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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29화 (130/158)

Chapter 129 - 129. 지렁이도 안 밟았는데, 뱀이 꿈틀거린다 (2)

에버노드의 풍경은 파블로가 기억하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축제를 준비하던 주민들은 간판을 내리고 물자를 이송하고 있었다. 북부의 명마들을 군대로 보내는 주인의 표정은 비장했다. 대장간은 끊임없이 돌아가며 북부의 단단한 철을 녹이고 두드렸다. 화살촉, 창날, 칼날, 갑옷과 투구가 만들어지고 또 날라졌다.

“…이게, 에버노드군요. 지난번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인데요.”

“북부는 한 번 전쟁 준비를 시작하면 이 왕국의 어디보다도 확실하게 채비를 갖추는 곳입니다. 이 성뿐만이 아닌, 북부의 얼어붙은 땅이 하나 되어 적을 격멸하기 위해 움직이죠.”

성 바깥에서는 북부 인근 소도시와의 연락망과 보급망이 구축되고 있었다. 물자가 오고 가고, 인마가 오고 갔다. 굳센 표정으로 에버노드의 성문을 통과하는 젊은이들은 피난민이라기보다는 예비 훈련병의 그것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에버노드 시내의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한 자원입대 창구였다.

“병사를 모으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어 보이는군요.”

자원입대 창구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인파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병사들은 입대하기 지나치게 어린 사람들을 골라내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다른 지원 업무를 소개했다.

“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본격적인 전투가 일어나기 전까지 저들을 얼마나 단련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죠. 에버노드의 성채가 저들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거지, 저들이 에버노드의 성채를 지키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니까요.”

썩 달갑지만은 않다는 듯 이야기하는 루크의 표정은 말과는 상반되게 뿌듯해 보였다. 북부의 열기는 기이했다. 척박한 땅이지만, 사람들은 이 땅을 사랑했다. 그 열기는 겨울의 들불처럼 바람을 타고 파블로의 마음에도 번져오는 듯했다. 파블로는 그때 들이마시던 차가운 공기를 기억했다. 코를 타고 올라오던 마물의 악취를 기억했다.

“지난번, 거인과의 전투는 에버노드에 더없는 영광이었지만, 동시에 굴욕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오만함을 깨우쳐주는 일이기도 했고요. 북부는 더 방심하지 않을 겁니다.”

자부심과 후회. 그러고 보니 지난 전투 때 루크는 피난민을 인솔하는 역할을 맡았던가. 이번만큼은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에버노드에 승리를!”

“그래. 수고가 많다.”

병사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돌아오는 루크를 향해 경례했다. 루크는 고갯짓 한 번으로 그들의 경례를 받아준 후 곧장 성주 – 퀘노어 대공이 기다리고 있을 사령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루크의 손에는 지난 전투에서 쓰러트린 마물의 수급이 들려 있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때보다 강하니까요.”

벌컥.

루크가 사령부의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파블로는 문을 열자마자 그를 엄습하는 거대한 한기를 느끼고는 몸을 흠칫 떨었다. 강하다. 처음 그를 마주했을 때보다도 훨씬. 겨울이 벼려낸 칼날이 파블로의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보고드립니다. 중간 규모의 마물 무리를 격멸했지만, 개중 지성이 있는 마물은 없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수급은 널리 보여주고 사기를 진작할 수 있도록 해라.”

“분부대로.”

그리고, 칼날의 시선은 파블로를 향했다.

“멀리서 귀한 손님이 왔군.”

그 목소리는 진심으로 반가움을 표하고 있었다. 경외와 그리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것을, 파블로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북부대공, 퀘노어 스트로프는 만면에 사나운 미소를 띠고 파블로를 마주하기 위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걸음걸이는 거인에 못지않은 기세를 품었고, 목소리는 북풍마저 잠재울 위엄을 지녔다.

“내가 자네들은 언제든지 북부에 놀러 와도 좋다고 했건만, 1년이 다 돼서 얼굴을 비추나.”

“죄송합니다. 전투의 공이 적어 함부로 잘난 체할 수 없었습니다.”

“놀러오는 걸 누가 잘난 척이라 생각하겠나. 자네들은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네.”

섭섭하다는 듯한 말이었지만, 목소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파블로는 저도 웃음을 띠고는 퀘노어가 내미는 손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북부대공의 손아귀에서는 산맥이 느껴졌다.

“어떻게, 그간 잘 지내고 있었나?”

“좀 평화로워지나 했는데, 아무래도 세상이 쉴 틈을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농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파블로는 북부대공과 의논해야 할 사안을 떠올리며 얼굴을 굳혔다. 대공은 반면, 얼굴에서 그 미소를 지우지 않고 의자를 가리키며 파블로에게 앉기를 권했다. 파블로는 저 여유로운 태도가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구태여 묻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강함. 일개 평기사인 파블로조차 알 수 있을 정도로 대공은 눈에 띄게 강해져 있었다.

“일단 앉지 않겠나? 루크와 함께 사정을 들어보고, 무엇이 필요한지도 이야기를 나눠보지.”

파블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속의 서지를 펼쳐 들었다. 왕도와 왕실의 근황, 전시 태세 대비, 마물의 움직임, 그리고 용사의 동태가 소상히 적혀 있었다. 파블로의 설명과 함께, 서지를 읽어가는 퀘노어 대공의 눈썹이 서서히 내려가며 제 모양을 찾아갔다.

“…그래.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이 되었군. 폐하께서도 정말 골치가 아프시겠어. 선왕때는 물론, 왕국 역사를 통틀어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야.”

퀘노어 대공이 고개를 내저으며 파블로에게 서지를 돌려주었다. 파블로는 새로운 종이와 펜을 꺼내 들며 보고서의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북부는 어떻습니까?”

“보는 그대로일세. 다가올 전쟁을 전력으로 준비하고 있지. 거인과의 전쟁 때보다도 훨씬 밀도 있게 말이야. 한 번 홍역을 치렀으니, 주변 도시와 주민들의 협조도 훨씬 수월하네.”

“수성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군요.”

에버노드의 힘은 성을 중심으로 싸매고 돌지 않았고, 널리 확장하며 기세등등했다. 퀘노어 대공도 그를 딱히 부정하려는 기색은 아니었다.

“수성을 거듭하면 결국 얻을 수 있는 게 없어. 수성 중 마물과 공멸하면 승리하는 건 마물이다. 막아내도 피해가 막심하다면 패배한 것과 진배없지.”

씁쓸한 말이었다. 마물은 죽어도 되지만, 인간은 죽으면 안 되었다. 성이 무너져서도 안 되었고, 다쳐서도 안 된다. 땅이 불타도 마물은 살아갈 수 있지만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그러니, 먼저 사냥에 나선다. 거인을 등에 업고 있는 것도 아니니.”

퀘노어 대공의 말은 기세가 되어 공간을 가득 메웠다.

“아니, 설령 거인을 등에 업고 있다고 해도….”

허언이 아니었다. 퀘노어 대공은 진심으로 거인을 맞이해 상대해도 상관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파블로는 대공의 푸른 눈 속에서 일렁이는 거대한 바다를 마주했다. 마력은 그의 바다에서 넘실대는 파도가 되어 무엇이든 삼켜버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대체 얼마나 강해지신 겁니까?”

“부족하다만. 일로이 덕분에 새로운 경지로 나아갈 단서를 얻었다네. 나는 그가 새겨놓은 이정표를 따라갈 뿐인 후발 주자야.”

너털웃음과 함께, 대공은 그리 말했다. 과거를 응시하는 시선. 그의 기억은 거인을 마주할 때를 생생하게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기억은 이내 녹아내려 마력이 된다. 응축된 마력이 새하얀 서리가 되어 대공의 주먹에 맺혔다. 대공은 이내 새어 나온 마나를 훌훌 털어내고는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었다.

“…그래, 일로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태인가?”

파블로는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씀밖에는 드릴 게 없습니다. 모든 정보가 접근 제한 상태라, 용사님이 의식불명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얼마 없을 겁니다.”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라….”

퀘노어 대공은 깊은 생각에 빠진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대공은 말없이 책상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대공의 푸른 눈에 안광이 서리는 것 같았다.

“그래. 중요한 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느냐가 아니지. 중요한 건 용사 일로이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동안 우리는 세상이 마물의 파도에 삼켜지지 않도록 막아내야 한다는 것이겠군.”

그리고, 대공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고민할 게 어디 있나. 일로이가 깨어나기도 전에 모든 걸 해치워놓겠다.”

그 선언은, 자신감과 의무감이 뒤섞인 색을 띠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일로이가 우리를 지켜주었지.”

전의가 불타오른다. 파블로는 대공의 눈을 마주하고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이젠 에버노드가 그를 지켜줄 차례가 되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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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오신다.

고개를 들며, ‘그것’은 생각했다. 한껏 밤이슬과 숨을 들이마시는 ‘그것’은, 거대한 사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갈기를 좌우로 떨치며 일어난 사자의 입가에서 연기가 빠져나왔다. 밤은 사자의 모습을 감추지 못하였다. 사자의 기상은 들의 기상이었다. 소리도 기척도 없이, 사자는 달리기 시작했다.

빛을 타고, 문을 열기 위해 내려오실 거다.

사자의 입에서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났다. 질주하는 발에 들풀이 고개를 숙였다. 힘줄과 핏줄이 사자의 목과 가슴에 돋아났다. 구름이 짙어 하늘에 달은 돋지 않았다. 늑대가 조용하고 곰이 몸을 웅크린 밤이었다. 사자는 끝없는 남쪽의 벌판을 달려 나갔다. 무리 없이 오롯한 사자의 갈기는 끝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때가 왔다. 때가 왔다.

피가 속삭이고 있었다. 심장으로 들어가는 피와 빠져나가는 피가 바다의 밀물과 썰물처럼 교차했다. 뛰는 맥마다 피가 쏠려서 터져 나갈 것 같았다. 포효는 이성과 본능의 영역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좁은 동굴을 폭풍이 관통하듯, 사자의 전신을 떨리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깨어나라, 깨어나라.

들판의 한가운데에서 사자는 외우주를 향해 길고 깊은 포효를 내질렀다. 그 표효에 지진이 이는 듯했다. 거인이 죽은 이상, 사자의 부름은 절대적이다. 마물들이 어슬렁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자는 고개를 쳐들었다. 밤이 안개가 되어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오시나이까, 정녕 오시나이까.

사자의 금빛 눈에 밤하늘이 담겼다. 사자의 시선은, 마력은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서히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혜성을. 그리고 혜성이 몰고 올 여파를.

기쁘게 맞이하겠습니다. 누구도 그 앞길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남부의 마물들이 벌판에 집결하고 있었다. 그들이 쌓은 세월은, 사자에게 있어서는 찰나라고도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마물들은 그들을 불러모은 사자를 바라보았다. 사자는 고고히 그곳에 서서 모여드는 마물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장 선두에 선 마물이 가장 강한 마물이었다. 선두의 마물이 머리를 숙이자, 뒤편의 마물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사자는 그들에게 단 한 번의 눈길만을 주고서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무리 사이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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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과의 충돌까지 14일. 세상이 조만간 맞이할 폭풍 전의 침묵에 잠겨있을 때,

사상 최대 규모의 마물 이동이 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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