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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38화 (139/158)

Chapter 138 - 138. 카이로스 수성전 (5)

눈앞이 핑 돌았다. 퀘노어는 제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세 줄기로 길게 그어진 상흔이 가슴팍에서 피를 주륵주륵 뽑아내고 있었다. 상처가 깊었다. 몸속 깊이 발톱이 남긴 자상이 느껴졌다. 숨을 쉴 때 피비린내가 올라왔고, 입에서 피가 꿀렁대며 흘러나온다. 퀘노어는 피를 뱉어내지 않고 삼켰다. 마나로 강화한 신체가 무색하게, 사자의 공격은 그대로 갑옷마저 찢어버리며 몸을 파고들었다.

“내게 도전한 이들은 언제나 그런 결말로 끝났다. 난 그리고 수백, 수천 년을 더 살아왔지만, 시간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줄 뿐이었지.”

사자의 말이 귓가를 울렸다. 퀘노어는 이명과 소음, 그리고 사자의 말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피가 자꾸 올라오고 있었기에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퀘노어는 땅에 검을 박아 넣고는 몸을 기대며 무게를 올렸다.

공기를 느낄 수 없다.

퀘노어가 느낄 수 있는 건 그 자신뿐이었다.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감각이 희미했다. 시야는 뿌옇고 소리는 먹먹하다. 후각은 피비린내로 마비되었고, 손발은 저릿하다. 쏟아진 피는 억지로 마력을 끌어내 더 유실되지 않도록 보충할 수 있었지만, 이미 사라진 피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핑 도는 머리를 부여잡아야 했다.

“하아….”

피를 흘리는 건 익숙하다. 깊은 상처를 입는 것도 익숙하다. 퀘노어는 공격할 때는 항상 선두에 섰고, 퇴각할 때는 항상 최후미였다. 전투에서 병사들이 그의 얼굴을 보는 건 전투를 시작할 때와 전투가 끝나고 난 후뿐이었다. 그러니, 상처를 입고 싸워도 좋았다.

“인간들은 꼭 다른 생물과 자신이 다르다는 듯 행동하지. 저렇게 상처를 입고도 발악하는 걸 보면, 여느 짐승 새끼와 다를 게 없는데 말이야.”

사자가 비웃음을 날렸다. 인간이 발악하는 모습은 언제나 좋은 여흥이었다. 생사가 수백 번 오가며 목을 찔러대도 인간은 그에 따라 희비를 바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거의 이겼다고 생각했을 때, 희망이 최고조로 다다랐을 때 자신이 다다른 곳이 하늘이 아닌 바닥이라는 걸 꺠닫고 난 후의 모습이란! 사자는 턱을 벌렸다 닫으며 코웃음을 쳤다.

“필멸이면서 언제나 불멸을 추구하는 안쓰러운 존재들이여.”

사자는 그런 인간들을 경멸하고 가엾게 여겼다. 사자가 슬쩍 고개를 낮추며 쓰러진 퀘노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죽음이 코앞에 이른 인간들은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였다. 두려움, 혹은 어떤 간절한 바람. 저 퀘노어라는 인간은 후자였다.

“너희들은 죽음으로써 불멸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겠지. 그것이 거짓된 희망이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한 채, 눈 가리고 아웅. 스스로가 한심하지도 않느냐.”

사자의 목소리에 위엄이 깃들었다. 전장의 정점에 선 이의 위엄이었다. 과거의 영광이 되살아났다. 사자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죽음의 냄새가 짙었다. 죽은 것들이 풍기기 시작한 냄새가 쌓이고 쌓여 삼각주를 이루었다. 사자는 그들이 한 길로 통하는 하구에 서서 게걸스럽게 죽음을 취하고 있었다. 영웅도 죽는다. 인간들은 그를 아직도 잘 모르고 있었다.

“경악이 느껴지느냐. 공포가 느껴지느냐.”

인간 병사들은 떨고 있다. 사자는 그 떨림이 기꺼웠다. 두려움과 분노. 허나 분노는 극소수였다. 창대를 쳐들고 고함을 내지르며 사자에게 달려들려던 인간들은 그의 발치에 이르기도 전에 다른 마물에게 덮쳐져 쓰러졌다.

“이게 인간이다. 버둥거려도, 벗어나려고 몸부림쳐도 그것이 네 운명이다.”

퀘노어는 고개를 들었다. 마력이 아직 남아있었다. 팔다리가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사자는 거인과 비슷한 존재감을 내뿜었지만, 결코 거인과 같지 않았다. 싸울 의지가 꺾였나? 퀘노어는 자신에게 질문해보았다.

아니.

팔다리가 하나씩 떨어져도, 마력이 바닥을 보여도, 아직 싸울 수 있다. 퀘노어는 그리 결론지으며 눈을 부릅떴다. 저 사자는 자신을 완전히 꺾을 때까지 목을 물어뜯지 않을 거다. 그러니, 꺾일 때까지 싸워야 했다. 제 죽음이 곧 꺾이는 것임을 각인해야 했다.

“미련하군.”

사자의 말에, 퀘노어는 다시 검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응수했다. 통증은 가슴에서만 머무르지 않았다. 사자의 발톱이 남긴 날카로운 참격은 가슴에서 발원해 몸의 모든 말단까지 갈가리 찢어놓는 듯한 통증을 전달하고 있었다. 검자루를 쥔 손의 감각이 무디다. 앞으로 한 걸음 걸어가는 다리가 쓸데없이 무거웠다.

“내 공격은 현상에서 그치지 않는다. 몸에 퍼지는 통증으로 알고 있겠지.”

검을 휘두르는 건 물론이고, 호흡조차 제한된다. 하물며 호흡과 함께 끌어내야 하는 마력의 박동은 더욱 고통스럽다. 바늘이 혈관 사이를 지나다니는 느낌. 퀘노어의 눈에 핏발이 섰다. 몸은 이제 그의 것이 아닌, 고통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계속 싸우겠다면, 내 흔쾌히 싸워주마.”

움직이지 않는 발을 움직인다. 들리지 않는 팔을 들었다. 퀘노어는 그렇게 다시 영웅 살해자를 향해 뛰어들었다.

쾅-!!

소리를 가르며, 벼락처럼 검이 떨어졌다. 몸에 고통이 번지고 있는 사람의 움직임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도리어 다치기 이전보다도 빨라진 움직임에, 사자의 눈에서 광채가 번득이고 입이 벌어졌다. 탐욕스러운 이빨은 굶주린 침에 젖어 번들거린다.

“그래! 더 부딪쳐와야지. 네가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내게 도전해야지. 그래야 내가 네놈을 굴복시키고, 목숨을 끊었을 때의 보람도 올라갈 테니.”

사자의 목소리는 포효만큼이나 크게 울렸다.

“와라. 그리고 네놈들에게 최고의 절망을 선사하게 해주어라.”

다시, 왼쪽 상완. 퀘노어의 검은 같은 곳을 세 번째 노리고 있었고, 매번 휘두르는 검의 속도는 더 빨라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틀어 공격을 튕겨냈다. 그리고, 다시 앞발을 퀘노어의 머리를 향해 휘두른다. 퀘노어는 위태로운 움직임으로 사자의 공격을 회피했다.

“방어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게냐.”

그 말대로, 퀘노어는 방어를 내던지고 사나운 질풍처럼 오로지 공격에만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결코 틀린 선택지는 아니었다. 걸레짝이 되어버린 지금의 몸으로는 방어 태세에 돌입했다가 제대로 된 방어 한 번 못해보고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으며 농락당할 테니.

“나름 현명한 판단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만….”

퀘노어의 검이 검로 위에 올라서기 전, 사자의 움직임이 끼어들었다. 부정당한 검격은 회복할 수 없다. 들이받힌 퀘노어의 몸이 붕 뜨며 날아갔다.

“그 검이 닿지 않는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제대로 착지하지 못한 퀘노어의 몸이 무너졌다. 한쪽 무릎을 꿇고, 검을 지지대 삼아 짚었다. 사자는 퀘노어가 몸을 다시 일으킬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남지 않았다. 몇 번의 공격이면 또 하나의 영웅이 그의 발아래 쓰러질 거다.

“대답해보지 않겠나, 현 시대의 영웅이여.”

속이 진탕이다. 통증은 더 선명해지고 있다. 출혈은 멈추지 않는다. 퀘노어는 힘겹게 숨을 내쉬고 검을 늘어뜨렸다. 이길 방법. 인간이 불멸의 존재를 죽이고, 극복할 방법. 퀘노어는 보검의 자루를 고쳐 쥐었다. 언젠가 용사가 쥐었을 검. 그때 불멸을 고꾸라뜨리던 일로이의 의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무슨 확신으로. 그 거대한 불멸과 멸망을 향해 단신으로 뛰어들었을까.

“일로이, 말해다오.”

퀘노어는 혼잣말했다. 검이 닿지 않을 곳에 검을 닿게 할 방법. 인간이 신을 죽일 방법.

“너는 어떻게 희망이 될 수 있었나. 절망 속에서 무슨 빛을 본 거냐.”

되뇌는 말소리가 검을 들어 올렸다. 사자가 앞발을 올렸다. 시야가. 하늘이 사자의 앞발에 가리었다. 하늘이 움직인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충격이 닥쳐왔다. 충격을 흘려낸 걸까, 다른 생각에 몰두해 감각이 무뎌진 걸까. 바닥에 내던져진 퀘노어의 호흡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나는. 죽음을 맞이해야 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퀘노어가 움직였다. 억지로 움직인 결과는 굼뜬 움직임이었다. 사자는 우습다는 듯,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다가오는 퀘노어를 바라보았다. 무거운 발걸음. 어떤 힘도, 의지도 없는 검. 사자에게 그건 불어오는 미풍보다도 무해했다.

슥.

퀘노어가 검을 들어 올렸고, 어렴풋한 오려가 보검의 검신에 맺혔다. 사자는 가만히 그 검끝을 바라보았다. 본디 그 어떤 날도 침해할 수 없는 가죽이다. 겨우 미약한 오러가 담긴 검 종도는, 거꾸로 부러뜨릴 수도 있으리라.

훙.

그리고, 떨어져 내리는 검을 바라보던 사자의 금빛 눈동자가 요동쳤다. 사자의 앞발과 뒷발에 힘이 들어가고 본능이 사자를 움직였다. 저건, 맞아서는 안 된다. 사자의 본능은 사자에게 그리 말하고 있었다. 사선이 눈앞에서 춤추고 있었다.

죽음.

불멸일 사자의 머릿속에 문득 그 단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사자는 네 발로 땅을 박차고 뒤로 펄쩍 뛰며 물러섰다. 그리고, 사자가 뛰어 지나간 자리 위로 퀘노어의 검은 천벌처럼,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떨어졌다.

툭.

힘없는 팔의 움직임이 검을 땅으로 떨어트렸다. 어떤 변화가 일어난 건 아니었다. 공간은 흔들리지 않았다. 공기도 그대로 흐르고, 땅이 파괴되거나 기파가 방출된 건 아니었다. 그게 이 공격을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자가 저 일격에서 느낄 수 있었던 건, 명백한 죽음뿐이었다.

“괜히 수천 년을 벌레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살아온 게 아니로군.”

식은땀이 갈기 사이로 흘러내렸다. 서늘한 한기가 엄습했다. 사자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그 감정과 감각을 공포감이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공포? 자신이?

“제 죽음은 무엇보다 명백하게 포착하고 있으니.”

미약하다. 상처 위로 덧그려진 상처는 지금도 시시각각 적의 목숨을 빼앗고 있을 터인데. 죽음에 가까워지는 건 자신이 아니라 저 인간일 텐데!

“허세를 부리는군. 다 죽어가는 고깃덩어리가.”

사자는 감정과 생각을 부정해야 했다. 그를 인정하는 순간 불멸은 패배한다. 불멸은 온전하기에, 변화에 민감하고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특히 불멸성을 건드리는 변화라면. 신화는 흔들리고 격은 깎인다. 불멸이 아닐 가능성. 즉, 죽음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이 싸움은 인간의 진흙탕 싸움으로 변모한다. 목숨을 건지려면 목숨을 내던져야 하는 동등한 관계의 싸움이 되는 거다.

그리고 목숨을 내던지는 싸움에서, 불멸자는 결코 필멸자를 이길 수 없다.

“안전선은 이제 없다, 사자.”

퀘노어의 입에서 선고가 떨어졌다. 상하는 없다. 그어놓은 사선도 없다. 둘은 이제 모두 사선이 아닌 생의 외길 위에 놓였다. 서로의 길을 깎고 자르며 낭떠러지로 떨어지라 말해야 한다.

“목숨을 내걸어라.”

“…건방진!”

사자는 일갈을 내지르며 돌진했다. 퀘노어는 달려오는 사자를 바라보았다. 사자의 눈은 더 이상 사냥감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동등한 대상, 싸워야 하는 적. 혹은 자신을 향한 명백한 위협을 바라보는 눈. 그 사실이 퀘노어의 검을 더욱 차분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 입을 다물게 해주마!”

사자는 억지로 그 검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퀘노어는 검을 그을 뿐이었다.

피가 솟구쳤다.

퀘노어의 것은 아니었다.

사자의 얼굴은 경악에 물들고, 뒤이어 고통에 휩싸인 일그러짐으로 변했다. 날이 침범하지 못하는 가죽이 검에 꿰뚫렸다. 끔찍한 포효가 사자의 목청을 뚫고 튀어나왔다.

“비명이 흉하군, 사자.”

퀘노어는 돌아서며 사자를 마주보았다.

“일어서라.”

사자는 사람의 말을 잃었다. 흐르는 피는 추락하는 신격이다. 그저 덩치 큰, 힘이 센 마물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한 사자가 포효하며 다시금 퀘노어에게 달려들었다.

다시, 왼쪽 상완.

퀘노어의 검은 가로막히지 않았다. 사자의 앞발이 하나 잘렸다.

다시, 그리고 또다시.

사자의 피가 소낙비처럼 땅을 적셨다. 사자는 퀘노어의 검로 위에서 가까워지는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남의 것으로 느꼈던 그 냄새는, 이제 잘린 제 몸뚱아리에서 풍겨오고 있었다.

“그분들의…, 부활을….”

사자가 그 말을 끝마치기 전, 퀘노어의 검이 사자의 목을 갈랐다. 퀘노어는 무너지는 신화의 몸뚱아리를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 그는 전장에 필요했다.

“대공!!”

마물은 몰려온다. 퀘노어는 검을 들었다. 아직, 마물의 바다는 사라지지 않았다. 병사들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용사가 올 기미도 아직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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