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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34화 (135/158)

Chapter 134 - 134. 카이로스 수성전 (1)

“성녀다… 성녀님께서 오셨다!!”

아이시스가 전장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번져갔다. 아까 전까지 크롤러에게 복부가 관통된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병사 하나는,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이시스와 제 몸을 번갈아 보았다.

“상처가… 나았어.”

그새 치유 마법이 강해졌나? 이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텐데. 넬라는 멍해진 표정으로 아이시스를 보았다. 황금의 마력은 부드럽게, 그리고 널리 퍼져나가며 부상자들을 하나둘씩 일으켰다. 병사들은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무기를 쥐었다.

“싸우세요. 그대들의 뒤에 제가 있습니다.”

성국의 근위병들이 좌우로 포진하며 아이시스를 호위했다. 강해진 건 치유 마법뿐만이 아니었구나. 넬라는 단호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하는 성녀를 보며 내심 그리 생각했다. 성벽을 기어 올라온 마물들은 아이시스가 치료한 병사들이 다시 순식간에 성벽 아래로 떨구었다. 병사들의 함성이 마물의 비명을 가렸다.

“…당분간은 성벽의 방비에 구멍이 뚫리는 일은 없겠네.”

넬라가 안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벽은 반쯤 허물어졌지만, 병사들의 기세는 그마저 메워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렬했으니까.

“오랜만입니다, 넬라. 당신은 어디 다친 곳 없나요?”

넬라의 귓전에 아이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넬라는 한숨을 다시 내쉬고 싶다는 충동을 꾹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피차 용사 파티에서 나간 건 같았지만, 둘이 용사 파티에 있었을 때도 사이가 좋았던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굉장히 험악했다고 할 수 있을 거다. 시도 때도 없이 용사와 용병처럼 대립해왔으니까.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저기 쓰러진 기사님들이나 치료해줘. 안 다쳤어.”

넬라는 손을 휙휙 내저으며 그리 말했지만, 아이시스는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다시 싸움이라도 걸려는 건가 싶어 어깨를 슬쩍 움츠린 넬라의 뺨에 아이시스의 손이 조심스럽게 가 닿았다. 이윽고, 치유의 마력이 몸에 스밈과 동시에 뺨에서 느껴지던 따끔거리는 감각이 사라졌다.

“몸조심하세요. 당신이 다쳐서 후송되면 방어선 전체가 무너져버릴 테니까.”

“내 걱정은 아무도 안 해주는 거지.”

넬라는 툴툴거렸지만, 썩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아 보였다. 성녀에게서 일신을 걱정하는 말이라도 들었다가는 버럭 화를 내버릴 것 같았으니. 넬라는 성벽을 기어 올라온 마물 한 마리의 머리를 터뜨려버리고는 다시 아이시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왜 너 혼자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데? 일로이는 어디다 내버려 두고?”

“아직 명상에 빠져있어요. 전쟁이 발발했다고 하니, 일단 저라도 먼저 와야겠다, 싶어서.”

넬라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그 녀석이 깨어난다는 징후나, 그런 건 없어? 뭐라도 남긴 말이 있었나?”

“명상에 들어가기 전에 남긴 말이 전부에요.”

고개를 내저으며 말하는 아이시스의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성녀와 일로이의 사이도 아주 좋다고는 할 수 없었을 텐데. 아니, 아이시스가 일방적으로 일로이를 혐오하는 쪽이 아니었던가. 둘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있었겠지. 넬라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투 속에서도, 그런 아무래도 상관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깨워야 하지 않을까?”

“성급하게 굴지 않아도 돼요. 결국 그가 명상에서 깨어나야만 이 모든 게 해결될 테니까요.”

아이시스는 불안해하는 넬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용사를 믿어야 하지만, 용사에게 의존하면 안 돼요. 잠깐 궁지에 몰렸다고 해서 그를 찾는 건 제 발로 함정에 걸어 들어가는 셈입니다.”

“…제법 성녀다운 말도 할 수 있게 됐네.”

넬라는 반쯤 비꼬며 그리 말했다. 아이시스의 표정은 잠깐 꽁해졌다가,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예전처럼 날 선 대응은 없었다. 성장하지 않은 건 넬라 혼자뿐이었다.

“부상자는 족족 치료하겠지만, 생기지 않게 하는 게 우선입니다. 아시죠?”

“됐어. 빨리 다른 곳에나 가봐.”

자신은, 아직도 과거에 사로잡혀 있었다. 현재와 현실은 이렇게 최악의 형태로 눈앞에 다가왔는데. 넬라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까짓거.”

마력이 형태를 이루고 펼쳐졌다. 얼음의 창이 융단을 이루며 허공에 떠올랐다. 넬라의 심장에서 마력이 뭉텅 깎여나갔다. 지금 이렇게 마력을 소모하면, 나중에 결계를 펼칠 때 감당할 수 있겠냐고, 머리는 물었지만 넬라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감당해야 한다.

넬라는 쭉 펼쳤던 손아귀를 콱 쥐었고, 얼음의 창은 소낙비처럼 우수수 마물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육편이 찢어지고 뭉개지는 소리, 마물의 비명과 단말마가 들려왔다. 수십만 장의 유리가 한꺼번에 깨지는 소리와 함께, 얼음 창이 땅에 격돌했다.

“어차피 이것도 감당하지 못하면, 다 죽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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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는 땅으로 내려온 라우라를 바라보았다. 7서클의 대마법사는 머리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조수가 손수건을 가져다주었지만, 라우라는 조수를 밀어내며 의연하게 버티고 섰다. 그녀의 대마법은 불리하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전황을 완전히 뒤바꿨다.

“조금만 회복하겠습니다, 폐하. 부디 옥체를 보전하소서.”

숨은 내쉬며 말하는 라우라를 보며 아그네스가 코웃음을 쳤다.

“라우라, 여긴 전장이다. 그것도 이 나라의 명운이 갈린. 다시 옥체를 보존하라는 소리는 하지 마라. 이 땅과 사람들이 모두 뭉개지고 있는데 내 몸 하나가 대수더냐.”

최적의 몸 상태. 아그네스의 몸은 완벽하게 조율을 끝마친 후였다. 성벽 위의 전투는 거세지고 있었다. 마물은 아귀보다 악독하게 기어오르려 하고 있었고, 병사들은 몸을 내던지며 처절하게 그를 막아내고 있었다. 아그네스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대는 원하는 만큼 쉬고 있어라. 그대가 다시 준비가 될 때까지 내가 버티고 있으마.”

“폐하, 부디….”

“됐다. 날 걱정할 시간에 회복에 집중해라. 그게 나를 지키는 길이라는 걸 알고 있지 않느냐. 무엇보다….”

아그네스는 슬쩍, 입가를 올리며 도발적인 미소로 라우라를 바라보았다. 라우라는 어째서 여왕이 저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그대보다 강하다.”

“그건 아직 모르는 검미다.”

발끈한 라우라의 말이 다시 혀짤배기의 그것으로 돌아갔다.

“내가 지금부터 증명해보도록 하겠다, 라우라. 회복하면서 두 눈 똑바로 뜨고 확인해보아라.”

아그네스는 고고하게 계단을 올랐다. 여왕의 뒤로 기사들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검을 뽑아 든 여왕이 내비치는 기세는 호위를 위해 따라붙는 기사들을 전부 더한 것보다도 훨씬 강했다. 여왕은 홀로여야 했다. 무게를 나누는 순간, 여왕이라는 환상은 사라진다.

“내 앞을 지나가지 마라. 내 옆을, 내 등을 지키는 건 허하겠지만, 내 앞을 가로막는 건 용서치 않겠다. 경들이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아주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아그네스가 검을 들어 겨누었다. 층계를 마물 한 마리가 떡하니 가로막고 서 있었다.

“폐하께서 처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서려 하다가, 아그네스의 싸늘한 눈빛에 막혀 저지당했다. 아그네스의 검이 기사의 목젖 앞에 멈춰 있었다.

“내가 방금 한 말을 무엇으로 들은 게냐.”

허용하지 않는다. 공적을 욕심내다가 죽어야 할 때 이미 죽어있어, 죽지 못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아그네스는 검을 치우고는 발을 앞으로 뻗었다. 여왕의 고고한 자아가 마력에 뒤섞여 향기처럼 무겁고 은밀하게 공간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내 등을 지키다 죽어라. 내 앞을 가로막다 죽지 말고. 세 번은 말하지 않겠다.”

“명심하겠습니다.”

아그네스의 신형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실전은 오랜만이었지만, 아그네스에게서 긴장의 기색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여왕의 움직임은 걸음처럼 보였지만, 그 공간의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검에 낭비와 군더더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 번 날이 번득일 때마다 마물의 목이 떨어졌고, 무너지기 직전의 수비 대형이 안정되었다.

“일어서라. 그대들의 가족과 연인, 전우가 그대들의 등 뒤에 있음을 잊지 마라.”

여왕의 등장과 말 한마디는 성녀의 치유마법과 격려만큼이나 병사들을 각성시켰다. 그들은 압도적인 기량으로 마물을 쉬이 도륙하는 아그네스의 기량에 희망을 얻었고, 그녀가 자신들의 왕이라는 사실에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대들의 앞에 내가 있음을 잊지 마라.”

용사는 도착하지 않았다. 성국의 지원군을 이끌고 온 성녀로부터 들려온 소식이었다. 그러니, 그의 책임은 멋대로 덜어가겠다. 아그네스는 그리 생각하며 검을 휘둘렀다.

“전열을 유지하라, 작은 빈틈도 허용하지 마라. 옆의 전우가 죽는다.”

여왕의 명에 병사들이 창을 내지르는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아그네스는 그리고서 흘긋, 성벽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벽에 달라붙는 마물의 수가 적어지고 있었다. 호문쿨루스가 벽 근처에서 날뛰며 마물을 정리해서 그런 걸까. 아그네스의 눈가가 좁아졌다.

“…아니, 실질적으로 수가 줄어든 게 아니야.”

아그네스는 혼잣말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수가 준 게 아니라, 단순히 공격 강도가 낮아진 것일 뿐이다. 해일처럼 밀려들던 마물은 없고, 산발적인 공세와 죽음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럼, 남은 마물들은?

아그네스의 몸이 굳었다. 그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분산해서 뚫을 수 없다면 일점에 집중하는 게 옳다. 지성이 있는 마물이라면 그 정도 사실은 알고 있을 터이다.

이 성에서 가장 취약한 곳. 지형이 가장 평탄하며 성벽의 구조가 가장 허술한 곳. 쿵. 바위가 산에서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음은 아그네스의 귓가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성문으로 가자.”

아그네스는 그리 말하고 발걸음을 떼었다. 쿵. 쿵. 쿵. 성벽을 두드리는 소리는 마치 거인이 제 집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새총처럼, 혹은 투석기처럼 마물의 몸뚱이가 성벽에 들이박혔다. 멀어지는 소음이 성문에 가까워질수록 아그네스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폐하! 이곳으로 오시면 안 됩니다!”

“비켜라.”

아그네스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려는 병사들을 말어내고는 성문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이 최악의 형태로 드러나는 꼴을 마주해야만 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새카만 덩어리가 성문을 들이받고 있었다. 덩어리는 부딪칠 때마다 으깨지며 피를 흘렸다. 덩어리에서 발과 꼬리, 머리가 비집고 나오며 울었다. 사람의 아우성이 짐승의 단말마와 악에 받친 포효에 묻혔다. 성벽이 거대한 창살처럼 덜컹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수천, 수만의 마물이 나타나더니 성벽과 성문을 들이받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부딪치는 놈들이 으깨지더니, 마치 접착제처럼 기능하면서 다른 마물과 붙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둘씩 놈들이 달라붙고 합쳐지더니…. ‘저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지휘관은 이미 넋이 나가버린 것 같았다. 아그네스는 쯧, 혀를 차고는 지휘관을 지나쳐 성벽의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마물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여왕을 겨냥하고 날아들었다. 기사들이 기겁을 하며 달려가려 하기도 전에, 마물들은 이미 몇 토막으로 나뉘어 떨어졌다.

“저걸 저지하겠다고 몇몇 단장급 기사들이 성벽 아래로 내려갔지만….”

이미 저들과 하나가 되어버렸습니다. 지휘관은 그리 말하며 보고를 마쳤다.

“내가 가겠다.”

쿵. 다시 성문이 들썩거렸다. 긴장감이 감도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대마법을 기다리면 괜찮습니다. 오히려 저리 뭉쳐있으니, 일소하기 수월할 겁니다.”

“그때까지 성벽이 버틸 수 있다면야 말이지.”

지휘관이 입을 다물었다. 여왕을 말릴 명분도, 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호위 기사들은 조용히 칼을 빼 들었다. 죽을 때였다. 기사들은 심장에서 마력을, 그리고 오러를 끌어내며 그리 생각했다.

“세 명만 뒤를 따라라. 나머지는 성벽을 각기 지켜라.”

어떤 셋인지 물을 필요는 없었다. 기사들은 가장 강한 세 사람만을 남겨두고는 뒤로 물러섰다. 아그네스는 눈을 지그시 감고는 오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여왕의 오러는 마치 장미와 같은 붉은색으로, 우아하게 팔을 타고 내려오며 검을 감쌌다.

“가겠다.”

여왕은 그리 말하며 거침없이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오러가 여왕의 어깨 뒤로 망토처럼 펼쳐졌다. 여왕의 검은 마물 군체의 중앙을 겨냥하고 있었다. 마물의 살더미 사이사이로, 인간의 것으로 추정되는 몸이 있었다. 갑옷, 눈을 부릅뜬 머리. 검을 쥔 팔. 부러진 깃발.

“미안하구나.”

여왕은 시체로도 돌아오지 못할 이들에게 짧게 사과하고는 검을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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