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4 - 144. 한여름에 내리는 눈 (1)
수백 가지 색으로 빛나는 혜성과 은백의 검로가 교차했다.
검로는 혜성을 갈라내고 나아간다. 혜성은 그 선에 닿는 순간 끝을, 죽음을 맞이했다. 검로는 혜성을 잡아먹고, 공간에 깊숙한 자상을 남겼다. 어그러지는 공간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일로이는 검을 검집으로 회수했다. 혜성이 소리 없이 스르륵, 네 갈래로 분해됐다.
“해냈어요.”
다프네가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얼음덩어리들은 저 홀로 갈라지며 부서지는 것처럼 보였다. 산맥만 한 얼음은 여러 갈래의 산으로 부서지고, 산은 다시 여러 갈래의 바위로 부서지고, 바위는 또다시 돌로 무너진다. 마치 그 자체의 질량을 견디지 못하고 홀로 붕괴하는 듯했다. 혜성은 빛을 잃었다. 그 자리에서 빛나는 건 용사뿐이었다. 일로이의 날개가 떨렸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한참이고 잔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었다. 다프네는 일로이를 잡아보려 손을 뻗었다. 빛에 닿을 수 있어도, 빛을 잡을 수는 없다. 일로이는 잡히지 않았다. 용사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렇기에, 저 옆에 서 있고 싶었던 거다. 다프네는 주먹을 쥐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수.”
다프네는 결계와의 연결을 끊었다. 심장에 꽂혀있던 금빛 관이 녹아 사라졌다. 언 살을 녹이는 듯한 통증과 함께, 마력 감각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다프네는 눈을 감고 심장의 일곱 고리를 느껴보았다. 고리들은 파괴되지 않고 더 견고해졌다.
일곱 개로 겨우 이 정도.
여덟 개든, 아홉 개든. 쌓아주겠다. 용사를 위해, 용사를 넘어서야 한다.
“…좋아.”
목표가 선해졌다. 다프네는 주먹을 쥐고 다짐했다. 일로이가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일로이는 다시 다프네의 앞에 나타났다.
“결계가 해제되면 한바탕 눈이 내리겠네.”
일로이는 턱짓으로 혜성의 잔해를 가리켰다. 잔해들은 지금도 조각조각 부서지고 있었다. 다프네는 눈을 깜박이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잘게 분해되는 얼음조각은 불꽃놀이 같았다. 얼음 가루가 불똥처럼 흩날렸다.
“한여름에 눈이 내리려나요. 눈이 쌓인다면 엄청난 광경일 거 같아요.”
“그렇겠네. 저 정도로 거대한 얼음덩어리라면 온 왕국에 함박눈을 고루 뿌리고도 남을 걸.”
일로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목소리에 피로한 기색이 있었다. 다프네는 일로이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빛 때문일까. 안색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숨소리가 고른 듯 고르지 못하다. 지금 일로이는 애써 멀쩡한 척을 하고 있었다. 다프네는 일로이의 손을 슬쩍 잡았다.
“무리했잖아요.”
일로이는 쓰게 웃었다. 부정하는 게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듯하다. 다프네의 손끝에서 일로이의 맥이 희미하게 뛰고 있었다. 일로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무리하지 않으면 막을 수 없는 재앙이었어. 너도 결계를 유지할 때 목숨을 내던지려 했으면서 나한테 무리했다고 잔소리할 입장은 아니지 않아?”
다프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푹 고개를 숙인 그녀의 머리를, 일로이가 토닥거렸다.
“뭐…그렇긴 하지만요. 그래도 무리했잖아요.”
일로이가 킥킥, 웃었다. 다프네는 일로이의 웃음에 표정을 찡그리며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한 손은 그의 손을 잡고, 한 손은 그의 허리에 두르고 얼굴을 묻었다. 평소에 의연하고, 의지가 되던 다프네였다. 일로이는 그녀의 응석이 기꺼운 듯 웃음을 띠었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결계 안으로 뛰어든 거예요?”
다프네의 말은 일로이의 갑옷에 묻혀 웅얼거리는 소리로 바뀌고 있었다.
“삼 년이에요.”
다프네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일로이는 반응이 없었다. 다프네는 고개를 들고는 눈썹을 모으며 투정 부리듯 말했다.
“결계 속에 갇혀있어야 하는 시간 말이에요. 삼 년이라구요. 결계의 입구가 완전히 닫혀서 이곳에서 나가려면 결계가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다프네는 일로이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그리 말하다가, 입을 합, 다물었다. 그 말은, 3년 동안 아무도 없는 이 세상에서 일로이와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었기에.
“그…. 기다려야죠! 3년! 기다려야죠. 어쩔 수 없죠. 결계가 닫혔으니까요.”
“나갈 수 있는데.”
일로이는 다프네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라고 묻는 듯한 눈빛.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듯한 눈빛이었다. 다프네는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하게 일로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로이 역시 멀뚱멀뚱, 다프네의 눈을 마주 보았다.
“…어떻게요?”
“이렇게.”
일로이가 아무렇지 않게 성검을 뽑고서는 팔을 들어 올렸다. 다프네는 문득, 일로이가 말한 나갈 방법이라는 게 뭘 말하는 건지 깨달았다. 다프네는 다급히 팔을 파닥거리며 일로이에게 다가갔다. 다프네는 행동에 대한 변명을 헤집기라도 하려는 듯,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자, 잠시만요. 조금만 이따가 해제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다프네는 일로이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똑똑히 목격했다. 그녀의 볼이 부, 풍선처럼 부풀었다. 일로이는 검을 다시 검집으로 회수하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틀 정도는 쉬었다가 돌아가고 싶었어.”
“…못됐어, 진짜.”
다프네가 중얼거리며 일로이의 손을 잡았다. 다프네는 슬쩍 그녀의 손가락을 일로이의 손가락에 감았다. 놓치지 않기 위해, 다프네는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끼고 꾹 쥐었다.
“그럼 딱 이틀만.”
다프네는 일로이를 슬쩍 끌어당기며 그리 말했다.
“뒤처리도 해야 하고, 다음 재앙도 생각해야 하니까, 딱 이틀만.”
다프네는 일로이를 보았다. 지금 그의 곁에 있는 건 그녀였다. 다프네는 눈을 감고 일로이를 안았다. 갑옷이 딱딱하다. 그 갑옷 너머로 제 온기가 전해지도록, 다프네는 일로이의 허리에 감긴 팔에 더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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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었고, 왕도 곳곳에 불빛이 피어올랐다. 전후의 뒷정리 시간이었다. 가족들이 서로의 무사를 확인하는 시간이고, 부상자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 시간이기도 했다. 분쟁이 잦은 지역이라면 전후의 뒤처리마저 시끌벅적할 테지만, 공습이라고는 받아본 적 없는 왕도의 분위기는 밝지 않았다. 횃불이 주는 건 빛이 아니라 깊은 그림자였다.
“이쪽으로 옮겨! 부딪치지 않게 조심하고!”
“한 구석에 모아. 나중에 불태우면 돼!”
사람들의 호령이 들려온다. 넬라는 마탑의 꼭대기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움직인다. 성벽을 타고, 안에서 밖으로. 넬라는 그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기다리다 지쳐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넬라는 아직 안심할 수도, 지쳐 포기할 수도 없었다. 별이 반짝였다. 넬라는 고개를 들었다.
“빌어먹을 용사놈아. 사람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면 어떡해.”
넬라는 원망스럽게 말했다. 대답 없는 외침은 하늘에 흩어졌다. 바람이 차다. 넬라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밤공기가 젖어있었다. 구름이 끼려는 걸까.
“…제대로 구하고 오란 말이야.”
넬라는 쿵쿵거리며 마탑의 꼭대기로 올라오려는 소리를 듣고는, 입구를 막아버렸다. 마법사들은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강제로 문을 부수고 올라오려는 듯하더니, 넬라가 빽 소리 지르는 걸 듣고는 잠잠하다. 혼자 있고 싶었다. 기다림 속에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기는 싫었다. 넬라는 바닥을 툭툭 치며 입을 비죽 내밀었다.
“기다리는 건 적성이 아닌데.”
그래도, 이번에는 믿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일로이가 다프네를 구하고 혜성마저 격파하고 돌아올 거라는 믿음으로. 넬라는 일로이가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 기다려줄게.”
딱딱한 바닥에 주저앉아, 넬라는 눈을 깜박였다. 잠들진 않을 거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 돌아올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을 거다. 넬라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별이 지나가고, 마탑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란들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불은 켜져 있었고, 사람들은 굼뜨게나마 돌아다녔다. 피로에 곯아떨어지는 이들도 있었고, 끝까지 방심하지 않겠다고 무기를 놓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다들 열심이네.”
가서 도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게 넬라였다. 내 할 일만 끝났으면 그 뒤로는 눈 감는다. 지금 넬라의 머릿속을 온통 채우고 있는 건 사라진 결계와 용사뿐.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보자구.”
별이 하나둘, 밤의 장막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밤은 낯을 바꾸어 파랗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동쪽에서부터 빛이 비집고 들어오며 미명의 푸름을 보였다. 발갛게, 멀리서 희미하게 고개를 내미는 해가 보일 듯하면, 하늘의 반절은 순식간에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짙게 일렁였다.
불꽃은 퍼진다. 머리 위로, 머리 너머로. 옅고 넓게 꺼지면서 퍼진다. 우리가 아는 창공의 색으로 반구가 만들어지고 구름은 흘러간다. 사람들은 다시 분주해지고 소리도 들려온다. 넬라는 기다렸다. 어제 젖은 냄새를 풍기던 하늘이 모여 소낙비를 내려도, 소낙비를 옆으로 밀어낸 태양이 서서히 서쪽으로 저물고, 황금빛 햇살이 넬라의 뺨을 쓰다듬어도, 노을의 불씨가 하늘을 다시 덮고, 푸름과 뒤섞여 보랏빛으로 변할 때도. 그리고 다시 별이 고개를 내밀 때도, 넬라는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새벽이 되었다.
해가 뜬다.
넬라는 하늘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쩌적.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살을 찌푸리니, 허공에 작은 균열이 일었다. 균열은 서서히 크기를 키워가더니, 쩍, 벌어지며 새카만 공허로 바뀌었다. 혜성일까? 일로이가 결국 혜성을 부서뜨리는 데 실패하고 혜성이 결계를 뚫고 세상에 내리꽂히는 걸까?
아니.
넬라는 그렇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용사라는 녀석은 자기가 내뱉은 약속은 반드시 지킬 녀석이니까.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넬라는 공허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일로이를 보며 말했다. 일로이의 등 뒤로, 다프네가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일로이는 멋쩍게 웃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구해왔어.”
“어쩌라는 거야.”
넬라는 평소대로 톡 쏘는 말투로 응대했지만, 입가에 자꾸 미소가 떠올랐다. 이 녀석에게 웃어주고 싶지 않은데, 녀석이 뿌듯해할 만한 반응을 보여주고 싶진 않은데. 넬라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붙잡다가, 표정이 그만 망가져 버렸다.
“고개는 왜 돌리는 거냐?”
“닥쳐.”
간신히 얼굴을 무표정으로 바꾼 넬라가, 일로이의 뒤로 시선을 옮겼다. 목숨을 내던질 것처럼 비장하게 결계 속으로 들어갔던 제 동료는, 새삼 뻔뻔한 표정으로 다시 나왔다. 심지어 새로 올라선 경지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모양새였다.
“너는 어째 당당하게 나왔다?”
“어머, 제가 살아있어서 불만인가 봐요. 오매불망 제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면서.”
“닥쳐. 너 기다리고 있었던 거 아니거든.”
넬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다프네가 은근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일로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요?”
“너네 둘 다 기다리지 않았어!”
넬라에게 받아치는 목소리가 여유롭다. 평소와 그리 다를 바가 없어 보였지만, 넬라는 왠지 모르게 저 태도가 거슬렸다. 다프네에게 뭔가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그럼 뭘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다프네의 물음에, 넬라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일로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혜성. 혜성은 어떻게 됐는데? 설마 그냥 저 공간에 가둬놓고 너희들끼리 탈출했다던가, 그런 일이 일어난 건 아니겠지?”
넬라의 추궁에, 일로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심 그 웃음의 의미를 알 것 같아, 넬라는 입술을 앙다물며 분을 삭였다.
“혜성 말이지.”
“…그래, 혜성.”
일로이는 자신이 찢고 나온 공허를 가리켰다. 공허가 흔들리며 점점 그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넬라가 눈살을 팍 찌푸리자, 일로이는 웃음을 부드러운 미소로 바꾸었다.
“저렇게 됐어.”
공허가 열렸다. 넬라는 감작스레 왕도에 쏟아지기 시작한 빛나는 입자들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탑 아래에서 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섯 번째 재앙. 퇴치 완료.”
왕도의 어느 여름.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넬라는 손 위로 내려앉은 눈송이를 보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내뱉었다.
“뭐야, 이게.”
그리고는, 뒤로 풀썩 드러누워 안도한 마음으로 더 크게 웃었다.
하늘에 난 균열이 눈구름처럼 혜성의 조각을 흩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