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2 - 132. 믿음, 기대, 그리고… (2)
아카데미의 학생. 그중 일정 수준 이상의 학생들은 징집 대상이 되었다. 유진과 코라는 징집이 결정되기도 전에 자원입대했다. 딱히, 애국심도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공명심 때문도 아니었다. 어차피 입대해야 할 운명, 그림을 더 좋게 그려 가문의 명성을 올리겠다는 계산적인 생각이 내포되어 있었다.
“누구든 다 계획이 있는 법이지. 한 대 맞기 전까지는.”
유진은 성벽 위에 서서 중얼거렸다. 투기장에서 유명한 모 선수가 한 말이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막연한 기대뿐이었다. 아카데미에서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발휘할 때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일로이 교수의 말이 정확히 맞아떨어져 놀라기도 했다.
“한 대를 좀 세게 맞았네.”
그리고, 어째서 교수가 그렇게 기를 쓰고 학생들을 마물 전투에 익숙해지게끔 만드려 했는지 실시간으로 깨닫고 있었다. 유진과 코라가 입대한 이후에도 아카데미의 우수한 학생들이 속속들이 징집되어 배치되었다.
유진이 속한 조는 마법사 하나, 기사 둘에, 일반 병사 열 명으로 구성되었다. 기사 둘 중 하나가 전체 지휘를 맡은 노장이었으며, 기사 나머지 한 명은 코라였다.
“저걸 보니까 무슨 생각이 드냐?”
유진이 코라를 슬쩍 건드리며 물었다. 코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눈을 감았다 떠도 저것들은 제자리에 있었다. 아니, 엄연히 말하자면 제자리는 아니었다. 조금씩, 해 질 녘과 땅거미가 파란 하늘을 좀먹어가듯 저 꿈틀거리는 그림자는 다가오고 있었다.
“도대체 왜 뛰어오지 않고 저기서 꾸물대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
핀잔이나 들을 줄 알았는데, 유진은 코라의 태도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애써 평소 같은 척해도 별로 소용이 없었다. 이 자리에서 평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지휘를 맡은 기사는 말이 없었다. 위로의 말도, 격려의 말도, 괜찮다고 안심시키는 말도 없었다.
“수업 시간에 들은 거 생각나냐? 교수님이 말씀해주신 것들 있잖아.”
수업은 대충 흘려듣고, 몸으로 교훈을 새기는 유진과는 달리, 코라는 모범생이었다. 지금은 둘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었지만.
“아니. 전혀 생각 안 나. 뭐라고 말을 들었던 거 같은데.”
“저 녀석들을 통솔하는 개체가 있다는 소리겠지. 지휘관 격인 개체가 있으면 마물의 행동은 사람의 군대인 양 통제된다고 했잖아.”
솔직히, 그다지 상상하고 싶은 경우는 아니었다. 유진과 코라는 수업 중에 딱 한 번 상대해봤던 ‘네임드’ 마물의 환상을 떠올렸다. 나탈리를 제외하면, 그것을 단독으로 상대하기는커녕 맞서서 2분 이상을 버틸 수 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 저 모든 마물을 다 통제하는 개체가 있다는 말일까.”
유진이 중얼거렸다. 재앙이, 원래 저런 거였나? 교수는, 용사는 저런 무리의 군세와 맞서 싸워서, 이겨내고 저 무리를 통솔하는 개체의 숨통을 끊었던 거였나. 아니, 심지어 재앙은 저들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며 새하얀 꼬리를 그리는, 생물조차 아닌 무언가였다.
“…아마 우리처럼, 부대를 나뉘어 통솔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지휘관 격의 마물을 다루는 마물도 있다는 뜻이겠지.”
그들의 의문에 답한 건, 여태 입을 계속 다물고 있던 노기사였다. 기사는 검을 앞으로 내리꽂으며 밖을 내다보았다. 이 두꺼운 왕도의 성벽이 오늘만큼 위태로워 보인 적도 없을 거다.
“다른 대도시는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비슷한 상황이겠지. 이렇게 마물에 둘러싸였거나, 혹은 이미 함락당한 채 폐허가 되었거나.”
극복했을 거라는 희망적인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노기사는 검을 빼 들었다.
“전장에서 절대 한눈을 팔지 마라. 첫 실전을 치르는 햇병아리들에게 해줄 수 있는 내 유일한 조언이다.”
부는 바람에 희미한 악취와 누린내가 났다. 마물의 냄새라고 했다. 바람은 등 뒤에서 불어오지 않고 정면에서 불어왔다. 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또 낮게 울었다. 짐승이 목을 긁으며 내는 소리는 성벽을 타고 넘어와 돌 틈새에서 머물렀다.
“죽지 마라. 너희들은 그것만 생각하고 있어.”
경고였다. 유진과 코라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가, 다시 들었다. 아직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의 집중력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일까.
절그럭.
그때, 성벽 위로 올라오는 이질적인 소리에 유진이 시선을 슬쩍 돌렸다. 천천히, 성벽 위로 사슬에 묶인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명심해라, 네가 인간을 공격하는 순간 ‘올가미’는 너를 옭아맬 거다. 그 뒤로는 널 기다리고 있는 건 살처분뿐이겠지. 알았나?”
험악한 목소리와 협박성의 질문.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철컹. 마지막 층계를 올라온 나탈리의 검은 눈이, 뻣뻣하게 굳어있는 유진과 코라를 포착했다. 나탈리를 데려온 사람은 새카만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여기가 네 자리다. 싸움이 시작되면 성벽 아래로 뛰어내려서 싸우든지, 성벽 위에서 싸우든지 마음대로 해라. 네가 마물을 죽이는 쪽에 있는 한, 어떻게 싸우는지는 관여하지 않겠다.”
“싸움이 끝나고 절 죽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나요?”
“약속했다고 말했을 텐데. 우리가 말하는 약속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겁다.”
이단심문관임이 틀림없을 사제는 나탈리의 두 손을 옭아매고 있던 사슬을 풀어주었다. 나탈리는 바닥으로 떨어진 사슬을 내려다보았다. 돌덩이만큼 무거운 듯한 사슬을 매고도 그녀의 팔목에는 붉은 흔적 하나 남지 않았다.
“가서 죽여라. 네가 죽으면 묏자리 정도는 마련해주마.”
사제는 그리 말하고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 성벽 위에 홀로 남겨진 나탈리는 병사들의 시선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전운이 감도는 현장에 난데없이 새카만 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나타나니,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나탈리.”
코라가 읊조렸다. 나탈리는 깨끗한, 마치 수의와 같은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학대의 흔적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머리카락도 언제나 그렇듯 윤기를 내며 흘러내렸다.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음에 코라는 안도하고 있었다.
“날 걱정할 시간에 너네 살아남을 궁리나 하는 게 좋을 걸.”
내뱉는 독설도 평소와 같았다. 평정을 지키는 사람이 없던 와중에 나타난 이는 떨지도, 얼어있지도 않았지만,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 있는 사람은 대부분 죽어.”
나탈리는 가감없이 말했지만, 병사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죽음은 수긍해야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유진과 코라만이 그녀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사기를 떨어트리는 말을 하지는 말아줄래. 안 그래도 침울한데.”
“나는 그게 너희가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이어지는 나탈리의 말에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나탈리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게 합리화하기로 했어. 내가 굴복해서 싸우는 이유. 너희라면 될 수 있으니까.”
“아이고, 영광입니다. 등이 허전해질 걱정은 없겠군 그래.”
유진이 비꼬며 말하자, 나탈리는 코웃음을 쳤다. 아카데미에서 늘상 보던 광경이었다. 유진이 나탈리와 친해지려 애를 쓰다가, 나탈리가 매몰차게 대답하고, 유진이 비꼬는.
“내가 너희 등을 지킬 건 아닌데.”
나탈리가 그리 말하자, 유진과 코라의 표정이 동시에 멍해졌다. 나탈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성벽의 저편을 바라보았다.
“내가 전력을 발휘하려면 넓은 장소에서 싸워야 해. 이 좁아터진 성벽 위에서 싸우라고 하면 주변에 있는 너희들까지 나 때문에 죽어버릴걸.”
나탈리는 미소와 함께 그리 말했다. 유진은 저 미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탈리가 성벽의 끝자락에 발을 걸치고 섰다. 산등성이가 검은 형체에 덮여 꿈틀거리고, 서서히 넘어 내려오고 있었다. 점점, 점점 가까워진다.
“그러니, 너희들이 있는 쪽으로는 못 넘어오게 할 거야.”
나탈리가 어떤 결심을 한 듯한 눈으로 그 말을 내뱉은 순간,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다리던 순간,
하늘에서 벼락 무리가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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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임미다.”
전력을 끌어내는 건 오랜만이었다. 7서클에 오른 이후로는 두 번째인가. 첫 번째로 전력을 다해 마법을 사용한 건 10년 전, 처음으로 완숙의 경지에 일곱 번째 고리가 자리 잡은 후였다. 그때 라우라의 상대는 젊은 퀘노어 스트로프였다. 아마 전 대륙에서 그녀를 상대할 수 있었던 사람은 북부대공 하나뿐이었을 거다.
“그때는 내가 힘에 휘둘리고 있었지만….”
라우라의 손안에서 마력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일곱 개의 고리가 엮이며 만들어낸 일곱 개의 핵. 마력은 핵과 핵을 거치며 가속하고 내부에서 폭발하며 터지기 직전의 화산과 같은 힘의 응집체를 형성한다. 이게 어떤 마법으로 발현할지는 이제 라우라에게 달려있었다.
“지금은 나도 성장했으니.”
라우라의 몸이 부상했다. 단 한 사람이 구현해내는 자연재해. 일곱 개의 고리는 그를 가능케 했다. 세상이 꿈틀거리며 요동친다. 흘러가던 구름은 와류에 갇힌 것처럼 라우라 머리 위의 하늘에 모여들며 소용돌이를 그렸다. 쌓이고, 쌓이고, 쌓인다. 새카만 적란운이 왕도의 하늘에 두껍께 드리웠다.
“다시 한번 붙어보면 어떨까 궁금하네요. 퀘노어.”
들어 올리는 양 팔이 무거웠다. 마력의 격류가 심장을 빠져나가 흘렀다. 여유롭다. 대마법 한 번 정도는 가볍게 인사 대신 쏴줄 수 있을 정도로. 머릿속에서 쏘아 보낼 마법의 윤곽이 그려지고 있었다. 속성은 번개. 가장 빠르고 무자비한 파괴 마법.
나의 분노를 노래한다.
목표는 마물 – 아니, 왕도 밖의 저 산등성이. 마력이 완전히 하늘로 빨려들어 가고, 벼락이 뱀처럼 꿈틀거리는 거대한 적란운은 라우라의 손 아래에 놓였다.
“그대가 진심으로 펼치는 마법은 처음 보는 듯하는데.”
“폐하께 이렇게 선보이게 되었네요. 폐하의 안전에서 사용할 일이 없었으면 했는데 말이죠.”
라우라가 쓴웃음을 내뱉었다. 혀짤배기가 내는 소리는 없다. 지금은 그저 7서클의 대마법사만이 그곳에 관망하듯 서 있을 뿐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폐하.”
“부디, 잘 부탁하겠다.”
“첫인상은 중요하니까요.”
라우라는 더욱 높이 상승했다. 그녀와 하늘은 연결되어 있었다. 찌릿한 감각이 라우라의 손끝에서 흘렀다. 목표는, 가장 놈들이 많이 몰린 곳. 동쪽의 능선.
가라.
적란운 속에 갇혀 있던 벼락이 풀려났다. 포효와 같은 우레가 울려 퍼진다. 신이 금박을 씌운 마차를 타고 친히 지상에 강림하듯, 거대한 분노가 빛의 균열이라는 형태를 띠고 해방되었다.
콰과과과광-!!!!
능선이 무너졌다. 마물들은 재조차 남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증발했다. 수확기의 호밀밭을 낫이 훑고 지나가듯, 벼락 무리가 쓸어 나간 자리에는 텅 빈 갈라짐만이 있을 뿐이었다.
“뭐야!!”
“마법사다!! 탑주께서 대마법을 쓰셨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불 붙은 산에서 토사가 무너져내린다. 벼락이 남긴 상흔은 다시는 회복되지 않을 상처와 같아 보였다.
“…그런데 저게 뭐야.”
허나 그럼에도, 마물은 진격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수로의 빈자리에 물이 차듯, 마물이 어디선가 더 밀려와 보충되었다. 대마법이 죽여버린 수백, 천 단위에 이르는 마물은 어디선가, 얼마든지 튀어나올 수 있는 수였다. 마물은 달리지조차 않고 계속, 같은 속도로 진군했다.
“…전원, 전투 준비.”
굳어버린 총사령관의 목소리가 싸늘한 침묵을 깨었다. 병사와 기사들이 검을 들고 시위에 살을 먹였다. 마법사들이 저마다 영창을 시작하고 포가 장전되었을 때,
마물의 해일이 내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