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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33화 (134/158)

Chapter 133 - 133. 믿음, 기대, 그리고… (3)

마물이 밀어닥쳐서 성벽이 흔들리는 줄 알았는데, 땅 전체가 흔들리는 것이었다. 사령관의 쏘라는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병사들은 저마다 쥐고 있던 무기의 시위를 놓았다. 마법사들은 마법을 쏘았고, 대포가 불을 뿜었다. 마물의 최전선에 포격이 쏟아졌다. 병사들은 다음 포격을 준비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기사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포격의 경과를 지켜보았다.

“효과가 없어.”

기사 하나가 침음성을 내뱉었다. 저들이 진격하는 속도는 늦춰졌지만, 수량은 전혀 줄지 않았다. 두 번째 포격이 쏟아지기까지의 간격은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병사들의 얼굴에서 핏기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지만, 그를 원동력으로 한 움직임은 더욱 신속해지고 있었다.

“쏠 수 있는 건 다 쏟아부어라. 기름도 미리 성벽 아래로 부어놔!”

불이 붙었다. 마물은 멈추지 않았다. 마물이 성벽을 들이받기 전에, 라우라의 두 번째 마법이 발동되었다. 푸른 불꽃이 땅에서 일었다. 불꽃은 화염이 되어 기름을 타고 성벽의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마물들은 불의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거나, 열기를 무시하고 다가오다가 타죽었다.

“더! 더 격렬하게 저항해라! 놈들이 왕도 땅을 밟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총사령관의 목소리가 간절하게 울려 퍼졌다. 나탈리의 검은 눈은 인간들의 그 격렬한 저항을 모두 담아내고 있었다. 저들은 삶을 태우고 있었다. 제 살과 뼈를 장작 삼아 태운 불로 타인의 앞길을 비추고 있었다. 고개를 돌렸다. 유진은 어느새 세 번째 마법을 구현할 준비를 마쳤다. 병사와 기사들은 각기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는 거야?”

유진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나탈리는 대답 대신 턱짓으로 집중하라는 의사를 전했다.

“죽지 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나탈리는 고개를 젓고는 코라의 모습을 찾았다. 기사와 병사의 틈바구니 속에서, 아직 어리숙한 기사는 제 위치를 찾으려 열심이었다. 바보 같은 일이다. 나탈리는 인사를 전하려다 말았다. 죽는다면 차라리 끝까지 시위를 떠난 화살로 죽고 싶었다.

“출격한다.”

병사 하나가 나탈리를 바라보며 홀린 듯 말을 흘렸다. 나탈리는 가만히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들러붙으려는 마물들이 대마법사가 붙인 불을 뛰어넘지 못하다가, 하나둘씩 재가 돼가며 그 속으로 몸을 날렸다. 불을 덮는 몸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하자, 재가 되지 않고 시체가 남은 마물이 있었다.

“불이….”

다 태우지 못한 마물의 시체는 다른 마물을 위한 다리가 되었다. 한 마리가 잔불 위로 발을 디뎠다. 마력을 연료 삼아 타들어 가는 잔불은 닿자마자 마물의 털가죽에 옮겨붙었지만, 마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아갔다.

“동쪽 벽이 뚫리려 한다! 증원하라!”

사령관의 비명과 같은 외침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둑에 구멍이 난 듯 불이 꺼진 곳으로 마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전투를 시작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은 시점. 왕도의 성벽은 처음으로 마물의 진입을 허용하기 직전이었다. 나탈리는 뒤로 돌아보며 코라와 유진과 눈을 마주쳤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살아있어.”

그리고, 등을 앞으로 하여 떨어져 내렸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성벽의 가림막 앞으로 달려가며 나탈리를 따라갔다. 유진의 뒷덜미는 코라가 잡아챘고, 두 사람은 낙하하는 나탈리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성벽만을 바라보며 진군하던 마물의 시선이 처음으로 다른 곳을 향했다. 불길 사이에서 무수하게 번득이는 수천 쌍의 눈빛은, 하늘을 수놓는 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자아냈다. 온몸을 찢어버리려는 듯한 살기 속에서 나탈리가 느낀 건 편안함이었다.

“너희들도 화살이니?”

자신이 화살인 줄 모르는 화살은 기쁠까. 자신이 화살인 줄을 알면서도 날아드는 화살은 어떨까. 나탈리는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변화를 일으켰다. 몸에 철갑과도 같은 비늘이 돋았다. 허리에서는 창보다 날카로운 촉수가 자라났다. 적을 포착하는 눈, 그 동공이 바늘처럼 좁아지고 손끝에서는 날카로운 손톱이 돋아났다.

“말을 걸어봤자 소용이 없나.”

나탈리의 중얼거림과 충돌은 동시였다. 도약은 가벼웠지만, 착지는 그렇지 않았다. 마물의 시선을 빨아들이며, 나탈리는 전장에 등장했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변화한 나탈리의 모습을 보고는 숨을 삼켰다.

“뭐야, 마물이야? 저게 대체 뭐야?”

“공격해야 하는 겁니까??”

지휘관들이 놀란 병사들에게 설명을 전달하기도 전에, 나탈리의 촉수가 마물을 향해 쏘아졌다. 촉수의 파공음은 대포가 터지는 소리와 같았다. 마물이 촉수에 꿰뚫리며 토막이 나자, 병사들의 표정이 멍해졌다. 유진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탈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마음이 아플 정도로 변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구나.”

단신으로 구멍을 틀어막는 소녀의 등 뒤로 새카만 그림자들이 지나쳤다. 나탈리는 방파제가 아니었기에, 밀고 들어오는 물결을 홀로 감당할 수는 없었다. 성벽에 들러붙는 마물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성벽의 저항에 막혀 무너졌다.

“격에 맞는 이들끼리 놀라는 말은 모르나보군.”

나탈리를 주시하고 있던 쪽은 따로 있었다. 나탈리는 마물의 무리를 헤집고 나오는 거대한 마물 – 잿빛곰 한 마리를 보았다. 잿빛곰은 나탈리를 바라보며 의아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너는 대체 왜 거기서 그러고 있는 거지?”

“결정권은 내게 없어.”

나탈리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녀의 신경이 곰에게 쏠린 와중에도 촉수는 알아서 마물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제 부하들이 죽어나가든 말든, 곰은 고개를 휙 숙이며 나탈리에게만 신경을 집중했다. 곰의 아가리는 웃음을 가장하듯 쭈욱 벌어졌다.

“지금은 있다고 생각하나?”

곰이 앞발을 높이 쳐들며 물었다.

“흥미롭구나, 네년. 사람은 아니고, 오히려 우리와 아주 가까운 냄새가 나는데 어째서 사람의 편에 서서 싸우려고 하는 거냐? 네가 저 성벽을 딱 한 번만 공격하면, 우리의 승리는 확실하다. 너라면 어느 쪽에서 싸우는 게 좋을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좋다, 나쁘다 따위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

나탈리가 눈을 깜박거렸다. 승패도 죽음도 삶도 그녀에게는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부여되었던 유일한 의미는 소멸한 지 오래되었으니까. 나탈리는 흘긋 뒤로 돌아보았다. 장벽에 구멍이 하나둘 뚫리고 있었다. 처절한, 비명과 고함이 난무하는 수성전이 시작되었다. 나탈리는 가만히 그 소리를 들으며 곰을 마주했다.

“우리와 함께 영원한 영광을 누릴 수 있을 텐데,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다니. 어리석고 또 어리석다. 너라면 그분께서 인정하셨을 거다. 네게서는 그분들의 냄새가 난다. 네 몸뚱아리는 그분들의 육신으로 구성되었으니 그럴 테지.”

“죽어 사라진 것들에 매달리는 것도 미련하잖아.”

“그 죽음 또한 의미가 있는 법이지. 죽음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인간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아니, 죽으면 끝이다. 사람이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정말 죽음이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건, 그건 단지….

쾅.

생각이 복잡해지려던 찰나, 공격이 날아들었다. 나탈리는 촉수 한 가닥으로 곰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었다. 그럭저럭 강했다. 딱 그 정도. 나탈리는 천천히 곰의 발을 밀어냈다.

“네가 죽음을 맞이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이…잡종이…!”

나탈리는 촉수를 더 꺼내 들었다. 촉수는 꿈틀거리며, 천천히 곰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쉽고 빠르게 죽여줄 생각은 없었다. 촉수는 곰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바윗덩이만큼이나 무거울 곰은 너무나 쉬이 들어 올려졌다. 촉수는 곰을 둘둘 감으며 조이기 시작했다.

“뭐라도 아는 척하며 떠들기는.”

우드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온 마물은 그렇게 허공에서 으스러지며 생을 마감했다. 가죽 속에 갇힌 고깃덩어리가 된 곰이 촉수 사이로 흘러내렸다. 나탈리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성이 분전 중인 소리가 들려왔다.

“왜 나는 여기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나탈리는 성과 마물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촉수를 한껏 펼쳤다. 깊게 생각하지 마라. 어차피, 다 의미 없으니까.

그리 머릿속으로 되뇐 나탈리가 촉수를 한껏 펼쳐 들었다. 이미 수십 마리의 마물이 촉수 끝에서 도륙이 났을 거다. 더, 지금 복잡하게 헝클어지는 머릿속을 밀어버리기 위해서는, 그저 전투에 몸을 내던지는 수밖에 없었다.

나탈리는 그녀를 주목하는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위협으로 인식하고, 죽이기 위해 다가오는 마물의 시선. 아마 이전의 잿빛곰과 같은, 지성이 있는 마물.

나탈리는 살갗을 찢는 듯한 시선을 느끼며 조금씩, 전장의 깊숙한 곳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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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시발!”

넬라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왕도의 성벽 위, 사람들은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실제로 꽤 오랫동안 마물들은 성벽에 접근하지 못했다. 적절한 때마다 흩뿌려지는 라우라의 대마법, 그리고 병사들의 처절한 사격과 치밀한 지휘. 실제로 마물의 수는 점차 줄어가고 있는 듯 보였고, 한 번은 거의 산등성이까지 마물들을 몰아낸 것처럼 보였다.

“…이건 반칙 아니냐고.”

다시 저 산등성이가 새로 몰려온 마물들로 가득 채워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도착한 마물들은 지치지도 않는다. 그들은 더 빨리 달려 성벽에 붙어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시체가 되어버렸지만, 마물의 시체는 다음 마물을 위한 계단이 되어주었다.

“절망하기는 아직 많이 일러요, 넬라.”

다프네가 넬라의 옆에서 마법을 쏘았다. 이 여자는 또 왜 이렇게 무식하게 마력이 많아. 다프네는 한 번 한 번이 부담스러울 위력의 마법을 난사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마법을 쏘는 표정은 어찌나 냉철한지, 예전에 폐급 마법사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던 그 사람과 같은 인물인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전투는 끝나지 않았어요. 성벽도 아직 견고해요.”

젠장, 나도 알아. 나도 재앙과는 싸워봤다고. 그때도 이렇게 많은 마물이 몰려왔고, 저 마물의 뒤에는 말 그대로 산보다 큰 문어가 한 마리 더 버티고 있었다고. 넬라는 이를 악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저 녀석이 선배 노릇이나 하는 건 견딜 수 없었다.

“네가… 억지로 응원 안 해도 된다고.”

넬라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저 무식하게 마력만 많은 여자보다는 자신이 조금 더 효율적으로 마력을 배분할 줄 알았다. 다프네의 페이스에 맞춰 마구 마력을 쏟아붓다 보면 중요한 순간에 마력이 바닥나버릴 거다. 넬라는 날카롭게 가다듬은 불꽃의 화살을 마물의 미간에 내다 꽂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 마력이나 아껴둬. 혜성이 조만간 떨어질 거야.”

넬라는 알고 있었다. 밤이 되면 까마득히 먼 하늘에서 어둠을 가르며 빛줄기 하나가 떨어질 거라는 사실을. 구원의 빛이 아닌, 세상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빛이. 그때, 문득 다프네가 넬라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저는 다른 성벽 쪽으로 가볼게요. 우리와 같은 전력이 한곳에 쏠려 있으면 수성전에서 좋지 않아요. 이곳은 넬라, 당신에게 맡겨도 괜찮을까요?”

넬라는 다프네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아마 혜성을 막기도 전에 마법사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저 보랏빛 눈은 넬라가 보기에도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넬라는 피식, 웃음을 내뱉으며 어깨에 올려진 다프네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밀어내었다.

“나 이제 6서클이야. 적어도 혜성이 떨어질 때까지는 안 죽어. 그러니까, 빨리 사상자나 막으러 돌아다니라고.”

다프네는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떼었다.

“그럼, 믿고 맡길게요.”

믿는다는 말을 얼마 만에 들어보는 건지. 넬라는 조금 멍해진 표정으로 다프네를 향해 짧게 손을 흔들었다. 등을 돌리자 어느새 다시 채워진 마물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자, 네놈들을 올라오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유를 생각해야 할까. 넬라는 마력을 가다듬었다. 한 번 크게 쓸어버리고 병사들에게 시간을 벌어줘야 했다. 속성은 가장 효과적인 불. 형상은 -

쿠구궁.

그때, 벽이 크게 흔들렸다. 넬라가 고개를 휙 돌리니, 웬 사마귀와 비슷하게 생긴 마물이 성벽 위에 당도해서 병사들을 마구잡이로 쓰러트리고 있었다.

“…안돼.”

넬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 마물은, 익히 알고 있는 놈이었다. 북부에서 왕도까지 내려온 건가. 난데없이 전장에 등장한 크롤러는 그림자 사이로 몸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물 만난 고기처럼 앞팔을 휘두르며 전선을 헤집었다.

안 된다. 방어가 붕괴된다. 크롤러가 무너뜨린 방어선 사이를 비집고 또 마물이 올라올 거다. 넬라가 형상도 갖추지 않은 마력의 덩어리를 크롤러를 향해 쏘아 보냈다.

“안돼!!”

쾅-!!

한 대 얻어맞은 크롤러가 비틀거리며 성벽 밖으로 떨어졌지만, 전력에 공백이 생겼음은 틀림없었다. 마물이 올라온다. 병력의 보충은 늦다. 넬라는 방호 마법을 전력으로 펼치며 달려갔지만, 성벽으로 마물이 기어 올라오고, 다친 병사들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어디선가 찾아온 따스한 금빛 안개가 내려앉기 전까지는.

“일어나서 막아주세요. 왕도의 성벽은 뚫려서는 안 됩니다.”

넬라는 성벽 위로 찾아온 지원군을 보고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성녀가, 중무장한 성국의 근위병들과 함께 고고하게 성벽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시스의 표정은 굳어있었고, 그녀의 곁에 있어야 할 용사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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