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0 - 140. 별을 베는 검 (2)
밀릴 때면 카밀라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렸다. 게오르그는 방패를 들이밀며 마물을 밀어내고, 메이스로 놈들의 머리를 때려 부수고 뭉개버렸다. 메이스의 추에는 마물의 피와 털가죽이 말라붙었다. 성벽을 두드리는 마물의 공세는 거세지거나 잦아들지 않았다. 막힌 둑을 향해 밀려드는 강물처럼, 쌓이고 또 쌓여갈 뿐이었다.
“수송병들은 한시도 움직임을 늦추지 마라!”
화살통이 바닥에 쏟아졌다. 누군가가 놓친 대포알이 벽면의 경사를 따라 굴러갔다. 공세를 취하는 쪽은 서두르지 않지만, 수성하는 이들은 다급해졌다. 마물은 다치면 죽어도 그만이지만, 사람은 다쳐서도 안 됐다. 게오르그는 이를 악물고 마물들을 떨쳐냈다. 상처가 쌓여간다. 살갗이 찢어지고, 발톱과 이빨에 몸이 꿰뚫렸다.
“단장님. 교대하겠습니다.”
“교대하자고 말할 힘 아껴서 옆에서 검이나 휘둘러라.”
부단장이 검을 내세우며 다가왔지만, 게오르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지켜내야 한다는, 또, 후회 없이 살아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게오르그를 움직이게 했다. 부단장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전선에서 악을 쓰는 게오르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무식하지만 우직하게 버티는 건 여전하네요.”
게오르그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쓴웃음과 함께, 지친 기색의 아이시스가 그곳에 서 있었다. 어지간히도 바쁘게 돌아다녔는지, 새하얄 터였던 그녀의 복장은 피와 검댕, 먼지에 절어 너덜너덜해졌다. 아이시스는 곧장 치유의 마력을 퍼뜨렸다. 몸을 좀먹던 상처가 말끔히 사라지고, 바닥에 누워 버둥거리던 부상자들이 의식을 되찾았다.
“상태가 정상이 아니군. 그러다가 전투가 끝나기도 전에 탈진한다.”
“저는 탈진해도 되지만, 당신은 안 되죠. 마력을 다 쓴다고 해서 죽는 건 아니잖아요.”
아이시스가 쏘아붙이는 말에, 게오르그는 미안하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일로이와 마지막으로 함께 있던 게 너였지?”
게오르그는 그리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무슨 부모를 애타게 찾는 아이도 아니고, 사람들은 일로이가 없는 전투에서는 일로이만 찾아다니고 있었다.
“올 거예요. 일로이도 홀로 감당하기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을 거니까. 명상에 잠겨서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굉장히 괴로워 보였어.”
“그 녀석은 언제나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고 있었잖아.”
게오르그는 성벽 아래로 마물을 하나 떨어트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아이시스를 향해 날아드는 마물 한 마리를 방패로 쳐냈다.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군. 일로이는 불합리한 무게와 싸우고 있어.”
“그를 위해 기꺼이 몸을 내던질 사람이 일로이잖아요. 오지 말라고 해도 올 거예요, 용사는.”
그리 말하는 아이시스의 눈에 서린 신뢰에, 게오르그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옛 생각이 나는군.”
“썩 행복한 기억은 아니네요. 당신에게든, 나에게든.”
아이시스는 먼 성벽까지 시선을 향했다. 지금도 사람들은 다치고 죽어가고 있다. 앞으로 몇 명이나 더 치료할 수 있을까? 아이시스는 마력의 잔량을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다. 마력이 고갈되지 않을 거라 스스로를 세뇌하며 나아갔다.
“조금만 더 버티세요. 일로이는 반드시 올 거예요.”
“가봐라, 올 때까지 언제든지 버텨낼 수 있으니까.”
“…죽지 마세요.”
걱정하듯 덧붙이는 아이시스의 말에 게오르그는 콧방귀를 뀌었다. 걷다가 당장 힘을 다해 고꾸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녀석이 뭐라고 말하는 건지.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때, 아이시스가 걸음을 떼기 전에. 그 공간에 속해 있던 모든 생물이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간의 시간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물의 시간이어야 할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거 보이나?”
“네. 그다지 보고 싶지 않지만요.”
정확히 말하자면, 마물의 시간이 오는 건 아니었다. 모든 것의 시간이 끝나고 있었다.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종이었고, 지금 저 황혼을 가르며 날아드는 별은 추였다. 뎅, 종이 울리면 세상은 끝난다. 가장 끔찍하면서 아름다운 형태의 죽음이 나선의 꼬리를 그렸다.
“화려하게도 다가오는군.”
모든 전투가 멈추었다. 전투뿐만이 아닌, 모든 운동이 멈춘 것이었다. 세상은 적막에 빠졌다. 나뭇잎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고요함이다.
“그분의 사자(使者)가 오고 있다.”
무언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퀘노어와 대치하고 있던 태곳적의 반인반수 마물이었다. 고대의 마물은 사자 한 마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퀘노어는 반쯤 죽은 몸을 이끌고서 분전하고 있었다. 덕분에 고대의 마물이 아무런 방해 없이 날뛰는 건 억제할 수 있었지만 이마저도 얼마 버티지 못할 상황이었다.
“너희들은 끝났다. 설령 당장 너희들이 우리를 모조리 죽여버린다고 하더라도 너희들의 패배는, 너희들의 멸망은 이미 결정되었다.”
마물은 그리 말하며 거머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우리는 우리의 승리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건 오직 너희의 패배뿐. 너희들의 괴멸이 우리의 승리고, 너희들의 멸망이 우리의 영광이다.”
“너희들은 말이 너무 많아.”
“누군가를 사랑하여 진정으로 숭배해본 적 있나? 너희들의 그 알량한 십자가나 책에 대고 기도하는 거 말고 말이다.”
퀘노어는 얼굴을 찡그렸고, 마물은 고개를 쳐들었다. 미명 전의 새벽처럼 긴장된 침묵으로 가득한 하늘을 향해, 마물이 입을 쩍 벌리며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크워어어어어!!!
그 포효는, 마치 뿔피리처럼 전장의 생물들을 잠에서 깨웠다. 다가오는 종말을 마중나가는 것처럼 섬짓하고 낮게 울리는 포효. 마물들은 그에 동조해 너도나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사나운 울음을 토해냈다. 멸망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였다.
“종말이다!! 우리는 영원히 살고 너희들은 죽을 것이다!”
마물의 공세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전혀 다른 기세였다. 전까지는 둑에 서서히 쌓여가는 강물과 같았다면, 지금은 무너진 둑 너머에서부터 쏟아져 내려와 강가를 덮치는 노도와 같았다. 혜성의 출현에 이미 압도당해버린 병사와 기사들은 더 강해진 공세를 버텨내지 못한다.
“죽음을 각오한다지만 너희들은 정말 죽음을 각오해본 적이 있긴 한가?”
킬킬거리며, 마물이 웃음을 지었다. 마물은 스스로 나서지 않고 관망했다. 퀘노어는 이를 부드득 갈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웅혼한 목소리가 퀘노어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검을 들어라!! 적에게 맞서라!!”
두려움을 밀어내야 한다. 믿음을 주어야 한다.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 하지만 이미 겁에 질린 병사들은 마땅한 저항을 해보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퀘노어와 아그네스만이 싸울 의지를 유지한 채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주위로는 끊임없이 마물의 사체가 쌓이고 있었지만, 둘만으로는 모든 걸 해결할 수 없었다.
아그네스는 오러를 흩뿌렸다. 마력은 점점 줄고 있었지만, 무위는 그와 반비례하며 높아지고 있었다. 마력과 오러의 빈자리를 검으로 채워 넣었다. 아그네스는 검을 놓치고는 다가오는 마물을 멍하게 바라보던 기사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집어 던졌다. 기사는 땅을 나뒹굴다가, 제 눈앞에 날아와 박힌 검을 보았다.
“목숨을 그딴 식으로 버릴 거라면, 마물을 한 마리라도 더 끌어안고 죽어라.”
기사라는 작자가. 여왕은 혀를 내차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등 뒤에서 처절하게 내지르는 고함이 들려왔다. 검을 뽑아 들고 마물을 베어 넘기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철검이 허공을 베어 가르는 소리와 피륙이 찢어지는 소리. 마물의 것과 사람의 것이 뒤엉킨 죽음의 소리. 그 속에서 아그네스는 방금 살려준 기사의 목이 잘리는 소리를 분간해낼 수 있었다.
“막아내라.”
아그네스는 그럼에도 앞을 보았다. 뒤를 돌아보면 살아있는 이들을 이끌 수 없다. 쓰러지면 안 된다. 버텨내고 이겨내야 한다.
“벽이 되어주겠나, 퀘노어.”
퀘노어의 발아래로 거대한 마물이 쓰러져 있었다.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퀘노어는 여왕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혜성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겁니까, 폐하?”
아그네스는 하늘을 보지 않고 퀘노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게 그녀의 대답이었으며, 의지였고, 믿음이었다. 퀘노어는 흔들리지 않는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여왕은 앞을 본다. 절망하며 땅을 보지도 않고 혜성을 보며 도움을 구하지도 않는다.
“다시 물으마.”
오러의 장막이 펼쳐졌다. 다가오는 마물들이 분해되며 토막으로 무너져내렸다. 퀘노어는 그 순간만큼은 에버노드의 군주가 아닌 여왕의 가장 충직한 신하가 되었다.
“벽이 되어주겠나.”
“명을 받들겠습니다.”
퀘노어는 웃음을 지어 보이는 반인반수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말로써 병사와 기사들은 이제 일어나지 못한다. 할 수 있는 건 그들을 지키며, 일어날 때까지 싸우는 것. 아그네스와 퀘노어는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말을 교환하고는 검을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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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욕지거리가 나왔다. 코라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달려온 의무병들은 사색이 되었다. 전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유진의 시선은 전선과 코라 사이에서 방황했다.
“…전투에… 집중하라고.”
힘겹게 말을 만들어내는 코라의 입가로 피가 흘러내렸다. 유진은 마력을 쥐어 짜내 상처를 봉합하고 출혈을 틀어막으려 했다. 상처가 깊다. 이송해야 하는데, 이송할 수가 없을 정도로 전선이 흐트러지고 있다. 들것을 가져올 시간이 없다. 유진 자신이, 직접 그녀를 후송해야 한다.
“나 옮긴다고… 전선에서 이탈하면 성벽 아래로 뛰어내릴 거야.”
“입이나 다물어. 지금 너 옮길 사람 없어.”
환부를 압박한 천을 동여맸다. 유진은 코라를 업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가, 무게가 유진의 다리와 허리를 짓눌렀다.
“무겁네. 근량이 늘었나. 운동 열심히 했군.”
“…입 다물어 미친놈아….”
피가 끈적하다. 피는 미지근했다. 빠져나가는 피는 생(生)이었다. 유진은 코라를 안심시키려 애를 쓰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을 안심시키려 하고 있었다. 살아야 하기에. 허둥대지 않아야 둘 모두 살아남을 수 있기에.
“전열이 무너집니다!!”
전열이 무너지는 건 소리로 확연히 들을 수 있었다. 병사가 죽고 기사가 쓰러졌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
사람이 있던 자리에 마물이 서 있다. 가야 하는 길이 막혔다. 유진은 코라를 업은 채 뒷걸음질을 쳤다. 마물들이 에워쌌다. 유진의 손에 마력이 맺혔다.
“날 내려…. 너는 빨리 도망가.”
코라의 말은 무시했다. 유진은 조잡한 마법을 쏘아내며 마물을 쓰러트리려 했다. 마법은 하지만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유진은 눈앞에 당도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쾅-!!
그리고, 마물들이 날아갔다. 유진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괴물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가.”
괴물, 그러니까 나탈리는 촉수를 흔들며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사람이었다는 증거는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다. 검은 머리칼. 그리고 근간이 되는, 사지가 달린 인형의 형체만이 나탈리의 본모습을 희미하게 증명해주고 있었다.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유진을 향해, 나탈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어서!”
유진이 발걸음을 떼었다. 사냥감을 향해 마물들이 달려들었고, 나탈리는 달려드는 괴물들을 촉수로 꿰뚫었다. 성벽 위의 마물들은 정리되고 있었으나, 아래에서 나탈리가 틀어막고 있던 마물이 한꺼번에 성벽으로 몰려오며 벽을 긁어댔다. 나탈리는 촉수를 뻗어 유진이 가는 길을 터주었다. 유진은 딱 한 번, 나탈리에게 시선을 주고는 성벽을 뛰어 내려갔다.
나는 왜.
나탈리는 유진이 사라질 때까지 마물을 쳐내었다. 그녀는 그 순간, 자신 안의 무언가가 바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둘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든 감정이 안도감이라는 걸, 나탈리는 아직 알지 못했다.
“…된 거야.”
하지만 그걸로 됐다고, 나탈리는 말할 수 있었다. 시시각각 망가지는 육체. 이 신체도 영구히 유지될 수는 없다. 오래 유지할수록 형체는 무너지고 마물에 가까워진다. 촉수가 물어뜯겼다. 나탈리는 거칠게 촉수를 흔들어 마물을 떨쳐냈다. 잘린 촉수의 재생이 더뎠다. 아마 한 번만 더 잘리면 아예 재생이 멈춰버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거로….”
움직임을 멈추려던 나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찾았는데. 이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움직여야 할지 알 것 같은데. 왜 살아야 할지, 어렴풋이 보일 것 같은데. 상황은 그녀에게 살아가기을 멈추라 말하고 있었다. 네 삶은 여기서 멈출 거라 말하고 있었다.
“…살고 싶어.”
나탈리는 무릎을 꿇으며 그리 중얼거렸다. 처음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의지가 생겨났다. 촉수를 억지로 뻗었다. 손발을 움직이며 몸을 일으켰다.
살아라. 투쟁하라.
머릿속에 입력된 명령을 지워내는 본능이 그리 말했다.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세우며 다가오는 죽음에 저항했다.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듯, 나탈리가 마물을 향해 소리를 내질렀을 때,
저 멀리서, 황혼의 어둠을 걷어내는 빛이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