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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39화 (140/158)

Chapter 139 - 139. 별을 베는 검 (1)

허수아비를 베었다.

아직은 멀쩡해 보이는 허수아비를 바라보며 나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정답이 아니다. 내가 원하던 대로 몸은 움직였다. 검의 궤도는 흔들리지 않았고, 팔을 움직이는 내 머릿속의 확신 또한 사라지지 않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현실감 없는 현실. 심장은 박동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떨리고 있다. 손에서 검이 미끄러져 땅에 박혔다.

“그럴 리가….”

나는 허겁지겁 허수아비를 향해 다가갔다. 허수아비는 내가 다가가고서야 바닥에 허물어졌다. 공간 자체가 분리된 듯 깨끗이 잘린 단면이 보였다. 나는 허수아비의 반쪽을 집어 들고는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분명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건 맞지만, 성검이 보여주었던 참격과 같지 않았다. 내 검은 여전히 인간의 그것에 머무르고 있었다.

“안돼.”

나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시간이 없다. 외부의 자극은 아예 차단되어 있었지만, 내 감은 이곳을 떠날 때가 머지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바닥에 박힌 검을 바라보았다. 성검과 똑같이 생긴 검. 하지만 그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다.

“…다시 해야 해.”

나는 검을 집어 들었다. 시간은 피 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가까워질수록 맹렬하게 내 숨통을 조여왔다. 머리를 비워야 하는데, 머릿속은 하얀 노이즈로 가득하다. 귀에서는 이명이 울리고 있었고, 시야는 가물가물하게 흔들렸다. 허수아비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다시 솟아났다. 나는 허수아비를 향해 검을 겨누며 말을 걸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내가 혜성을 벨 검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대신 혜성을 베어줄 사람은 없다. 거인이나 안개는 내가 그곳에서 죽어도 아르옌이라는 보험이 막아줄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혜성은? 이걸 내가 막아내지 못하면 ‘다음’이나 ‘보험’이라는 편리한 변명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으아아아!!”

검을 휘둘렀다. 허수아비가 다시 베였다. 물론 제대로 베였을 리가 없다. 내가 고개를 내젓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허수아비가 솟아올랐다. 검을 휘두른다. 허수아비가 반으로 잘렸다. 다시, 그리고 또다시. 기적처럼 내 참격이 완성될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검을 휘둘렀다.

원작의 아르옌은, 어떻게 세 번째 개방을 달성했더라.

‘원작’의 기억은 이곳에서 살아가는 날이 길어질수록 희미해지고 있었다. 지금 이르러서는 아르옌이 어떻게 3단계를 해방했는지는 아주 어렴풋한 말의 파편으로만 머릿속에 남아 맴돌고 있을 뿐이다. 그저 아르옌은 강하고, 꺾이지 않는 의지를 지니고 있었기에 세 번째 개방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문장조차 되지 않는 정보.

억지스럽게 나는 검을 휘둘렀다. 나는 충분히 강하지 못한가? 결국 세상이 원작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업보가 이렇게 돌아오는 건가?

“…지랄하지 마.”

이를 악물었다. 나 자신을 향한 의문은 없다.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할 생각도 없다. 옳지 않다고 달려드는 이들을 납득시킬 생각도 없다. 내 모든 생각과 행동은 누군가의 미소가 긍정해줬으니까. 앞으로 나아갈 이유를 주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검을 휘둘러야 했다.

하나, 또 하나.

허수아비가 하나 쓰러지고 생길 때마다 절망감은 깊어졌다.

별을 벤다. 달을 벤다. 세상을 벤다.

그건 꿈이었다. 사람으로서는 닿을 수 없는 꿈. 정해진 한계 내에서는 이루지 못하는 꿈. 나는 다시 솟아난 허수아비에게 검을 겨누고 가만히 있었다. 허수아비 역시 내게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거인보다, 안개보다, 광신도들보다. 나는 허수아비가 더 두려웠다.

“해야 해.”

나는 스스로를 타이르며 걸어갔다. 성검이 보여주었던 광경이 허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치지 않았다. 이겨내야 한다. 내가 하지 못하면, 모두가 죽는다.

“일로이.”

허수아비가 있던 자리에 성검이 서 있었다. 헛것을 보는 걸까. 나는 검을 쥐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성검은 그 붉은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서글픈 눈동자. 그녀는 내게 다가오며 검을 쥐고 있는 내 손아귀를 감쌌다.

“할 수 없었어.”

나는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별을 벨 수 없었어.”

“일로이.”

성검이 나를 부른다. 성검의 손이 내 뺨을 붙잡고 고정했다. 성검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눈은 울고 있는 듯, 젖은 채 흔들렸다.

“너라면 가능하다. 아니, 너만이 가능하다.”

“나는….”

“세 번째 개방을 허락하마.”

성검의 말에, 시야가 돌아왔다. 성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내뱉듯,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네 몸에 가해지는 부담이 엄청날 거다.”

“부담이라면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어.”

성검은 내 절박한 대답에 고개를 내저었다.

“단순히 몸을 상하게 하는 거라면 뛰어난 치유사가 하나 있으니, 내가 이렇게까지 걱정할 이유도 없겠지. 준비되지 않은 이를 억지로 개화하는 데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성검은 그리고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일로이.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내가 밉구나.”

내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내가 강해질 수 있었더라면. 한계를 극복하고 별을 베는 검을 완성할 수 있었더라면. 그때, 성검이 내 얼굴을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내 욕심이다.”

성검의 목소리에는 회한이 묻어나왔다.

“그러니, 너를 탓하지 말아라.”

성검의 손은 내 뺨에서 내려와 손을 잡았다. 나는 검을 땅에 내려놓고 성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아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으며 말했다.

“세 번째 개방을 시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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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문턱.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와중인지, 밖으로 벗어나는 중인지는 모른다. 다만, 공통점이 있다면, 그 속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 성벽은 문턱이었고, 성벽 밖은 지옥이었다.

“밀리는군.”

사령관의 목소리는 이제 담담했다. 해가 빛나며 저물어가고 있었다. 지금껏 버틴 것도 기적이었다. 전투는 단 한 번의 소강상태 없이 몇 시간 째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사람을 지켜야 할 성벽을 지키러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 속으로 끊임없이 사람을 부어 넣는 건, 사령관이었다.

“저쪽도…. 이제는 글러버린 건가.”

사령관이 씁쓸한 눈길로 응시하는 건, 나탈리였다. 이미 천 단위의 마물을 죽여버렸을 나탈리는 눈에서 귀화를 흘리고 있었다. 전투를 거듭할수록 나탈리의 모습은 인간의 그것에서 멀어졌다. 형체만 언뜻 보이던 뱀의 비늘은, 완전히 몸을 뒤덮은 갑옷이 되었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돋아나 마물의 목덜미를 뜯고 그 피를 마셨다.

“저렇게까지 싸울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겠군.”

나탈리의 머릿속은 평온했다. 생의 이유조차 흐릿한 그녀에게 싸울 이유 같은 건 없었지만, 나탈리는 싸웠다. 그녀는 그렇게 설계되었으니까. 죽임이 곧 그 생의 목적이었으니까. 나탈리는 흉악한 손아귀로 마물 둘을 잡아채고는 머리통을 뜯었다. 살점과 피가 쏟아졌다. 입을 벌리면 역겨운 맛이 혀와 목구멍을 비집고 들어왔다.

“빌어먹을-!!”

다시 앞으로 달려가려던 나탈리의 감각을 사로잡은 건 누군가의 악에 받친 외침이었다. 나탈리는 촉수를 휘둘러 달려오던 마물을 꿰뚫으며 뒤로 돌아보았다.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 일어나!”

유진이 가슴팍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코라를 붙잡고 있었다. 뱀처럼 찢어진 동공이 확장됐다. 유진은 억지로 마력을 쥐어 짜내 성벽 위로 기어오르는 마물들을 밀쳐냈다. 유진의 코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휘관은 어디로 갔을까. 기사와 병사를 지휘해야 할 지휘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물 한 마리가 성벽을 타고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크롤러다. 그리고, 유진은 크롤러가 성벽을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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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의 끝자락이 황혼의 머리와 맞닿아 있었다. 하늘에 중앙선이 그어지고 반짝이는 작은 점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날씨가 쓸데없이 좋았다. 찢어놓은 듯한 깃털 구름이 층층이 쌓인 산등성이는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다.

“오고 있어.”

넬라의 목소리는 조바심에 떨리고 있었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멸망은 다가오고 있다. 마력은 아직 유효할 만큼 남아있다.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은 마법사들은 성벽 아래로 집결하고 있었다. 넬라는 모여드는 마법사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마법사님?”

“가야 해. 혜성이 다가오고 있어.”

넬라가 그리 말하며 성벽에서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넬라를 잡으려는 손이 허무하게 허공을 휘저었다. 다프네는…, 역시 눈치채고는 성벽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성벽의 방어는 이제 전적으로 라우라에게 맡겨두고 혜성을 상대하러 달려가야 했다.

“맡겨둘게요, 마리안느.”

다프네는 무거운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마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창을 개방한 그녀는 성벽의 한 구역을 거의 홀로 틀어막다시피 하고 있었다. 마물은 그녀의 창 아래에 힘없이 스러졌고, 네임드 마물이라 해도 오래 버티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일로이가 그러했듯, 마리안느는 전열의 가장 앞에서 버티고 있었다.

“성벽은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마리안느의 말은 버팀목이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괜찮을 버팀목. 성벽은 안전하리라는 믿음을 주는 버팀목. 그러니 다프네는 달릴 수 있었다.

“마력 잔량은…. 아직 괜찮아.”

넬라가 6서클을 달성한 게 기적 같은 일이었다. 마력의 운용에 대폭 여유가 생기며 이번 수성전에 마력을 더 쏟아부을 수 있었다. 다프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그 흔적만이 서쪽에 남아 어른거리고, 보랏빛의 베일이 하늘을 가렸다.

“빌어먹을! 다프네!!”

다 갈라진 넬라의 비명이 들려왔다. 전투 중에 어지간히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 듯하다. 예전에야 그 목소리에 짜증을 내며 응대했겠지만, 지금은 되려 평소와 같은 반응이 다프네를 안심시켰다. 다프네는 발걸음을 서두르며 넬라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 미친년아!! 마력을 아끼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걷는 데 마력 쓰지 마!”

경악하는 넬라의 반응에, 다프네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품위라고는 없는 말이 참 그녀다웠다.

“서두르죠. 마탑에서 준비는 완료됐겠죠?”

“전투 시작 때부터 탑에 처박혀 있었잖아. 마법 구동하는 데 시간이나 마력이 더 필요하겠어? 아직 안 됐으면 그 새끼들 전부 마탑에서 쫓아내 버릴 거야.”

넬라의 초록색 머리칼이 분노하며 흩날렸다.

“어떻게든 되는 것 같네요.”

황혼의 그림자에 잠긴 마탑의 지붕이 보였다. 다프네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대마법의 전조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기초공사는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던 모양이다. 옆에서 걷던 넬라 역시 한숨을 내쉬며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마탑에서 일단 쫓아낼 일은 없겠네.”

마탑은 왕도 전체에 마력의 고동을 울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마나의 고리가 마탑을 감싸며 회전하고 있었다. 인공 심장. 단 하나의 대마법을 완성하기 위해, 마탑은 마법사들의 두 번째 심장이 되었다. 넬라와 다프네는 마탑의 앞에 도달하고는 고개를 올려보았다.

“보고 있냐?”

“…네, 서둘러야겠어요.”

보랏빛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하얀 꼬리의 유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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