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43화 (144/158)

Chapter 143 - 143. 별을 베는 검 (5)

감각이 이상했다.

결계 내의 공간은 결계 밖의 물리적, 마법적 규칙을 따르지 않는 듯했다. 다프네는 결계 속에서 둥둥 떠서 표류하고 있었다. 결계 안은 어둡지 않았다. 어디서 비추는지 알 수 없는 광원이 시야를 밝혀주고 있었다. 다행히, 몸은 의지대로 움직였다. 날아가려면 날아갈 수 있었고, 앉으려면 앉을 수 있었다. 바닥과 천장이 하나였고, 벽면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프네는 결계 속에서도 또렷하게 그려진 혜성의 꼬리를 바라보았다.

“…삼 년 분.”

다프네는 그리 계산했다. 현재 결계를 떠받치는 마력은 그 정도로 전부 소진된다. 다프네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기를 반복했다. 이대로 마법사들이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결계를 붙들고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마저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다.

무엇보다, 결계의 입구를 닫아 버렸으니, 외부에서 누군가가 개입해줄 수도 없고, 결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일로이가 설령 혜성을 격파할 방법을 찾아냈다고 해도 혜성이 결계를 뚫고 다시 출현할 때까지는 다프네는 멀리 날아가는 혜성을 바라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여기서 모든 걸 바쳐 결계를 강화한다면….”

마법 세계에서의 목숨은 생각보다 비싸다. 마력은 제값을 치르고 목숨을 가져간다. 어린 7서클 마법사의 목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7서클까지 쌓아 올린 마력 전부와, 마법의 발전으로 늘어난 수명, 그리고 발전 가능성까지 한 번에 폭발시켜 얻을 수 있는 마력은.

“…못해도 수백 년 분은 되겠네.”

수백 년, 수백 년이라. 그때까지 사람들이 이 혜성을 어떻게 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수백 년의 방황에 지친 혜성이 힘을 잃고 추락할까. 다프네는 주먹을 꾹 쥐었다. 목숨을 바치는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죽음과 삶은 동전의 양면에 있다. 죽음이 가까워야 사람은 삶을 느낀다. 몸에 남아있는 모든 마력을 쥐어 짜내고, 제 죽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때, 거래는 비로소 시작된다.

“너는 빠져나가지 못해.”

혜성은 출구를 찾으려는 듯 저 멀찍이 날아가고 있었다. 다프네는 고개를 살며시 젓고는 결계와의 연결을 더듬었다. 결계는 심장에 바로 맞닿아 지금도 펌프처럼 마력을 뽑아내고 있다. 다프네는 그 통로를 활짝 열었다. 열린 수로로 빠져나오는 물처럼 마력이 울컥 새어나갔다.

“이곳에서, 네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갇혀 있어라.”

다프네는 그리 간절하게 바라며 마력을 쏟아냈다. 더, 더 가져가라. 내 가장 깊은 곳에 숨어있는 한 방울까지 모조리 긁어가라. 쏟아내는 마력은 쓸데없이 많았다. 처음으로 제 모든 걸 쏟아내는 다프네는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마력을 느끼며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더. 조금만 더.”

마력 탈진의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머리가 핑 돌고 손발의 힘이 빠진다. 아직 마력은 많이 남았다. 마지막의 마지막. 혈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마나 한 줌까지 내보내야 한다.

지지직.

지나치게 많은 마력을 내보내는 혈관이 비명을 질렀다. 쓸리고, 아프다. 피멍이 얼룩처럼 몸 곳곳에 번져간다. 다프네가 약해질수록 결계는 강해진다. 공간은 견고해지고, 불안정한 위태로움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고통이 찾아왔다. 무식하게 마나를 뽑아내기를 한 시간. 대양(大洋)에 비할 만한 마력도 이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의미없는 짓이라고.”

네가 죽으면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소리치던 넬라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녀의 말이 옳다. 이렇게 희생해서 사람들을 살린다고 해도, 죽으면 사람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방법도 없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 둥 하나는, 사후의 일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프네는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력 고갈로 떨리는 게 아니다.

일로이는 이런 짓을 매번 해왔다는 거잖아.

누군가의 방패 뒤에서 싸우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 무엇보다, 그 방패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내 삶으로 하여 다른 이들의 삶을 떠받치는 게 어떤 일인지. 또 어떤 각오를 다져야 하는 건지. 다프네는 구 할 정도 빠져나간 제 마력을 관조했다. 결계와 연결된 가상의 관이 몸 깊은 곳까지 뻗친다. 오른 손아귀에 맺혀있던 마력 한 줌. 다리에 고여있던 마력 조금, 혈관 깊숙한 곳의 마나 한 방울.

“…무서워.”

다프네가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기꺼이 죽음을 불러들인다. 차라리 결계와 하나가 되는 과정이라고 할까. 다프네의 몸 곳곳에 마력의 관이 꽂혔다. 관은 서서히 심장을 향해 나아간다. 몸에 남아있는 잔여 마력은 다 빠져나갔다. 이제 서클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마력을 추출할 차례다.

“역시 무서워.”

다프네는 옅게 웃었다. 그녀는 아직 한 시골 마을의 평범한 아이였다. 그 마을에서 쫓겨난 아픔을 안고 살았고,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며 살아온 상처투성이의 괴물이었다. 일로이는 그녀를 구렁텅이에서 구해주고, 다른 상처를 찾아 헤매었다. 다프네는 그런 용사의 뒤를 쫓았다. 사람들의 상처를 보고, 그를 구해내는 용사를 보았다.

그러면서, 몸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쌓아가는 일로이 또한 보았다.

용사는 상처로 상처를 구해내었다. 용사가 걸어간 길은 제 혈흔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따금 돌아보는 용사는 언제나 미소를 짓고 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괜찮다는 듯.

“보고 싶어요.”

다프네는 심장을 찌르는 고통을 느꼈다. 죽을 수 있었다. 일로이를 위해서라면 내줄 수 있었다. 그리고 내줄 거라면 일로이가 모르는 새 하고 싶었다. 안다면 분명 그는 또 상처를 입어가며 자신을 구해주려 할 테니까.

그래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얼굴을 봤으면 좋겠다. 당신을 위해 이만큼 해왔다는 사실을, 용기를 냈다는 사실을. 다프네는 떨리는 손을 그러쥔 채 무릎을 꿇었다. 고통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마지막의 마지막. 다프네는 울고 있었다.

“보고…싶어요.”

눈물만 조금 흘리고 끝날 줄 알았는데. 다프네는 허탈한 웃음을 짓다가, 들썩이며 쓰러졌다. 아팠다. 몸도, 계속 떠오르며 심장을 찔러대는 기억도. 한 번쯤은 느껴보고 싶었던 그의 온기도. 다프네는 흐느낌으로 바뀐 울음을 삼키며 허리를 굽혔다.

사실, 당신이 거인을 상대하겠다며 나설 때 말리고 싶었어요.

사실, 당신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이 미웠어요.

사실, 당신을 찾아 안개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어요.

사실, 죽을 거면 당신의 옆에서 죽고 싶었어요.

이제, 거래할 준비가 끝났다. 다프네는 가슴에서 뻗어져 나오는 금빛 마력의 가닥을 바라보았다. 가닥은 결계의 심부와 연결된다. 다프네가 수락하기만 하면, 되돌릴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러보고 싶었다. 다프네는 입술을 깨물다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담아보았다.

“일로이.”

“불렀어?”

다프네가 얼어붙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헛것이라도 보는 건가. 세상의 마지막 자비라도 되는 건가. 그녀의 시야는 은백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휘광을 포착했다. 빛나는 세 쌍의 날개. 양손의 검, 머리 위의 훈륜. 그리고, 선명하게 빛나는 청록색의 눈. 잿빛 머리는 마력의 소용돌이에 흩날리고 있다.

“공간이 좀 이상하네. 찾아온다고 꽤 애를 먹었잖아.”

일로이는 그리 말하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다프네의 생각, 행동은 그 상태로 완전히 멈추었다. 일로이는 다프네에게 연결된 금빛 관을 바라보며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이건 또 뭐야.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런 위험한 걸 몸에 달아놓고 있는 거야?”

일로이가 몸을 굽히자, 다프네는 뒤로 파다닥 물러났다.

“머, 뭐에요?!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뭐하긴. 네가 넬라 녀석의 말도 안 듣고 냅다 결계 속으로 사라졌다길래 찾으러 왔지.”

일로이는 무릎을 모으고 다프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프네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일로이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기척이 있다. 마력도 느낄 수 있었다.

텁.

다프네는 일로이의 얼굴 위로 손을 올렸다. 만져진다. 다프네의 손이 계속 일로이의 얼굴을 더듬었다. 촉감. 싸움의 흔적. 눈두덩, 콧날. 그리고 슬쩍 올라간 입꼬리.

“아….”

진짜 일로이다.

다프네는 팔을 내려놓으며 그 사실을 깨닫고 다시 울었다. 일로이는 움직이지 않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프네가 그의 존재를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다프네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위아래로 일로이를 훑다,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떻게….”

“늦어서 미안해.”

다프네가 달려들었다. 힘없이 품에 안기는 다프네의 무게에, 일로이의 눈썹이 위로 올라가다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다프네는 제 등을 토닥거리는 일로이의 손에 더 서럽게 울었다.

“수고했어.”

다프네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는 또 30분이 걸렸다. 다프네는 완전히 탈진한 채 주저앉았다. 일로이는 그녀의 맞은편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결계의 먼 곳에 수 놓인 별들이 반짝였다. 다프네가 무릎을 모은 채 훌쩍거렸다.

“이제 나한테 맡기면 돼.”

“…갈 거예요?”

고개가 끄덕거린다. 다프네는 그를 조금은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항상, 궁지에 몰렸을 때. 곤경에 처했을 때 나타난다. 그리고서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일을 해치우고는 웃으면서 돌아온다. 저리 홀로 떠안으려 하는 모습을, 다프네는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버텨줘서 고마워. 충돌을 막아줘서 또 고맙고. 그걸로 너는 이미 수천만 명의 사람들을 구한 거야. 자랑스러워해도 돼.”

“하지만…. 결국 일로이가 없으면 일을 완전히 해결할 수 없었던 거잖아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일로이는 축 처진 다프네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 올렸다.

“네가 내게 시간을 벌어줬는걸. 네가 없었으면 세상이 멸망하는 걸 막지도 못했을 거야.”

“나를 믿고 있었나요?”

“믿었어.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기다렸지.”

이 사람은 끝까지 나를 안심시킨다. 의지해도 좋다고, 믿어도 좋다고 말해준다. 무겁지 않다는 듯 웃어 보이고, 쓰러지지 않는다. 자신이 희망인 걸 알기에. 사람들의 앞길을 비추는 등불이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다녀올게.”

일로이는 혜성의 꼬리를 바라보았다. 저대로는, 또 홀로 보내게 된다. 그녀가 죽기 전까지 바라던 바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다프네는 돌아서려는 일로이의 손등을 붙들었다.

“같이…”

일로이의 눈이 조금 커졌다. 다프네는 그의 놀랐다는 듯한 반응에 용기를 얻었다.

“같이 가요.”

일로이는 돌아선 채로 다프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가왔다. 다프네는 일으켜달라는 듯 일로이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일로이가 취한 행동은 다프네의 예상을 벗어났다.

“일로이?!?!”

“이게 더 빨라.”

일로이는 검을 집어넣고 다프네를 안아 든 채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프네는 저도 모르게 팔을 움츠렸다. 일로이의 등 뒤로 새하얀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일로이는 허공으로 떠올랐다. 혼자 떠오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 다프네는 조금씩 버둥거렸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이걸 거부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럼, 간다.”

날갯짓 한 번. 별들이 빛의 선이 되어 주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도 속도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공간이 절로 이동하며 일로이와 다프네를 그곳으로 인도하는 듯했다. 머리 위로 스쳐 가는 하얀 광망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었다. 일로이는 씨익, 웃으며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다프네도 일로이의 눈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저기 열심히 도망가는 중이네.”

따라잡았다.

혜성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비행을 속행하고 있었다. 이제 사냥하는 쪽은 그들이었다. 사냥감을 그물에 가두고, 창으로 찌르는 쪽. 일로이는 혜성을 한참 앞질러 날아가고는 다프네를 살포시 내려놓았다. 다프네는 다시 바닥에 앉았고, 일로이는 검을 뽑아 들었다.

“거기서 잘 보고 있어.”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회복된 마력 한 줌을 이용해 일로이에게 마법을 걸어주었다. 가장 처음 일로이에게 걸었던, 그 방호 마법이었다. 일로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 든든하네.”

“물리쳐줘요.”

“당연하지.”

다프네는 일로이와 연결된 마력을 느끼며 걸어가는 일로이의 뒷모습을 똑똑히 눈에 새겼다. 용사의 뒷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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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나는 양손의 검을 조금씩 매만지며 몸을 풀었다. 성검을 개방하면서 얻었던 통증. 첫 번째 개방 이후로는 처음이던가. 마침 몸을 감싼 다프네의 마법까지 있어,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기억은 사람을 미소 짓게끔 하는 힘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혜성의 거대한 존재감을 마주하면서도 웃을 수 있었다.

“이제 네 차례구나.”

심장이 뛰는 게 고통스럽다. 몸을 움직이는 게 슬슬 버겁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너울과 성검을 교차하며 어깨 뒤로 넘겨 들었다.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되고, 마력의 순환이 형성된다. 오러와 성검의 힘이 혼합된 무언가가 검신을 감쌌다. 성검은 말하지 않았다.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거다.

“네가 억지로 열어 준 힘. 낭비할 수는 없겠지.”

나는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감은 눈 너머로도 혜성은 있었다. 베고, 또 베고.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자갈 정도의 크기로 변할 때까지 벤다. 머릿속은 꽉 찬 동시에 비어있었다.

“별을 베는 검이라.”

성검의 조건에는 다다르지 못했다. 앞으로 알 기회가 있을까? 입안이 썼다. 알고 싶었다. 되는 한 그곳에 오래 앉아 검을 더 성찰하고 싶었다. 나의 검을, 나를 돌이켜보고 싶었다.

“…그런 순수한 걸 바라는 건 사치겠지.”

나는 피식 웃었다. 눈을 떴다. 혜성은 가까이 당도해 있었다. 혜성의 표면은 붉게, 또 푸르게, 또 하얗고 노랗고 녹색으로 빛났다. 그 정중선을 향해 나는 한 걸음을 크게 내디뎠다. 내 몸짓에 응하며 검들이 울었다. 너울의 검명은 날카롭고 높았고, 성검의 검명은 낮게 울렸다.

베여라.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그저, 허수아비 하나를 베어내듯 베어라.

혜성은 나 하나만을 짓눌려 죽이려는 듯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닌 점이다. 스쳐 지나가면 너는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을 거다.

이리 말하면서 말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나는 혜성이 던지는 무언의 질문에 대답하며 입에 비틀린 미소를 걸었다.

그건 혜성,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콱.

마침내, 검을 거머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디딤발이 뿌리를 내렸다. 혜성이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 새하얗게 빛나는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이어서 내가 할 일은 그저.

물결을 따라. 흘러내리듯. 검로를 따라 검을 그어 내릴 뿐이다.

.

.

.

“…베었어.”

나는 단순히 부유하는 얼음조각으로 변해버린 혜성의 사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베었구나.]”

성검이 건조한 슬픔으로 대답했다.

콜록.

기침이 젖어있었다. 나는 턱을 따라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냈다.

“[일로이.]”

“괜찮아.”

아직 내게는 할 일이 남아있다.

그때까지는, 이 몸으로 버텨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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