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0 - 130. 지렁이도 안 밟았는데, 뱀이 꿈틀거린다 (3)
비가 내린 다음 날의 하늘에 깃털 구름이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봄과 여름의 경계에서 가까워지는 태양은 땅을 달구었지만, 사람들은 묘한 서늘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이 담고 있는 냄새에 가축이 떨고 있었다. 개는 꼬리를 말고 숨었고, 수탉은 아침이 되어도 울지 않았다.
걱정스럽게 창밖을 바라보는 다프네의 귓가에 반쯤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밤샘 삼 일 차. 넬라의 눈가가 움푹 파여 시커먼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넬라가 안고 있는 종이 더미는 밤샘의 증거였다. 복잡한 계산식과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들이 넬라의 얼굴처럼 창백하게 부들거리고 있었다.
“문제는 그거지, 조금이라도 오차가 생긴다면 전부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린다는 사실.”
팔락거리며 종이 몇 장이 땅으로 떨어졌지만, 넬라는 본 체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주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금은 애써 무시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말도 안 되게 큰 규모의 마법을, 더 말도 안 되게 정확한 계산으로 맞춰 전개해야 한다는 거야. 주어진 기회는 딱 한 번인데다가, 마력의 공급 또한 아슬아슬하기가 그지없지.”
넬라는 신경질적으로 서류 더미를 내려놓고 커피잔을 집었다. 새카맣게 어른거리는 수면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넬라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심지어 연습해볼 기회조차 없어. 마법 가동의 준비만 해도 삼일 이상 걸려. 그 와중에….”
넬라는 커피를 확 들이켰다. 쓰디쓴 맛이 넬라의 혀를 타고 식도로 주르륵 내려갔다. 넬라는 마치 중독자처럼 길고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갔다.
“마물은 또 짜증 나게 어슬렁대고 있고. 이게 무슨 일이야? 원래 재앙과 이런 싸움을 벌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하나에만 집중하면 됐다고.”
“그러게요. 이번에는 아무래도 정말 인류를 멸망시키려고 작정했나 본데요.”
가득 불만이 담긴 넬라의 말과는 반대로, 다프네는 심드렁했다. 그게 애써 속마음을 숨기는 모습이라는 걸 넬라는 이제 알 것 같았다.
“일로이를 이제 슬슬 찾아가 봐야 하는 거 아냐?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다가 감당할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잖아. 마물이 언제 덮쳐올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혜성에 대한 대비책을 완벽하게 구비한 것도 아닌데.”
그 정도는 이해해주지 않겠냐고, 넬라는 열심히 다프네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다. 다프네는 늘 그렇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넬라의 제안을 기각했다.
“아뇨. 당장 상황이 발생한 것도 아닌데. 끝까지 기다려봐야죠.”
“저번에도 그 대답이었잖아.”
“잘됐네요. 앞으로도 그 대답일 테니까. 그걸 기억하고 있다면 더는 질문할 필요가 없겠죠.”
그리 말하는 다프네는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햇살이 쏟아지는 가운데, 길가에는 사람이 평소보다 적었다. 길가를 순찰하는 위병의 발걸음은 뻣뻣했다.
“…왜 그렇게 사람이 안 보이나 했더니, 모험가들이 없구나.”
넬라가 다프네의 옆에서 창밖을 함께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다프네는 그 말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왕도의 출입은 극소수의 경우가 아니면 엄격하게 통제되기 시작했다. 마물의 움직임이 이상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험가들은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수긍했다.
자신감이 지나쳐 만용이 된 이들은 성 밖으로 나섰다가 불귀의 객이 되었다. 시체는 수습하지도 못했다. 그들을 찾으려다 수색대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으니까. 규제를 어긴 모험가들의 죽음은 확인되지 않은 채 영원한 실종자로 분류되어 언제 시행될지 모를 수색의 명단에 올랐다.
“…일주일에 한 번 있다는 정기 후송을 제외한 모든 출입이 금지되었다고 하죠? 모험가들에게 반발이 심하겠더라고요. 일자리가 갑자기 사라지는 셈이니.”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극소수는 아니라 반발하겠지만, 결국 원리는 같았다. 당장 내일 먹을 밥을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인 모험가들은 왕실의 선택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몇몇 이들은 그대로 뒷골목으로 굴러 들어가는가 하면, 대놓고 범법을 저지르다가 위병에게 연행되어 지하 감옥으로 사라진 이들도 많았다.
“정기 후송의 호위 인원을 대거 모험가로 발탁했다고는 해도, 자격 요건을 갖춘 이들만 내보내 주니까 말이지. 남은 모험가들은 그냥 남겨지는 거지. 뭐, 임시 수비대를 꾸린다며 모험가들을 채용하고 있다고는 하더라. 그건 자격조건이 없지만, 당장 얼마나 참여할지.”
“불안하네요. 여러모로.”
골목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요즘 따라 자주 나는 소리였다. 넬라는 흘금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눈을 굴렸다가, 원래대로 되돌렸다. 보나마나 또 누가 물건을 훔치다가 걸렸거나, 예민한 모험가 둘이서 싸움이 붙은 것이겠지.
“밀항도 많고. 요새는 왕도에도 가끔 종말을 맞이하라며 길거리로 뛰쳐나오는 이들이 있는 모양이야. 용사마저 없으니 아주 신났지.”
물론, 그렇게 종말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다음날이 되면 증발하듯 사라졌다. 갑자기 어디선가 검은 옷을 차려입은 이들이 나타나 끌고 가버렸다는 소문만이 무성했다.
“덕분에 이단심문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왕도에 그리 많은 종말 숭배자들이 숨어있는 줄 누가 알았겠어.”
가만, 그럼 지금 속속들이 검거되는 악신 숭배자나 종말 숭배자들을 끌어낸 건 가까이 다가오는 재앙의 존재와 용사의 부재였다. 설마, 일로이가 그런 것까지 의도하고 잠적했을 리가. 넬라는 팔에 오소소 올라오는 닭살을 손톱으로 긁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게오르그랑 마리안느는 며칠째 여기로 돌아오지를 않네.”
“수비 강화에 전력을 쏟아붓고 있을 때니까요.”
뻘쭘한 침묵이 이어졌다. 잡담을 끝낸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종이를 집어 들었다. 사각거리며, 수식 위로 새로운 수식을 써 내려가는 소리가 공간을 메우는 유일한 소리였다.
“그런데 그 대형 결계로 혜성을 격리하고 나서는 어떻게 되는 거지? 뭐, 결계가 유지되는 한 혜성이 갑자기 결계 밖으로 튀어나와 땅에 충돌할 일은 없긴 하겠지만, 그 마력을 충당하려면 하루에 3서클짜리 마법사 열 명은 죽어야 할걸.”
넬라는 손가락을 모두 펼쳐 보였다. 물론 마법은 발동하는 것보다는 유지하는 데 드는 마력이 훨씬 적긴 하지만, 초대형 결계쯤 되면 유지하는 데에 드는 마력량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혜성을 격리한 후에 파괴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푸핫. 뭐, 그걸 가루로 만들어버리면 되겠지. 그런데 그럴 수 있었다면 애초에 결계가 필요가 없었을 거 아냐. 날아오는 혜성을 격추해버리면 그만인걸.”
넬라는 너털웃음을 내뱉었고, 다프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라우라…, 탑주쯤 되는 마력량을 가진 사람이 결계에 붙어 온종일 마나를 흘려보내든가. 한순간이라도 공급이 끊기면 세상은 그대로 쾅. 멸망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혜성을 격리한다고 해도 해결할 방법이 없어.”
뭐, 결과적으로 결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지만, 이 세상이 망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넬라는 그리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 방법도 있겠네요.”
그리고, 의외로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다프네. 넬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프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프네의 보랏빛 눈이 의지에 불타고 있었다. 불길하기 그지없는, 의지의 표명. 넬라는 유심히 다프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펜을 내려놓았다.
“야, 너 지금 설마….”
우당탕.
그때, 느닷없는 굉음과 함께 무너지듯 연구실의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고, 문가에는 땀 범벅이 된 병사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큰일이 났습니다. 두 분 모두 성벽으로 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프네와 넬라가 잠시 시선을 교환했고, 두 마법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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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상상은 끔찍하면서도 생경한 광경으로 나를 이끌었다.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격리 수용소처럼 새하얗게 도배된 하늘과 땅뿐이라 상상은 더욱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아무것도 없는 땅 위로 무너진 성터와 도시가 떠올랐고, 사람의 시체와 마물의 사체가 흩뿌려진 물감처럼 잔해 위에 얼룩을 남겼다. 나는 싸늘하게 식은 손을 잡는 상상을 떠올렸다. 감각 없는 손가락은 내 손안에서 후두둑 무너져내렸다.
“….”
망상은 번지면 번졌지,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풍경이 그곳에 머무르도록 두었다. 처음 그것이 눈앞에 어른거렸을 때는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잔해 사이로 언뜻 보이는 익숙한 팔과 얼굴이 자꾸만 내 어깨를 잡아 멈춰 세웠다. 돌아오라고, 그들의 목소리가 애원했다. 그때마다 심상세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유혹을 나는 참았다.
“난 너희를 믿어.”
그러니, 믿어야 했다. 저들이 나 없이도 잘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안개 때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거라고. 나를 부르지 않는 게 정말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서 부르지 않는 거라고.
“그리고, 내가 너희의 믿음에 부응하겠다.”
저걸 지우려 애를 쓰는 게 아니라, 망상을 원동력 삼아 한 번이라도 더 검을 휘둘러야 했다. 몸은 꼴사납게 비척거리고 있었다. 터지고 찢어진 손바닥의 살 사이로 검의 감촉을 느꼈다. 가죽이 쓸리며 화끈거리는 아픔이 찾아왔다. 나는 육신의 고통을 거부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부하와 통증 속에서 망상이 아닌 생각과 통찰은 더욱 예리해진다.
훅.
검을 휘둘렀다. 신기루는 잠시 흩어지다가 다시 모여들었다. 검을 휘두르는 건 일정한 속도와 리듬에 머무르고 있었다. 참격 한 번 한 번에 모두 다른 생각을 담고 있었다. 무작정 만 번 내려치는 것보다, 제대로 된 사고 과정을 거친 한 번의 참격이 훨씬 나았다. 생각 없이 휘둘러지는 만 번의 검격은 만 번의 검격이 아닌 만 번의 팔 운동에 불과했다.
습관.
나는 검을 휘두르며 내 몸에 배어있던 ‘일로이’의 습관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재정립하기 시작했다. 디딤발의 힘이 제대로 굳지 못한 점, 어깨가 열리고 닫힐 때의 타이밍. 몸과 검의 소통과 일체. 검을 쥘 때 손목에 힘을 제대로 빼고 있는지. 몸의 가능성, 유연성은 열려있는지. 그러면서도 검을 내리칠 때, 변하지 않는 궤도를 그리는지.
“…다시.”
조정했다. 가장 처음부터 몸을 뜯어고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해야 옳다고 믿는 대로 자세를 바꾸었다. 그렇게 미세하게 바꾼 자세가 몸에 익을 때까지 검을 휘둘렀다. 수정, 또 수정. 하나의 목적을 위해 검을 휘두름에 몸이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나의 참격에 검의 움직임만이 오롯하게 느껴지도록. 나는 검을 휘둘렀다.
“이제 안 되겠어.”
육체가 한계에 이르렀다고 느껴지면 검을 땅에 꽂아 넣었다. 아마 어깨 관절이 나갔을 거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심상 공간은 내 육체를 치유해주었다. 부하가 사라지는 동안에도 사고는 멈추지 않았다. 무엇을, 대체 어떻게 해야 별을 벨 수 있을까.
“…?”
그러다, 내 시선이 문득 땅에 꽂아 넣은 검에 가 닿았다. 한참을 검을 응시하던 나는, 홀린 듯 검을 뽑아 들고 다시 허공을 겨누었다.
“…그래. 그것마저 과정이었구나.”
나는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뭔가 여태 해왔던 모든 짓거리가 바보 같아졌다. 나는 그때 성검의 검에서 느꼈던 감각을 떠올렸다. 지극히 순수하고, 지극히 단순하지만 실로 섬뜩한 것. 나는 칼날에다가 손을 가져다 대었다. 내 손가락 끝이 칼끝과 만나 베였다. 피가 검날을 따라 흘러내렸고, 나는 새빨간 핏방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허수아비를 베든, 별을 베든 똑같은 것이었어.”
검을 잡았다. 피로 엉망이 된 손이 검자루를 쥐고, 뽑아 올렸다. 오른손에 들린 검의 무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아주 오랜만에 등을 돌렸다.
그곳에 허수아비가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