. 검로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검끝은 무엇도 겨누지 않았다. 기수식을 취한 나는 숨을 쉬며 검을 들어 올리고, 숨을 뱉으면서 밀어 내렸다. 느릿한 검격은 무엇도 베지 않았다.

“좋아.”

그렇게, 아예 검을 처음 잡아본 사람처럼, 혹은 아주 오랜만에 검을 다시 잡아본 사람처럼, 나는 느릿느릿 동작을 이어갔다. 검은 무엇인가, 나는 왜 검을 휘두르는가.

“지금부터 다시 알아내면 돼.”

땀이 흘렀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린다. 한 번의 휘두름에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다. 한 번의 참격 이후로는 간격을 두었다. 검을 올리고, 내리고, 다시 생각한다. 생각이 끝나면 다시 검을 올린다. 그 반복이었다. 한 번 한 번의 휘두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변하지 않았다. 변해야 하는 건 검을 휘두르는 횟수가 아닌, 검을 휘두르는 자의 마음가짐이었으니까.

훅.

검날이 공기를 갈랐다. 그렇게, 나는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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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 좀 보실래요?”

습격 사건이 정리되고 용사가 홀연히 종적을 감춘 지 한 달. 책상 위로 보고서가 하나 얹혔다. 넬라는 보고서의 제목을 보고는 눈살을 확 찌푸렸다.

“‘북부 마물 동향’? 이런 보고서가 왜 여름이 다 돼서 올라온 거야?”

“여름에 올라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더라고요. 한 번 쭉 읽어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제 공동 연구가 그리 어색하지 않은 시점. 넬라는 다프네를 가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보고서를 향해 눈을 돌렸다. 그들이 앉아있는 곳은 마탑의 연구소가 아닌, 용사 파티의 본부의 한 빈방이었다. 넬라는 이곳이 여전히 진정되지 않는 듯했다. 제 발로 걸어 나간 곳을 제 발로 다시 방문하게 될 줄이야.

“괜히 불안한 소리 하지 마. 원래 때와 장소에 맞지 않는 사건이 제일 무서운 법이라고.”

넬라는 그리 대답하며 보고서를 펼쳐 들었다. 자잘한 설명이 적힌 서두는 넘긴다. 넬라가 가장 먼저 찾아본 건 마물 동향을 간략화해놓은 도표. 넬라의 눈이 빠르게 숫자와 그림을 읽어 내려갔다. 줄글로 된 추측은 넬라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숫자가 그 모든 걸 대변했다.

“…말이 안 되는데.”

그리고, 그 숫자가 들려주는 말이 넬라로 하여금 본문을 읽어보게 했다.

“예년과 비교해 여름에 출현하는 마물의 빈도가 이상해. 여름에는 사람과 잘 마주치지도 않는다는 녀석들이, 갑자기 왜 그렇게 많이 출현했대?”

“모르겠어요. 북부에 이상이라도 있는 건지, 기존 마물들의 서식지를 빼앗아 갈 만한 강력한 마물이라도 출현한 건지, 아니면 악신 숭배자들이 무슨 수작이라도 부린 건지.”

고개를 젓는 다프네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기존 마물들의 서식지를 빼앗는 마물이라고? 그 녀석들, 뭔가 강력한 개체가 나타나면 그 아래로 복속되잖아. 그럼 더 보이지 않아야 하는 거 아냐?”

“사람이 사는 쪽으로 보냈을 수도 있죠. 네임드 마물들은 언제나 호시탐탐 사람의 영역을 탐내니까요. 강력한 개체일수록 더더욱.”

넬라는 보고서를 덮으며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다프네의 표정은 좋다, 좋지 않다는 정도를 넘어 공포에 질린 사람처럼 창백해진 상태였다. 넬라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잘 아네. 마물이랑 많이 싸워봐서 그런가.”

“작년 여름이 딱 그랬거든요. 갑자기 늘어난 출현 빈도. 훨씬 흉포해진 성격. 묘하게 체계성이 느껴지는 움직임까지.”

가만, 작년 여름이라면.

넬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다프네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다프네는 넬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 거인이 북부에서 깨어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에요.”

“악신 숭배자들이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은? 아예 배제할 수 없는 건 아니지 않아?”

다프네는 그 질문에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가능성이 작아요. 마탑을 습격하고, 왕국 깊숙이 침투해 여기저기 종말 숭배를 퍼뜨리는 것 이상 가는 규모의 무언가를 저지를 수 있다면…, 애초에 숨어서 활동할 필요가 없는 거잖아요.”

“…나도 알고 있다고. 괜시리 찜찜해서 그랬을 뿐이야. 차라리 악신 숭배자들이 무언가 꾸미고 있는 편이 훨씬 대처하기가 쉬웠을 거라고.”

넬라가 입을 비죽였다. 상상하기 싫었다. 재앙과 비슷한 정도의 위협이 하나 더 존재하는 것보다 기존에 존재하던 이들이 생각보다 강했다고 상정하는 편이 편하니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최악의 사태라고 가정하고 움직여야 해요. 용사 파티니까.”

“그…, 나는 파티 탈퇴했거든. 멋대로 너희 파티에 나를 자꾸 끼워 넣지 말아줄래.”

다프네는 넬라의 투정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넬라는 그녀의 말이 가볍게 묵살되고 있음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정말로 그렇게 되면 안 되는데, 기분이 더럽지 않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이 녀석들이랑 점점 친해지는 거야, 뭐야.

“뭐, 아무튼 저런 보고서까지 일일이 신경을 쓸 필요는 없잖아. 북부대공이 건재하니, 북부의 일은 알아서 잘 해결되겠지. 우리는 마법의 완성에만 힘을 쏟으면 돼.”

“그렇긴 하지만요….”

다프네는 여전히 불안한 듯했다. 북부에서 도대체 무엇을 보고 돌아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넬라는 다프네의 불안감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나의 재앙이 몰고 오는 마물 떼는 말 그대로 바다를 메울 정도였으니까.

“동향을 주시하기만 하자. 일단 보고서는 다른 곳에 치워둘게.”

그때, 임시 연구실의 문이 열리며 마리안느가 들어왔다.

“마법사들이 이걸 전달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간단하게 용건만 말한 마리안느가, 다프네의 손에 서류 더미를 들려주었다. 한숨을 내쉬며 서류철을 개봉한 다프네의 표정이 쩌적, 소리를 내듯 굳어버렸다. 석상이 되어버린 다프네를 바라보며, 넬라가 불안한 목소리로 채근했다.

“뭐야, 무슨 일인데.”

다프네의 손에서 서류를 낚아챈 넬라가 똑같은 표정으로 굳어져 버렸다. 실룩거리는 입꼬리는, 긍정이라기보다는 황당함에 가까운 기색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남부 마물 동향’

‘서부 마물 동향’

‘동부 국경 지대 마물 동향’

‘왕도 마물 동향’

쏟아지는 자료들은, 하나같이 마물의 동향을 읊어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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