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1 - 131. 믿음, 기대, 그리고… (1)
왕도는 수성전을 하기에 용이한 구조다. 적어도 사람을 상대할 때는 그렇다.
왕도는 분지다. 험준한 산에 둘러싸인 왕도로 출입하는 길은 오로지 대륙을 관통해 흐르는 강물의 물줄기를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산을 넘어서 진군할 방법은 많지 않았고, 설령 넘어온다고 하더라도 왕도의 정예병들에게 녹초가 된 군세를 쓰러트리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산을 넘어올 겁니다.”
“산을 넘어오겠지. 바다도 건너올 거고. 강과 호수는 메우고 숲은 평평하게 만들어버릴 거다.”
이게 상대가 마물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산은 적이 몸을 숨길 수 있는 진지로 바뀌고, 성을 내려다보며 입맛을 다실 망루이자 탑이 된다. 게오르그는 왕도의 지도를 바라보며 고심했다. 적은 평지에서나 다름없이 사방에서 짓이겨 들어올 거다. 대륙의 다른 지역에서 각기 발원한 수만 마리의 마물들이, 경로의 성과 마을을 짓밟고 올 거라는 말이다.
“병력 배치도입니다.”
게오르그가 생각에 매듭을 지을 틈도 없이, 부관은 새로운 종이를 내밀었다. 분지에 이어 둥그렇게 도시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성벽. 게오르그는 그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북부에서 수성전을 벌일 때도 힘겨웠는데, 하물며 이런 구조는 어떨까.
“힘겨운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놈들이 성벽을 공략하는 방식은 아마 단장님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사다리도, 공성추도 없이 그냥 벽에 머리를 들이받는다면서요. 그렇게 시체가 쌓이기 시작하면 우리로서는 대처할 방법이 없습니다. 한 마리라도 성벽을 넘어 일반인들이 있는 왕도로 진입한다면? 그 뒤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요.”
침착하게 하나씩 설명하는 말과 절망스러운 표정은 같은 사람의 그것이라 생각하기 힘들었다. 게오르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관의 설명을 끝까지 들었다.
“사방에서 마물이 몰려오는 실정이라 사람들을 어디로 대피시킬 수도 없습니다. 밖으로 내보내면 일주일도 안 돼서 모두 죽을 겁니다. 호위를 포함해서 말이죠.”
“탑주가 방어전을 도와줄 거다. 다른 마법사들은 마력을 아껴야 하겠지만, 그녀만큼은 다르니까. 6서클 마법사, 다프네도 있어. 방어전 자체는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여왕의 결단은 과감했다. 왕도 인근의 모든 소도시에 도시를 완전히 비우라 명했다. 짐을 싸든 주민들을 왕도로 불러 모은 후, 임시 수용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소도시의 병력은 자연스럽게 왕도의 병력에 흡수되었다.
“선택과 집중이었죠. 지방 모든 소도시에 인근 대도시로 주민과 병사, 물자를 옮기라는 명령.”
그리한다면 한결 방어하기가 수월해질 거다. 소도시의 건물은 무너지고, 땅은 초토화될 테지만, 사람은 지킬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성벽이 뚫려버린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어버리는 거 아닙니까. 다 죽어버릴 텐데. 그렇지 않습니까, 단장님?”
“그렇게 따지자면, 마물을 다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혜성을 막는 데 실패하면 다 죽어버리는 건 마찬가지다. 우리는 당면한 일만 생각하면 돼.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은 생각하지 마라.”
핀잔을 주려 한 말이었지만, 부관의 표정은 더욱 침울해졌다. 몰려오는 마물을 생각한다고 혜성은 까마득히 잊고 있던 모양이었다. 게오르그는 괜히 일러줬나,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표정 펴라. 차라리 살기 그득한 표정이라도 지어봐라. 지금 그렇게 전장에 나섰다가는 마물 얼굴도 마주하기 전에 죽어버릴 테니까.”
“하지만…. 불안한 걸 어떡하겠습니까. 솔직히, 아직 죽고 싶지 않습니다.”
너스레가 아닌 진심이었다. 부관은 꽤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있었다. 게오르그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저리 솔직하게 말하는 게 다행이라 봐야 하나.
“원하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내가 네게 그걸 종용하지는 않을 거야. 한 사람이라도 아쉬운 상황이니까 말이다. 오고 싶지 않다면 네가 말해.”
공포에 떠는 자를 위한 배려는 없었다. 이런 때에 일로이라면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게오르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부관은 입을 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렇게 결단력이 없었다.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면 앞에 나가서 싸워라. 막아도 죽고 안 막아도 죽을 거 아니냐.”
“…네. 적어도 죽을 때 떳떳하게 죽는다면 후회는 안 남겠네요.”
부관은 씁쓸하게 말하고는 방을 나섰다. 게오르그는 텁텁한 입안을 다시고 병력 배치도를 바라보았다. 눈에 글자와 숫자가 마구잡이로 엉킨 채로 풀리지 않았다. 게오르그는 억지로 눈을 부릅뜨고는 머릿속에 정보를 쑤셔 박았다. 북부의 전쟁 때와는 느낌이 너무나 달랐다. 재앙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매번 새로운 절망감을 가져다줄 뿐이었다.
“나는 약하군.”
게오르그는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강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굳건하게 버티는 건 일로이보다도, 이 왕국의 누구보다도 잘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무게를 부담할 사람이 줄어드니, 게오르그는 새삼 그들이 짊어지고 있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깨달았다.
“책임감은 무슨 책임감이며 기사도는 무슨 기사도냐.”
게오르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날은 맑다. 시야가 탁 트였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겠다. 마물이 더 잘 보일 테니 불행일까. 사령부는 부산스러웠다. 오늘은 아마 여왕이 직접 와서 시찰할 거다. 그리고 여왕은 오늘부터 계속 사령부에 머무르며 다가올 전쟁을 생각할 거다.
허리에 검을 차고 뛰어다니는 기사들은 창백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의 생각이 난잡한 소음이 되어 소용돌이쳤다.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를 피해, 게오르그는 사령부의 밖으로 나섰다. 얼굴에 훈풍이 스쳤다. 훈풍은 어떤 냄새도 품고 있지 않았다.
여름이 온다. 시체는 더 빨리 썩을 테고 도시 위생은 관리하기 더 힘들어질 거다. 썩은 시체는 역병을 부른다. 역병이 돌기 시작하면 마물이 성벽을 넘어온 것과 진배없는 피해를 불러올 거다. 죽은 이들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성벽 밖으로 던져질 거고, 역병과 함께 불타 사라질 거다. 게오르그는 죽어 성벽 밖으로 던져질 제 몸뚱아리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게오르그!”
그러다가, 게오르그는 그를 부르는 가냘픈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곳에 있어도 될 목소리는 아니었다. 목소리는 계속 그의 이름을 부르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금발의, 조막만한 얼굴에 주근깨가 도드라진, 키가 작은 여인. 게오르그는 허름한 차림의 제 약혼녀를 보고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카밀라.”
카밀라는 달려가 게오르그를 껴안았다. 갑옷이 삐그덕, 절그럭거렸다. 카밀라는 게오르그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음에도, 게오르그는 그녀의 무게를 거의 느낄 수도 없었다. 카밀라는 제 어깨에 와닿는 게오르그의 손길을 느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들었어요. 곧 싸움이 시작된다면서요.”
울먹이다 못해 흐느낌에 가까운 소리. 게오르그는 안쓰럽다는 눈길로 카밀라를 바라보았다. 게오르그는 전장에 있고 카밀라는 성안에 있겠지만 안전하지 못한 건 카밀라였다. 그를 알고 있긴 한지, 약혼녀는 오직 게오르그만을 걱정하고 있었다.
“난 괜찮을 거다. 이미 몇 번이나 무사히 전투에서 돌아왔잖아.”
전쟁은 경험자와 비경험자를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당장 내일 전투가 벌어지고, 그는 죽어 성벽 밖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당신이야말로 돌아가 있어. 나보다는 당신이 더 걱정이야.”
사병은 회수되었다. 귀족도 징집 대상이었다. 카밀라의 곁을 지키는 건 늙어 은퇴한, 기사 출신의 집사뿐이었다.
“따라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돌아올 거야. 이번에도 이기고 무사히 돌아올 거야. 맹세할게.”
단순히 카밀라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거짓 맹세라도 무사히 돌아오면 맹세를 이룬 셈이었고 진실한 맹세라도 무사히 돌아오지 못한다면 거짓말을 하고 맹세를 어긴 셈이었으니까. 게오르그는 약혼녀를 한층 더 강하게 껴안으며 속삭였다.
“믿어줘.”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믿음이었다. 카밀라가 알겠다고 대답을 들려줘야만 게오르그는 제대로 싸울 수 있을 테고, 그 사실을 카밀라가 모르는 바 아니었다. 카밀라는 게오르그의 말에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이번에는 느낌이 다르단 말이에요.”
투정이었지만, 게오르그는 느낌이 다르다는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우리가 패배하고 분지라는 이름의 구덩이는 공동묘지가 되리라고, 용사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돌아오더라도, 아무리 그라도 이번에는 정말 해결하기가 힘들 거라고.
그때,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두 사람의 침묵을 깨트렸다.
“단장님, 사령관님께서 찾으십니다.”
카밀라는 게오르그에게서 슬쩍 멀어졌다. 답답함에 게오르그를 찾아온 카밀라였지만, 그 답답함 위로 무게추가 하나 더 올라간 듯했다. 게오르그는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카밀라를 바라보았다. 그가 듣고 싶은 대답은 아직 들려오지 않았다.
“…믿을게요.”
어렵사리, 약혼녀는 입을 열었다.
“그러니 꼭 무사히 돌아오세요.”
게오르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렸다. 기사는 미안하다는 듯 게오르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거목의 뿌리를 뽑아내듯, 게오르그는 아주 힘겹게 발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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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을 이 전투에서 소모할 수는 없어.”
넬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 전투에서 마법사의 배치와 관리를 일임받은 건 라우라와 넬라, 다프네. 세 사람이었다. 라우라는 군의 상부와 입씨름을 벌이기 위해 성벽에 가 있었고, 실질적으로 마법사들을 관리하는 건 남은 두 사람이었다.
“사령부에서 요구하는 만큼의 마법사를 이번 전투에 투입한다면, 혜성은 절대 막을 수 없을 거야. 마력은 회복되지만 죽은 사람은 되살릴 수 없으니까.”
마법사는 죽어서는 안 된다. 넬라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냉정하지만 옳은 말이었다. 선택을 강요받는 게 아니라, 이미 결론이 나온 문제였다.
“네. 그대로 마법사들을 투입할 수는 없을 거예요. 몰살되어도 혜성을 막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만큼의 인원을 내보내야겠죠.”
다프네는 그리 말하는 자신을 혐오했다. 저 인원만큼의 무게를 짊어질 수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수백의 죽음을 이미 상정해야 하는 상황이, 마음을 계속 갉아먹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결정을 내렸을 거야.”
서툰 위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어요. 누가 죽어야 할지 결정할 권한을 가진 사람도 없어요.”
“살아야 하는 사람은 있어.”
넬라는 그리 말했다.
“기적을 바라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기적을 상정하는 건, 그걸 행할 수 있는 자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야. 우리가 어느 쪽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럴 수 있는 녀석이 누구인지도 잘 알 거고.”
“…네.”
슬픈 말이었다. 다프네는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녀석을 깨우지 않기를 결정하고,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말한 건 너야.”
한동안 말없이 다프네를 바라보던 넬라가 그리 말했다.
“그렇게 믿고 있으면, 적어도 침울하게 있지는 마. 용사가… 일로이가 돌아올 거라는 말을 남긴 건, 네가 그렇게 있기를 바라서 그런 건 아닐 테니까.”
먼저 일로이에 관한 말을 하자니, 혓바늘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넬라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다프네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 녀석이 네게 말할 때 불안해 보이던? 자기가 하려는 일에 확신이 없어 보이던? 등 떠밀려서 어딘가에서 죽치고 앉아있을 거라고 했나?”
다프네가 고개를 저었다. 얼굴에 드리웠던 먹구름이 조금이나마 걷힌 듯헀다.
“고민 해결에 도움이 되었어?”
“…네.”
넬라는 그리 말하고 있었지만, 애써 불안감을 감추고 있었다. 빌어먹을 용사놈은, 아직도 어딘가에 틀어박혀 있었다. 빨리 돌아오라고, 넬라는 자존심에 차마 그리 생각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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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아그네스는 몸에 걸쳐진 갑옷의 무게를 느껴보았다. 갑옷은 가벼웠지만 무거웠다. 아그네스는 주먹을 슬며시 쥐었다가 펴 보았다. 오랜만이었다. 아니, 실전은 이번이 처음인가. 몸의 움직임이 어색했다. 절걱거리며 관절부마다 들려오는 소리가 가까웠다. 그녀를 걱정스럽게 부르는 시녀에게, 아그네스는 돌아보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검을 가져와라.”
아그네스가 사용하는 검은 왕가 대대로 전해지는 보검은 아니었다. 더 가볍고, 한 손으로 충분히 휘두를 수 있는 검. 아그네스는 검을 쥐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수고했다. 돌아가 보거라.”
명상에 들어간 여왕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시녀는 여왕의 명을 어기지 않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등을 돌렸다. 아그네스는 볕을 받으며 심호흡했다.
네가 이런 기분이었나.
아그네스의 기억 속, 출정 전의 용사는 바짝 얼어있었다. 지금의 아그네스 또한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다. 늘어난 무게에 짓눌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정되어버린.
너를 이해한다고 하지 않겠다. 아마 네가 훨씬 무거워하고 있었을 테니.
아그네스는 밖으로 나섰다. 왕국의 기사단장들이 하나둘씩 그녀의 등 뒤로 따라붙었다. 전장이 도처였다. 아그네스는 술렁이는 공기를 느끼며 성벽을 올랐다.
“다가오고 있습니다.”
“전투 준비는 끝났나?”
“예. 전 병력 배치 완료됐습니다.”
그래.
아그네스는 고개를 끄덕여 받아주고는 성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게 재앙의 전조인가.”
마물의 해일이, 산등성이를 타며 넘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