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5 - 135. 카이로스 수성전 (2)
아그네스 블랑쉬 뤼미에르.
여러 방면에서, 그녀는 완성된 인간이었다. 본디 왕가의 핏줄이라 하면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핏줄이 묶여 만들어진 매듭의 연장이었다. 치장하면 꽃과 보석을 주눅들게 하고, 검을 잡으면 대성한 기사를 꺾고, 토론하면 정치인의 세 치 혀를 묶어버릴 수 있고, 지혜는 세상의 끝을 보고 온 방랑자의 그것과 비견되는.
하지만 그중에서도 아그네스는 특별했다.
전대 왕, 볼레르 글리제 뤼미에르의 둘째 딸로 태어난 아그네스에게는 일곱 명의 형제가 있었다. 그녀의 위로 넷, 아래로 셋. 제1 왕자, 에드바르 블랑쉬 뤼미에르를 중심으로, 왕실의 8남매는 제법 평화로웠다. 첫째의 자질은 결코 선대 왕에 뒤떨어지지 않았고, 성품 또한 성군의 그것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에드바르는 동생들을 인정(人情)으로 대했고, 동생들은 겉으로나마 그를 존중하고 존경했다.
다른 배에서 태어난 형제들일지라도, 동생들은 정실의 소생인 첫째가 왕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에 남은 일곱은 일찌감치 왕이 되고자 하는 욕심을 버렸다. 차기 왕좌의 자리가 확고하다면, 그에 반기를 들어 밉보이기보다는, 잘 보여서 지금의 자리라도 보전하는 게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볼레르 뤼미에르의 승계 작업은 순조로워 보였고, 누구 하나 피를 흘릴 일은 없으리라고, 왕실의 사람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던 가을, 왕세자가 될 운명이었던 에드바르가 병으로 요절했다. 아그네스가 열다섯이 될 즈음이었다.
왕실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계승이 유력했던 왕자가 죽자, 눈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첩실은 제 친정을 동원해 자리다툼을 슬금슬금 시작했고, 국왕은 그를 반쯤 포기한 채 내버려 두었다. 누구 하나 성에 차는 사람이 없었다. 왕권은 강고하다. 선을 넘지 않는다면, 저 다툼에서 살아남는 이에게 왕위를 승계해도 좋으리라.
왕궁에 피바람이 몰아쳤다.
왕실이 견제해야 할 귀족 세력은 저들끼리 후계를 다투다 무너져내렸다. 혹은, 선을 넘다가 국왕의 칼을 받았다. 왕이 바라던 대로였다.
처음 탈락한 건 넷째, 3 왕자였다. 그의 외가는 함께 몰락하고 왕도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다음은 둘째, 1 왕녀, 다음은 여섯째, 일곱째, 막내가 차례대로 탈락했다. 3 왕자는 독살당했고, 1 왕녀는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여섯째는 배를 칼에 찔려 죽었고, 일곱째와 막내는 지위를 잃고 변방으로 물러났다.
“…있을 수 없다…. 네가, 네가….”
셋째, 2 왕자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이었다. 다섯째, 아그네스 블랑쉬 뤼미에르는 제 형제가 눈을 감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남은 건 아그네스였다. 그녀가 열여덟, 막 성인이 되었을 때였다. 정실의 둘째 소생이자 막내는 모든 형제를 쉬이 압도하고 승계자가 되었다. 아그네스는 형제들의 죽음을 에드바르의 무덤에 고했다. 승계 전쟁이 끝난 다음 날, 왕이 눈을 감았다. 핏줄 위의 핏줄. 아그네스는 경외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아그네스는 그렇게 여왕이 되었다. 여왕이 되고자 하여 된 건 아니었다. 그저 죽은 오라비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에게 내줄 수 없다는 생각을 품고 행한 일이었다. 무겁고, 고독하고, 힘든 것이다. 아그네스는 그다지 원하지 않았던 왕위라는 무게를 짊어지며 그리 생각했다.
“겨우 칼질 한 번으로 끝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지.”
아그네스는 반으로 갈라진 마물의 군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길게, 점액과 같은 피를 늘어뜨리고 군체는 땅을 구르며 버둥거렸다. 아그네스의 오러가 남긴 붉은 흔적이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고 있었다. 아그네스의 오러는 붉었다. 피와 장미와 루비를 닮은, 붉은색이었다.
“이따금 튀어나오는 마물을 견제해라.”
아그네스는 기사들에게 그리 말하고 다시 검을 들었다. 검날이 날카로운 울음을 토해내며 오러를 쏘았고, 둘로 나뉜 군체는 아그네스의 검을 받으며 무너졌다.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아그네스는 그녀 자신을 태우고 내던지며 싸웠다. 여왕은 뛰어났기에, 너무도 뛰어났기에 제 죄와 의무를 잘 알고 있었다.
검을 휘두른다. 아그네스는 곁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했다. 군주된 자라면, 함께하는 이의 죽음에 발목을 붙잡혀서는 안 된다.
“폐하, 부디….”
기사 하나가 쓰러졌다. 갑옷이 마물의 발톱에 뜯겨 나간 채였다. 인간의 피가 확 치솟았다. 기사는 여왕의 갑옷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 몸을 돌렸다. 앞으로 발을 뻗었다. 검로가 그물망이 되었다. 오러가 거미줄처럼 얽히며 마물을 베었다.
마물을 베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수만 마리가 뭉쳐있다고 하면 수만 번의 검로를 그리면 된다. 마물의 이빨과 발톱은 아그네스에게 다다르지 못할 거다.
크워어어어!
분노한 마물들의 울음소리는 하나가 되어 울렸다. 여왕의 검 아래에, 군체는 붕괴하며 작은 덩어리들로 무너져내렸다. 덩어리들은 맥없이 바닥에 추락해 뭉개지다가 떠오르며 다시 달려들었다. 아그네스는 좌우로 고개를 돌렸다. 남은 둘은 분전하고 있었다. 달려드는 마물을 떨쳐내고, 베어내며 생명을 불사른 오러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도 나를 따르고 싶더냐.
아그네스는 기사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기사들은 여왕이 그들에게 시선을 주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사투를 벌였다. 왕국 굴지의 기사들이었다. 남은 둘은 그리 쉽게 쓰러지지 않을 거다. 아그네스는 그리 믿고 검을 휘둘렀다.
무게.
아그네스는 그리고 처음 용사를 만나던 날을 떠올렸다.
==
“폐하, ‘유물’을 뽑아간 사람 말입니다.”
대전. 평소와 그리 다를 바가 없는 회의가 끝으로 접어들 때였다. 최근 왕국 곳곳에서 뒤숭숭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해결책을 내놓으며 긴장했던 신하들의 긴장감이 초봄의 얼음처럼 눈치를 보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제 여왕이 해산을 명하고, 신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삼삼오오 짝을 이루며 돌아갈 터였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그리고, 누군가가 던진 의제로 대전의 분위기는 다시 싸늘하게 식었다. ‘유물’. 그러니까, ‘성검’. 아주 오랫동안 아무도 뽑을 수 없었던 검이었다. 검이 제 역할을 다하고 꽂힌 자리는 전쟁 후의 폐허가 아닌 유적지가 되었고, 검의 이름 또한 성검에서 유물로 바뀌었다. 그런 ‘유물’을 뽑아버린 사람.
“그 후로 어떻게 되었나? 성국의 관계자와는 연락했겠지?”
“예…. 성국 측에서는 굉장히 놀랐다는 듯이 반응하며, 즉각 왕궁으로 사절단을 보내겠다고 답했습니다. 물론, 수백 년간 뽑힌 적이 없던 성검을 뽑았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반응할 이유가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신하의 보고에, 아그네스의 눈가가 좁아졌다.
“신병은 확보했나?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파악했을 거 아닌가.”
“예. 우선 위병 검문소에 잡아두고 있습니다. 범법을 저지른 게 아니기에, 감옥에 가둬두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만…, 다행히도 조사에는 성실히 응해주고 있습니다.”
잡아뒀다면 경을 쳤을 상황이지만, 아그네스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러냐. 지금까지 얻어온 정보를 보고할 수 있도록 하라.”
“이름은 일로이라고 하더군요. 가족이나 성은 없는 것 같습니다. 왕도에서 모험가로 먹고살고 있고, 범죄 이력은 없습니다. 널리 알려진 이름도 아니니, 실력도 평범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 듯합니다. 정말 특기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성이 없다고.”
아그네스의 중얼거림에, 보고하던 신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흔한 일은 아니지만, 연고 없이 자란 아이들은 여전히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
“예. 허면 폐하께서는 그 사람을 어떻게 처분하시겠습니까? 역사적으로 성검을 뽑아 든 사람은 곧 세상을 구원할 영웅이 된다는 전설이 있습니다만…. 세상을 구원한다는 건 곧 세상이 위험에 빠진다는 뜻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신하가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전설과 낭설에 불과한 이야기…. 그저 유언비어로 치부하고 넘길 수 있는 이야기지만, 현재 대륙 곳곳의 조짐이 심상치 않다는 점이 걸립니다.”
“한 번 만나보마.”
아그네스는 그리 말했다. 신하들은 우물쭈물하며 저마다 한 마디씩 말을 던졌다.
“폐하. 그래봤자 한갓 평민에 불과합니다. 검 한 자루 뽑았다고 그 태생이 바뀌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폐하. 부디 재고하여 주시옵소서.”
“더 나은 의견을 제시해보거라. 고작 한다는 소리가 태생이 밑바닥이니, 신분이 미천하다니, 그런 골방에서 썩어가는 뒷방 늙은이들이나 하는 말이냐.”
여왕의 말은 싸늘했다. 아부를 좀 떨겠답시고 입을 연 원로들은 꼬리를 빼고 물러섰다.
“길을 안내하라. 지금 그를 보러 갈 테니.”
신하들은 당황하며 웅성거렸다. 보고를 올린 신하만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그네스를 안내하러 발걸음을 떼었다.
세상을 구할 영웅이라.
익숙하지 않은 말이었다. 영웅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연히 만들어지는 편이 좋다고 하리라. 시작부터 영웅인 이는 있을 수 없다. 그런 이가 있다면, 말의 무게에 깔려 으스러지며 뼈가 가루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왕은 무게와 상응하는 보상이라도 있지만, 영웅은 공명심뿐이다. 영웅의 위업은 절대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한다. 옷깃에 다는 훈장 하나와 돈 몇 푼 정도일까.
그렇기에 영웅이라 불리는 것이겠지.
“이쪽입니다, 폐하.”
마차를 타고 짧은 길을 달려 도착한 위병소는 시끌시끌했다. 어디까지나 공식 방문이 아닌, 몰래 행차한 것. 위병소의 당직사령을 제외한 누구도 여왕의 방문을 알지 못했다.
“잘 잡아두고 있었습니다. 궁금하신 점도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직사령의 목소리는 벌벌 떨리고 있었다. 여왕은 그의 주절거림에 답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기이한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주 특징적이고 독특한 기척. 아그네스는 홀린 듯 고개를 돌려보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금 저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당직사령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의 말이 여왕에게 완전히 가 닿기도 전에, 아그네스의 손이 문고리를 밀었다. 단촐한 책상과 의자만이 놓여있는 방안에는, 잿빛 머리를 한 남자가, 검 한 자루를 들고서 의자에 못 박힌 듯 앉아있었다.
“네가 일로이냐.”
일로이라 불린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그네스는 그 텅 빈, 끝없이 공허하게 추락하는 청록색 눈동자를 보며 신하들의 말을 떠올렸다.
이게 세상을 구할 영웅이란 말인가.
아그네스의 눈에 비친 일로이는, 구원을 시행하는 쪽이 아닌, 구원이 필요한 쪽이었다.
==
“참으로 우습구나.”
아그네스는 또 한 마리의 마물을 베어내며 중얼거렸다.
“나는 내가 진 책임이 무거운 줄 알고 있었다.”
마물의 시체가 쌓인다. 아그네스와 두 기사는 아직 멀쩡하게 서 있었다. 그런 그들의 앞으로, 기세가 다른 마물들이 접근해왔다. 마물들은 아가리를 쩍 벌리며 인간의 말을 뱉어냈다.
“방해되는군. 죽어라.”
아그네스는 무시무시한 기세의 마물들을 바라보며 다시 혼잣말했다.
“하지만 네가 스스로 짊어진 책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더는 기사들이 죽어서는 안 되었다. 아그네스는 호위 기사들이 마물에게 달려들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마물은 노성을 내뱉으며 아그네스의 검을 맞받아치려 했다. 아그네스의 검은 그들의 반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새빨간 오러는 방어하는 팔째로 마물을 갈라버렸다.
아그네스의 움직임은 마물에 맞춰 훨씬 빨라졌다.
“그렇군! 네년이 그들이 그렇게 말하던 용사였구나!”
무언가 단단히 착각한 마물이었지만, 아그네스는 오해를 정정하지 않았다. 한층 더 빠르고 강하게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아그네스를 용사로 착각한 마물의 어깨가 잘려 나갔다. 다음 검로에 마물의 머리가 베였다. 머리를 베고도 모자라, 아그네스의 검은 다음 마물을 노리고 나아갔다. 마물의 피가 흩뿌려지며 땅을 다시 적셨다.
“기꺼이 받아보마. 네 책임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용사를 보고 느낀 건 안쓰러움과 동정이었을까, 혹은 동질감이었을까. 구원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것만 같은 이가 세상을 구할 운명이라는 사실은 거대한 모순이었다.
“죽어라!”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 팔을 피했다. 피할 수 있는 공격을 피하지 않는 건 낭비였다. 피할 수 없는 공격은 막아내고, 막아내지도 못할 공격은 흘렸다. 그것도 안 되면, 죽음이 한 걸음 앞으로 성큼 다가오는 것이었다. 전투의 원리는 그러했다.
쾅-!
정면으로 짓이긴다. 아그네스는 망설임 없이 잿빛곰 한 마리의 머리를 두 갈래로 쪼개버렸다. 두더지의 목이 다음이었다. 옥수수밭에 홀연히 나타난 소용돌이와 같이, 아그네스의 주변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그네스가 검을 휘두를수록, 그녀에게 접근하는 마물의 수는 늘어났다. 그럼에도 아그네스의 검로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빌어먹을 년이!”
마물 하나가 목이 잘리기 전 내뱉은 외침에 아그네스가 웃었다. 마물의 피로 흠뻑 젖은 그녀의 미소는, 섬뜩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
“마침 잘 됐구나. 아예 이쪽으로 전부 끌고 오너라. 내 기꺼이 너희들을 맞아 상대해주마.”
즐겁다는 듯, 목소리 높여 아그네스가 말했다. 마물들은 아그네스의 요청을 충실하게 이행해주었다. 더, 더. 아그네스의 앞으로 몰려오는 마물의 수는 계속 늘어만 갔다. 아그네스는 검을 휘두르고 다시 휘둘렀다. 오러의 그물망 사이로 빠져나온 마물은 아그네스 옆의 기사들을 덮쳤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구나.”
한 번의 흐트러짐. 아그네스의 몸이 튕겨 나갔다. 땅을 구르는 아그네스를 보호하려다 남은 두 기사 중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기사는 필사적으로 여왕을 일으켜 성안으로 돌아가려 발을 뻗었다. 아그네스는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펼쳐진 지옥도를 바라보았다.
“나는 남겠다. 너는 돌아가라.”
“그렇게는 안 됩니다, 폐하.”
아그네스는 발을 질질 끌며 전장에 남아있으려 했지만, 이 이상의 발악은 만용이며 무용하다는 사실 또한 깨닫고 있었다. 성벽의 병사들이 바삐 무언가를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성을 지켜야 한다. 내가 돌아가면 문이 무너진다.”
“무너지지 않습니다, 폐하. 병사들이 아직 굳세게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 퇴각한다고 하더라도 성문은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거짓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또 수천 명의 병사가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한다.”
아그네스는 힘겹게 말하며 버티고 섰다.
“그렇다 하더라도 몸을 보전하는 것이, 군주된 자의 책임입니다. 희생을 내더라도 병력을 끝까지 추슬러서 이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군주된 자의 의무입니다.”
“뭐가 의무고 뭐가 책임이냐. 너는 네 백성 수천 명, 수만 명의 피로 이 성을 막아내는 게 진정한 승리라고 생각하느냐.”
“예. 그런 방식으로라도 막아야지요. 추악하게 결단을 내리셔야죠.”
“그건, 빌어먹을 목숨을 건지려는 자들의 변명임을 아직 모르겠느냐!”
아그네스는 소리를 내지르며 호위 기사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호위 기사는 안간힘을 쓰며, 제 손안을 벗어나려는 아그네스를 잡았다.
“놔라.”
“절 베어 죽이신대도 그렇게는 안 됩니다.”
실랑이가 벌어지는 사이, 또 다른 마물의 파도가 다가왔다. 아그네스는 멍하니 그 파도를 응시했다. 마물은 실로 바다와 같았다. 한 번 파도를 물려도, 끝없이 새로운 파도가 몰아닥치는 바다. 여왕의 손이 간절히 검을 움켜쥐고, 기사의 손에 힘이 풀렸을 때였다.
“…아니, 새로운 마물들이 아닙니다.”
마물들은 무언가에게 쫓기고 있는 것 같았다. 한데 몰린 마물의 파도는, 군체를 형성하더니 다시 어딘가를 향해 굴러갔다.
“저건….”
그리고, 파도가 갈라졌다.
갈라지는 마물의 대양 너머로, 하늘을 꿰뚫는 새파란 빛이 번쩍거렸다.
“저들이 어떻게 여기를….”
그리고 그 푸른 빛의 바로 뒤편에는,
에버노드의 군기가 높이 휘날리고 있었다.
“우리가 누구냐!”
그 목소리는 마물의 포효를 뚫고서 전장에 울려 퍼졌다.
“북부의 전사입니다!”
그리고, 수만에 달하는 북부의 정예병은 한 몸처럼 그 물음에 응답했다.
“우리의 임무가 무엇이더냐!”
“북부의 적으로부터! 이 나라를 수호하는 것입니다!”
쿵. 쿵. 쿵. 쿵.
군세가 집결하는 소리가 심장을 울렸다. 아그네스는 멍한 표정으로, 언덕 위에 나타난 군세를 바라보았다. 아그네스는 북부대공의 입 모양을 읽어냈다.
“용사, 일로이에게 입은 은혜를 갚으러 왔습니다.”
말은 더 필요하지 않았다.
퀘노어 스트로프가 검을 앞으로 뻗었고,
북부의 눈보라가 마물의 검은 해일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