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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37화 (138/158)

Chapter 137 - 137. 카이로스 수성전 (4)

사자는 늙었다. 아니, 늙었다고 하기보다는, 절대적으로 나이가 많다고 하겠다. 나이를 먹지만

늙어가지 않는 생물이니. 인간 중에서 그의 존재를 아는 이는 많지 않았고, 이름을 아는 이는 없다. 그는 신화의 전쟁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왔고, 모든 마물은 그를 원형으로 한 후계다. 계통수의 뿌리에 존재하는 고대의 생명은 그의 주인이 강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물들은 그에게 종속된 존재며, 그는 주인에게 종속된 존재였다.

사자는 오만한 눈빛으로 기사들을 마주했다. 발밑에 깔린 인간의 시체를 잘근, 잘근 밟아버리며 사자는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자의 앞발은 사람의 몸통보다도 컸다. 어떤 소리도 토해내지 않는 그 입가에서는, 초여름의 태양 아래에도 수증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혈류를 타고 흐르는 마력의 잔재가 기화된 것이었다.

“…저게 도대체 뭡니까.”

리스가 침음성을 흘렸다. 강하다, 아니다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저건, 그대로 마물들의 군단보다 강대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리스는 애써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부정하려 했다.

거인.

저 사자는, 홀로 그 정도의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 아래에 살아 숨쉬는 모든 걸 용납하지 않는, 그런 압도적인 존재감. 거인과의 전투를 경험해본 적 있는 이들은 바짝 얼어붙은 표정을 지었고,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처음으로 겪어보는 감각에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돌렸다. 사자는 단신으로 군단과 대치했다. 그의 존재가, 쓰러지는 마물들을 하나둘씩 다시 일으켰다.

“저게 재앙은 아니겠지. 저런 게 또 존재한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어.”

아그네스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그네스의 뒤를 따라가던 퀘노어 대공은 검을 빼 들고, 눈을 번득이며 말머리를 돌렸다. 사자의 존재감에 병사들이 움츠러들었다. 마물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지만, 마물과 싸우는 자가 마물에게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 대공은 새벽 안개처럼 자욱하게 내려앉는 공포를 걷어내려 마력을 끌어올렸다.

“늙은 놈이로군요. 마물들을 총 통솔하는 존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재앙처럼 말이죠.”

퀘노어의 말에, 아그네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재앙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그에 준하는 존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퀘노어가 서서히 마력을 발산했다. 손에 들린 보검이 사납지만 조용하게 떨리며 검명을 내었다. 퀘노어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분노하고 있었지만, 이성을 잃지 않았다. 강대한 적의 기세에 압도당하지도 않았다. 타오르는 푸른 눈에서 엿보이는 건, 호승심과 살의였다.

“제가 가겠습니다. 북부의 병사들을 잘 부탁하겠습니다.”

퀘노어는 담담하게 말하며 말에서 내렸다. 퀘노어가 전장에서 이탈하면 북부의 병사들을 지휘할 사람이 필요했다. 아그네스는 같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그녀 나름의 역할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기고 오너라. 병사들은 걱정하지 말고.”

퀘노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아갔다. 보검이 품고 있던 마력을 드러내며 한기를 발산했다. 때가 왔다. 그날, 거인에게 패할 뻔한 굴욕을 되갚아줄 때였다. 사자에게로 향하는 발자국마다 냉기를 머금은 푸른 불꽃이 남았다. 검은 무겁고, 목숨은 가벼웠다. 퀘노어는 검의 무게를 느끼며 그리 생각했다.

“두렵지 않은 거냐.”

사자가 입을 열었다. 사자의 눈빛은 여전히 오만했지만, 이제 퀘노어에게 온전히 주목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받아내는 게 부담이 아니었다. 두 존재의 시선의 저울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평형을 이루었다.

“두려워해야 하는 건 네놈이다.”

퀘노어는 그리 선언하며 온전히 힘을 드러내었다. 작은 폭풍이 대공의 발치에서 일었다. 바닥에 균열이 일고, 대기가 찢어지며 울부짖었다. 사자의 눈에서 오만함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 금빛 눈에 야성이 서리고 상완의 힘줄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있었구나.”

사자의 목소리는 기쁜 기색으로 울렸다. 달갑지 않은 동시에, 기꺼워한다. 이를 드러내지 않던 사자의 입이 벌어지며 송곳니가 번득였다. 갈기는 곤두서고 발톱이 드러난다. 사자는 공기를 마시고, 제 피를 느꼈다. 마력과 뒤섞이며 혈관을 질주하는 피를 느꼈다.

“그들의 피가 이어지고 있었군.”

신화의 전투는 사자의 핏줄에 각인되어 있다. 영웅들의 검이, 마법이 되살아났다. 영웅들은 대항자였고, 그는 수없이 많은 영웅을 물어 죽인 시련이자 괴물이었다. 영웅 살해는 그의 본능이자 임무, 그리고 생의 목표였다.

“기쁘구나. 내가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니.”

퀘노어가 뿜어내는 기세는 신화의 영웅 못지않았다. 되려 그들 대부분보다 강했다.

“너를 죽이면 그분들도 기뻐하겠지. 네 목을 씹어 그 피로 목을 축이면, 나는 또한 강해질 거다. 네 목숨은 그분들의 강림을 위한 제물이 될 거고, 우리의 승리를 상징할 거다.”

사자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리 말했다. 입꼬리를 위로 가게 하여 입을 쩍, 벌리고 이를 드러내는 것이 웃음이라면 그것도 웃음이리라. 사자는 그렇게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퀘노어 역시 사자에게로 한 발 내디뎠다.

“그거 다행이군.”

퀘노어 역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완벽한 평형을 이루는 힘은 어디로도 새어 나가지 않았다. 그저 그들을 감싸며, 휘감아 돌 뿐이었다. 두 존재는 둘만의 세계에 속해 있었다. 외부의 긴장감 어린 시선은 그들이 알 바가 아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

시선과 시선의 교환. 호흡과 호흡의 오르내림. 맥동의 불일치와 일치. 사소한 기세와 움직임의 변화. 가만히 서서 서로를 관찰하는 것마저 전투였다. 보이지 않는 전조가 그들만이 해석할 수 있는 신호로 변환되었고, 신호는 곧 목젖을 겨누는 칼끝이 되었다. 머릿속의 초침이 째깍거릴 때마다 수십 번, 수백 번의 칼날이 교환되었다.

수백 번의 교환이 수십 차례 이루어졌을 때, 어떤 지점에서 그들은 멈춰 섰다. 마시고 내뱉은 숨이 상대방의 호흡에 빨려 들어간다. 들어간 호흡은 정련되어 마력과 뒤섞였다. 서로를 가늠하고, 거리를 파악하고, 사선(死線)을 정했다.

“….”

마지막으로, 서로가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가 되었을 때, 사자는 앞발을 쳐들었고 퀘노어는 검을 낮추었다. 보검의 검날에 새파란 오러가 서리고, 퀘노어는 울부짖는 질풍이 되어 금빛 사자를 향해 돌격했다.

콰광-!!

격돌은 전장을 진동시키며 작은 지진을 일으켰다. 사자의 내려찍는 앞발은 올려 베는 퀘노어의 검날을 막아서고 있었다. 퀘노어는 검날을 통해 전해지는 무게에 눈살을 콱 찌푸렸다. 땅이 깊게 파이며 얕고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어내었다. 사자는 그대로 눌러 죽이기를 원했고, 퀘노어는 사자의 균형을 무너뜨리기를 원했다.

텅-!!

마력과 마력이 반발을 일으켰다. 교착은 끝났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두 존재가 원하는 일은 무엇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퀘노어는 이어지지 않는 검격을 억지로 이어 붙여 다음 참격을 쏘아냈다. 사자는 곧장 이어지는 공격을 피하지 않고 앞발로 맞받아쳤다.

“…비정상적이긴 하군.”

퀘노어가 중얼거렸다. 퀘노어가 전력을 다한 오러를 두 번이나 막아내고도 사자는 피 한 번 흘리지 않고 멀쩡했다. 되려 만족스러운 듯 갈기를 떨치며 다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때 상대했던 영웅들보다도 강하구나. 쓰러트리는 보람이 있겠어.”

퀘노어가 이를 부득, 갈았다. 이번에 들어오는 건 쫙 벌어진 사자의 아가리였다. 사자는 양 앞발을 크게 벌리며 상완으로 찍어누르려는 듯 퀘노어를 내리찍으려 했다. 퀘노어는 활짝 벌어진 사자의 아가리에 검을 쑤셔 넣으려 했지만, 검이 사자의 입천장에 꽂히기도 전, 사자가 귀신같이 턱을 닫으며 검날이 잡혀버렸다. 사자는 그대로 목을 내저어 검과 퀘노어를 떼어놓으려 했다.

“큭-!”

퀘노어가 이를 악물었다. 어깨가 뿌리째로 뽑혀 나갈 뻔했다. 사자는 퀘노어가 제힘에 저항하자, 가소롭다는 듯 더 강한 힘으로 굴복시키려 했다.

“말을 듣지 않는 족속을 굴복시키기란 즐거운 일이지.”

검날을 깨문 잇새로 낮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퀘노어와 사자는 눈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힘을 놓는 쪽은 선택지가 좁아지고, 힘을 유지해야만 대등한 싸움이 유지될 수 있었다. 사자는 입안을 불태우는 새파란 오러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더 강하게 검을 깨물었다.

“네놈을 굴복시키고 죽인다면 더 특별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거다.”

“오만하군.”

퀘노어가 마력을 더 끌어올렸다. 이번에는 사자가 놀랄 차례였다. 방금 당기는 힘에는 검을 놓칠 뻔했다. 그리고 그 힘이 유지되고 있었다. 자꾸만 성가시게 입안을 불태우는 오러와 더불어, 사자에게 이 대치는 점차 불리하게만 흘러가기 시작했다.

“허.”

사자는 코웃음 치는 소리와 함께 검을 순식간에 놓았다.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퀘노어는 단 한 차례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해방된 힘은 새로운 동력이다. 퀘노어는 공중에서 몸을 뒤틀며 검을 꽂아 내렸다. 사자에게 검끝이 닿지도 않는 거리에서 휘둘러진 검은 새파란 현월을 그리며 오러의 기파(氣波)를 쏘아냈다.

콰과과광-!!

땅에 거대한 상흔이 그어지며, 폭발이 일었다. 폭심의 사자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휘청거렸다. 그 분노를 드러내듯, 상완의 얼굴과 함께 일그러지며 꿈틀댔다.

“네놈-!”

이번에는 사자가 힘을 더욱 끌어올렸다. 땅을 아우르는 포효가 사자의 목청에서 터져 나오고, 충격파가 일며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근처에서 전투를 벌이던 이들은 마물과 사람을 가리지 않고 쓸려 날아갔다.

“잔재주 따위를-!”

사자가 신형을 날렸다. 풀밭 위로 흐릿하게 금빛 잔상이 그림자처럼 남았다. 사자 자체가 거대한 칼날이 되어 키 큰 풀을 베었다. 돌진은 피하거나 막을 수 없다. 퀘노어는 본능적으로 그를 깨달았다. 더 큰 힘으로 밀어내거나 흘려야 – 힘의 방향을 뒤틀어야 한다.

외길은 분기했다. 어느 한쪽은 삶이었고 한쪽은 죽음이다. 바로 낭떨어지로 떠밀지는 않지만, 잘못 선택한 분기점은 걷는 자를 조금씩, 아주 천천히 낭떠러지로 인도한다. 선택하지 못하면, 길은 무너져내리고 낭떠러지로 변모한다. 낭떠러지 아래로는 바람이 깎아낸 바위에 울부짖는 파랑이 발길질하고 있다.

퀘노어는 전자를 선택했다. 맞선다. 다가오는 금빛 칼날에 정면으로 부딪쳐 맞선다. 살기는 형태가 되어 직접적으로 살갗을 찔러왔다. 어긋나면 안 된다. 힘의 충동은 절정과 절정이 부딪쳐야만 한다. 조금이라도 그 타이밍이 엇나가면 죽는다.

쩡-!!

검과 발톱이 충돌했다. 백중세다. 사자와 영웅이 그어놓은 사선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선은 저울이 되어 누군가를 죽음으로 떨어트릴 때까지 휘청일 거다.

발톱은 검이 되고 검은 발톱이 되어 뒤엉켰다. 사자의 검은 세 자루였다. 그리고 세 자루의 검을 다루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퀘노어의 검은 한 자루다. 한 자루의 검으로 세 자루의 검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세 번 검을 휘두르는 건 패착이다.

퀘노어는 세 검이 그리는 검로를 포착하고 검을 내질렀다. 한 번의 휘두름으로 세 번의 휘두름을 상대한다. 두 걸음 앞을 내다보고 검을 휘둘러야 했다. 검과 발톱이 부딪치며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오러의 파편과 금속과 발톱의 파편.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격돌의 흔적이 얼굴에 작은 상처를 남긴다.

“끈질기군.”

사자의 말은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섞였다. 다시 앞발은 날아들었다. 왼쪽. 닿지 않게 흘리려면 날카롭게 날아드는 풍압도 고려해야 한다. 시선은 눈을 바라보고 오로지 기감으로 공격을 느꼈다. 검자루의 끝이 앞발을 밀어냈다. 밀어내는 힘만이 존재했다. 받아넘기는 건 밀어내는 과정이었다. 힘과 방향. 퀘노어는 몸이 사고하게 내버려 두었다.

내리치고, 올려 받는다. 심장을 노리고 쏘아진 회심의 검이 사자의 상완에 상흔을 남겼다. 신화의 비가 허공에 흩날리다 사라졌다.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가죽 밖으로 터져 나와 흐른 피였다. 사자는 분노하며 다시 울었다. 사자는 고대의 존재다. 고대의 존재면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었다. 인간이 대를 거쳐 쌓아온 세월을, 그는 개체로서 오롯하게 받아들이며 보내왔다.

그는 이 평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순간적인 힘이 터져 나오며 퀘노어를 밀어냈다. 태생의 차이가 균형을 무너트리며 처음으로 일방적인 공격이 적중했다.

쾅-!!

“커헉-!!”

퀘노어가 피를 토하며 튕겨 나갔다. 신화의 것이 아닌 피가 지면에 흩뿌려졌다. 사자의 발톱이 지나간 자리에서 돌풍이 울부짖었다. 공간이 세 갈래로 일그러져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결말이 보이지 않는가.”

사자는 다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자는 쓰러진 퀘노어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퀘노어의 갑옷 상의가 산산이 부서진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갑옷이 부서진 자리에는, 깊은 상흔이 그의 가슴팍을 좀먹은 채 피웅덩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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