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6 - 136. 카이로스 수성전 (3)
퀘노어 스트로프는 강하다.
이는 대륙 사람들에게 태양은 뜨겁다, 얼음은 차갑다 따위와 같은 명제로 취급받는다. 어떤 기준을 들먹이던, 퀘노어 스트로프는 그 위에서 노닐고 있다. 퀘노어와 검을 겨루어 본 사람들이라면 하나같이 하는 말이었다. 어떤 거대한,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마주한다는 느낌. 부딪히면 튕겨 나가고 오르자니 미끄러지는. 그런 거대한 빙벽.
그리고, 퀘노어 스트로프는 거인과 일로이의 전투를 보며, 자신과 결투한 이들이 느꼈을 감정을 느꼈다. 한계선의 새하얀 장막 너머로, 거인과 인간이 튀기는 불꽃이 보였다. 일로이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불사르며 싸우고 있었다. 거인이 태산의 봉우리보다 큰 주먹을 꽂아 내리면 두 줄기 꼬리를 그리며 은백색 유성은 비상한다.
쩡-!!
유성을 찍어 내리려는 거인의 손이 점점, 다시 위로 올라갔다. 퀘노어는 거인의 무게를 밀어내는 일로이를 바라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는 지금도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매분, 매 순간, 세계를 어깨에 짊어지고 지금도 그는 해낼 수 없던 일들을 해내고 있다. 거인에게 튕겨 나가도, 그 주먹이 자신을 포착해도. 용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한계점은 용사의 칼끝에서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오만했다.
퀘노어는 그리 생각했다.
더 올라갈 길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뚜렷한 목표가 존재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자신이야말로 가장 앞에서 걸어가고 있으며, 자신이 마주하는 한계가 세상의 한계이리라 생각했다.
퀘노어의 세계는 그때 부서졌다. 한계라 생각했던 벽 너머의 세상이 보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탈피하는 뱀처럼 마나의 겉껍데기가 부서졌다. 상식이라 생각했던 것이 뒤바뀌었다. 퀘노어 스트로프는, 그날 이후 완전히 다른 검사가 되었다.
==
“꽤 거창한 원정길인 듯합니다, 대공.”
퀘노어가 말 위로 올랐을 때, 농담하듯 리스가 말을 붙여왔다. 퀘노어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새 깨달음을 얻은 퀘노어는 한층 더 젊어 보였다. 저택의 문을 걸어 잠그고 몇 날이고 명상에 몰입하고 있을 때는 걱정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통과한 퀘노어는 그 어느 때보다 표정이 밝아 보였다.
“그렇지. 복수의 때도 다가오고 있어. 보은의 때 역시 다가오고 있는 듯하군.”
리스는 퀘노어가 풍기는 거대한 압박감을 느꼈다. 퀘노어와 일전에 싸워 본 이들이 지금의 대공을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아마 다시 싸워보고 싶다는 호승심마저 사라지지 않을까.
“날이 좋구나. 하늘이 활짝 개었어.”
퀘노어는 고개를 젖히고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훈훈하면서도 습한 여름 북부의 공기는 퀘노어 깊이 폐부를 지나, 온몸의 실핏줄 구석구석을 돌며 몸을 일깨웠다. 퀘노어의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서는 것과 동시에, 기척이 죽었다. 퀘노어는 북부의 땅을 딛고 선 말의 몸으로 흙이 녹았음을 알았다. 질척거리지 않는 부드러움. 먼 길을 떠나기 좋은 때였다.
“이전 거인의 습격 이후, 마물이 꽤 많이 줄었습니다. 단체로 움직이는 현상은 보고되어도, 위협적인 마물은 거의 없는 듯합니다.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기사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마물은 크롤러 몇 마리 정도뿐일 겁니다.”
리스는 웃음기를 지우고는 그리 보고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퀘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다른 지방은 이야기가 다르죠. 특히, 누가 지시라도 내린 것처럼 왕도 인근의 마물 활동이 급증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 조만간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일이 터진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나?”
퀘노어는 눈을 감은 그대로 입만을 열어 질문했다.
“길게 말할 것 있겠습니까. 에버노드나 바크틴스가 겪었던 일을, 이제는 온 왕국이 겪게 되겠죠. 마물이 이제껏 보지 못한 규모로 대륙을 휩쓸 겁니다. 특정 개체가 지휘하고 있다면, 전 대륙을 휩쓸 만한 광풍이 왕도만을 노리고 불어닥치겠죠.”
그때는, 왕도가 아무리 견고한 성채에 보호받고 있다고 해도 순식간에 무너져버릴 거다.
“북부는?”
“방어에 집중한다면, 단 하나의 영지민도 잃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북부에 거인도, 거인을 따르던 군단장급 마물도 없습니다. 무식하게 밀고 들어와 봐야 에버노드는 뚫리지 않을 겁니다.”
리스는 확언했다. 퀘노어는 리스의 말을 귀로 받아 혀 위에서 굴려보았다. 방어에 집중한다면, 에버노드는 끄떡없이 건사할 수 있다. 하지만 왕도는 북부의 도움 없이 버텨낼 수 없다. 퀘노어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는 뻔했다.
“리스, 지원군을 보내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게 무엇이 있다고 했지?”
“…우리 몸은 건사할 수 있는지. 지원군을 보내고 성채를 유지하는 데에 무리가 없는지를 먼저 검토해보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던져진 듯한 질문. 리스가 신하 된 자의 본분으로 대공의 질문을 받아내자, 대공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이윽고 눈을 뜬 퀘노어 대공의 눈은, 전의로 새파랗게 얼어붙으며 불타오르고 있었다. 고삐는 느슨했지만, 고삐를 쥔 손에는 핏줄이 솟아있었다. 대공은 말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북부 근처 마물의 씨를 말려야겠다.”
리스가 대공의 말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퀘노어 대공은 그런 리스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소리 내어 너털웃음을 내뱉었다.
“명색이 북부의 전사라는 사람들이, 더 약해진 적이 두려워 성 안에서 꽁꽁 싸매고 있겠다는 말이냐?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도 들어본 적 없느냐?”
“맞습니다만…,”
머뭇거리는 리스의 어깨 위로, 대공의 손이 얹혔다.
“무얼 그리 놀라느냐. 지원군을 보내기 전에 생각해야 할 건에 대해 논하고 있었지 않나.”
“그게 그 말씀이었습니까. 애초에 북부에 우환을 두지 않고, 왕도를 지원하기 위해 직접 나서시겠다는.”
“내가 나서는 게 맞다. 아무래도 왕도의 힘만으로 그 많은 마물을 막기에는 역부족일 듯하니 말이다. 폐하께서 계시고, 일로이를 제외한 용사 파티도 있을 거고, 라우라…. 그 마법사도 있긴 하지만, 그들의 힘만으로는 힘들 거다.”
대공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로이 또한 나와 같은 사람을 믿으니, 그리 잠적한 것이겠지. 우리는 그렇다면, 그의 믿음에 부응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북부는 그에게 목숨 하나씩을 빚지고 있어.”
“뭐, 용사님의 말씀이라면 어쩔 수 없죠. 저는 두 개 빚진 거로 하겠습니다. 순찰을 떠났을 때 한 번, 그리고 거인을 용사님이 쓰러트렸을 때 한 번.”
리스가 손가락을 척, 내밀며 말했고, 대공은 눈을 가늘게 뜨고 리스를 바라보았다. 리스는 대공의 눈초리에도 주눅 들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병력을 모으고 기초 훈련을 숙달시키는 건 네게 맡기마. 기존 숙련된 병사들의 직위를 올려주고, 신규 병사들을 죽기 직전까지 굴려라.”
“그런 건 또 제 전문 아니겠습니까. 맡겨 주십쇼. 출정하는 날까지 1인분까지는 아니더라도, 폐가 되지 않도록 단련시켜 놓겠습니다.”
리스는 으스스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루크와 함께 북부의 마물을 소탕하기 위한 순찰 조를 구성하겠다. 다시는 그 잡것들이 에버노드와 북부에 어슬렁거리지 못하게 만들어 놓을 거다.”
그렇게 북부의 전쟁은 왕도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퀘노어는 직접 나서 북부의 마물을 학살하고 다녔다. 에버노드의 남쪽으로는 루크의 군대가. 북쪽으로는 퀘노어와 몇몇 기사들이 마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학살했다. 작든, 크든, 강하든, 약하든. 에버노드의 군세는 조건을 가리지 않았다. 북부에 집결하던 마물들은 에버노드의 말발굽 아래에 뭉개졌다.
“남쪽으로 간다.”
“그러기 위한 준비 아니었습니까.”
북부 마물이 씨가 말라, 온종일 숲을 돌아다녀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 날이었다. 퀘노어는 전사자들의 언덕에 올라 에버노드를 내려다보며 그리 말했다.
“에버노드는 괜찮을 겁니다, 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루크의 자질은 뛰어났다. 내심 아들에게 에버노드를 맡길 수 있어 다행이라고, 퀘노어는 생각했다. 간사한 생각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번 전쟁까지 루크가, 가족이 따라오지 않아도 괜찮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퀘노어는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돌아오시는 거죠?”
카린이 퀘노어의 옷자락을 슬쩍 잡았다. 대공은 담담하게 카린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강해졌다. 티를 내지 않는 것일 뿐이겠지만, 성장했다. 얼마나 됐다고 부쩍 키도 자랐다. 아이는 빠르게 커가고 있었다.
“용사님을 도와주러 갔다오마.”
용사님, 이라는 말에 카린의 표정이 화색에 물들었다. 일로이가 남기고 간 강렬한 인상은 아직 카린의 뇌리 깊숙한 곳에 남아있다. 아마 그리고, 평생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있으리라.
“싸움이 끝나면 용사님을 뵐 수 있을까요?”
반짝거리는 카린의 눈에다 대고,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던 대공이다.
“한 번 물어보도록 하마.”
그렇게 폭풍이 되어버린 북부의 수호자는,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
“단단히 준비하고 있던 모양입니다.”
얼떨떨한 목소리로 기사가 말했다. 아그네스는 그 말에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대공과 북부의 군대는 말 그대로 거칠 것이 없다는 둣 마물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에버노드다…! 에버노드의 스트로프 대공께서 오셨다!!”
누군가가 흥분한 목소리로 성벽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그네스는 고개를 아주 천천히 끄덕였다. 마물의 바다는 갈라지고 있었다. 마물의 지휘 계통은 왕도의 성벽을 노리라 명하고 있었기에, 갑작스레 옆에서 덮쳐오는 병력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었다. 성벽과 북부의 눈보라 사이에서 마물은 깔려 죽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서, 푸른 섬광이 울부짖고 있었다.
“카이로스를 위하여! 에버노드를 위하여!”
북부 영웅들의 검이 그에 맞춰 호응했다.
“우리가 맞서 싸웠던 마물이 이보다 약하더냐!”
“아닙니다!”
“한계선의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더냐!”
“아닙니다!!”
마물의 피에 굶주린 광전사. 기사들은 눈에 새파란 광망을 띠고 검을 휘둘렀다. 리스는 입가에 사나운 미소를 띠고 있었고, 세린이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세 마리의 마물을 한꺼번에 베어버렸다. 그리고, 아그네스에게 퀘노어는 다가오고 있었다. 북부의 명마 한 마리와 함께.
“오르시죠.”
퀘노어는 고삐를 아그네스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북부는 마물의 습격도 당하지 않는 것이더냐.”
“북부에 위협이 될 만한 마물은 이제 남아있지 않습니다.”
퀘노어의 말에, 아그네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용사에게 진 빚을 갚으러 왔다더니, 그만큼 강해져서 돌아온 것 같은데.”
“일로이 덕분입니다. 그 녀석에게도 이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퀘노어는 미소를 지으며 검을 들어 보였다. 아그네스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의 오러가 에버노드의 보검을 휘감고 있었다.
“…내가 따라잡으려면 아직 한참은 남았겠어.”
“폐하기에, 시간만 있으면 충분히 도달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그네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전쟁통에도, 마물이 수만 마리 버글거리는 와중에도, 북부의 말은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 아그네스는 전장을 바라보았다. 이길 수 있다. 이대로 마물을 쓸어버릴 수 있다.
“먼저 가겠다.”
아그네스가 말하며 말을 몰고 갔다. 퀘노어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 폐하를 위하여.”
희망이란, 절망 속에서 가장 잘 보이는 법이었다. 호응하는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왕도의 병사들이 북부의 군대에 호응하기 위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성문이 올라가고, 편성된 지원 부대가 성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우리도 나간다!”
“언제까지 성벽 안에 틀어박혀 방어만 하고 있을까 보냐!”
그리고.
절망 또한, 희망 속에서 가장 잘 보이는 법이었다.
“안돼!!”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퀘노어가 뒤를 돌아보며 눈동자를 떨었다.
…이게 뭐야.
지원을 위해 나섰던 병사들이 없다. 아니, 모조리 핏덩어리가 되어 전장에 흩뿌려진 상태였다. 그것은, 퀘노어의 존재감 마저 아우르며 갑자기 그곳에 나타났다.
금빛 사자가, 눈을 번득이며 퀘노어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