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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45화 (146/158)

Chapter 145 - 145. 한여름에 내리는 눈 (2)

전장을 정리하던 사람들의 콧잔등에, 이마에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난데없이 내린 눈에, 사람들은 모두 꿈을 꾸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눈은 펄펄 내렸다. 낮의 틈새에 낀 어두운 공허에서, 하늘빛으로 반짝이는 눈은 내렸다.

“…이게 무슨 일이래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잔해와 시체를 정리하던 손놀림을 잠시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의 출처는 알 도리가 없었다. 새카맣게 열린 하늘의 균열이라고 막연하게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균열의 어둠이 두렵다 느끼고 있었다.

“무섭군.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갑자기 웬 눈이람.”

“그런데 이상하게… 불길하진 않지 않아요?”

누군가가 그리 한 말을 사람들은 부정하지 못했다. 어둠은 깊었지만 눈은 불길하지 않었다. 햇빛을 받은 눈은 다양한 색으로 빛났다. 보이지 않는 프리즘들이 빛을 흩뿌리고 퍼뜨렸다. 바닥에 내려앉은 눈은 바로 녹지 않았다. 하늘의 균열이 볕을 가렸다.

눈은 차차 쌓였다. 사람들은 쌓이는 눈을 신기한 듯 보고 있었다. 눈이 쌓이면 잔해를 치우는 데 방해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눈이 쌓이게 두었다. 그저 지금 벌어지는 일은 왕도의 모든 이들이 동시에 꾸는 전후의 백일몽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별 신기한 일을 다 겪겠네. 한여름에 눈이라니.”

“그러게요.”

잔해 위로, 시체 위로 눈이 쌓인다. 성내로, 성밖으로. 혜성은 그 뿌리를 잃고 그저 눈으로 전락했다. 세상은 멸망하지 않는다며 눈은 내리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했다. 그 소식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건, 눈이 완연히 거리 곳곳에 쌓인 후였다.

“눈이 내리는군요.”

“쓸데없는 징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혜성이 그리 사라지고서 내리는 눈이 아니더냐.”

남쪽 성문 앞. 아그네스는 내리는 눈을 맞고 있었다. 퀘노어 대공은 그녀로부터 한 발짝 뒤에 물러서 있었다. 바람이 불어 대공의 검은 옷자락이 펄럭였다.

“그나저나, 그대는 치료를 받지도 않고 대체 여기서 무얼 하는 거냐.”

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대공을 바라보았다. 붕대 아래, 사자가 남긴 세 갈래 상흔에 퀘노어의 피부가 너덜거리고 있을 거다. 출혈은 얼추 멎었으나, 치료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깊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대공은 제 치료를 가장 후순위로 미뤄두었다. 덕분에 가장 기본적인 응급처치만으로 퀘노어는 이틀을 버텼다.

“저는 그냥 두어도 살 겁니다. 다른 부상병들은 지금 당장 치료받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테지요. 고통은 참으면 그만이지만, 죽음은 이를 악물고 있는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니.”

“그대의 선택이다. 그대가 죽지만 않는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마.”

아그네스는 제 몸을 점검했다. 상처는 얕았다. 깊고 날카로운 통증은 골절이고, 넓고 둔중한 통증은 타박상, 불에 덴 부위를 고드름 끝으로 지지는 통증은 자상이다. 아그네스는 아픔을 분류하며 세었다. 분 단위로 성장하고 개화하는 재능이 그녀의 몸을 보위했다.

“전투에 나서서 상처가 없다는 게 부끄럽구나.”

“옥체가 무사하다는 걸 다행으로 여깁니다.”

제 몸을 지키기만 할 뿐이면, 퀘노어가 몸에 상처를 입을 일은 없었을 거다. 아그네스는 부끄러움을 내색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로 전하는 것으로 그 민망함을 대신했다.

“나라를 떠받쳐야 할 사람이, 누군가에게 떠받쳐지고 있었구나.”

“서로를 받치는 게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해서 이겨냄을 부끄러워하지 마소서.”

아그네스는 쓰게 웃었다. 사람에게 의지함이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다만, 죄스러운 기분일 뿐이었다. 용사가 구하지 못했다면 차라리 책임이라도 뒤집어쓰고 싶은데, 용사는 한 번도 구원에 실패하지 않았다. 여왕은 그를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슬프다 여겼다.

“알았다. 새겨들으마. 군왕도 이젠 사람이구나.”

“사람이 아니었던 적이 없습니다, 폐하.”

퀘노어의 말은 곧았다. 아그네스는 곧음을 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퀘노어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군신의 대화는 개인의 영역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아그네스는 불만을 토해내기를 그만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균열은 아직 눈을 뿌리고 있었다.

“혜성이 어찌 되었는지 알 방도가 있겠느냐. 이틀이나 가만히 기다리려니 답답하구나.”

“마법사들의 보고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그렇겠지.”

아그네스가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렸을 때였다. 왕도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홀현히 나타나 서 있었다. 눈이 조금 쌓인 그 잿빛 머리칼을 바라보며, 퀘노어와 아그네스는 눈을 깜박였다.

“용사 일로이, 혜성을 격파하고 왔나이다.”

입이 움직이고 나서야, 그들은 그게 헛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아그네스는 눈살을 찌푸린 채 일로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용사는 너무도 태연하게 등장하고, 너무도 태연히 보고했다.

“그대는 언제까지 나를 놀라게 해야 직성이 풀리겠느냐.”

“송구합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일로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그네스는 그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고개를 숙여도 아그네스는 일로이를 슬쩍 올려다봐야 했다. 아래로 구름처럼 흘러내리는 잿빛 머리카락.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아그네스가 손을 슥 뻗었다.

“폐하-”

“가만히 있거라.”

아그네스의 손이 일로이의 머리를 쓰다듬

었다. 용사의 몸은 겁먹은 개처럼 뒤로 물러나려다가 움찔거림에 그쳤다. 공치사고, 뭐고, 지금은 그저 가만히 용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그대가 세상을 구했구나. 또 한 번 말이다.”

“제가 구한 것이 아닙니다. 폐하와 더불어 이 나라를 지키고 있던 모든 이들이 구했지요.”

“내가 지키고자 한 건 알량한 땅덩어리와 깃발이었고, 네가 지키고자 한 건 세상이었다. 그대가 세상을 구했다는 말에 이견을 달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여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로이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여왕은 손을 슬쩍 떼며 일로이의 턱에 손을 올려 고개를 들게 했다.

“고맙다.”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여왕이 헛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무언의 축객령에, 일로이는 인사를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퀘노어 스트로프가 지친 미소로 용사를 맞았다.

“빚은 갚았네, 일로이. 북부의 전사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를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퀘노어는 눈송이가 떨어지는 손바닥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빚은 또 쌓였군, 일로이. 이래서야 그대에게 진 신세를 내 평생을 걸어도 갚을 수 있을까 모르겠네. 청산하면 그대로 더 큰 빚을 얹어주니.”

“빚이라 생각하지 마시지요. 저 또한 돈이나 빌려준다 생각하고 행하는 일이 아니었으니.”

“사람이 은혜는 흘려도 빚은 흘리지 못하지. 그러니 빚이라 생각하게 해주시게.”

퀘노어가 쓴웃음과 함께 말했다. 일로이는 더 생색내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버텨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치게 받았습니다.”

“뭐, 그대는 받았다 생각하겠지만, 나는 아직 상환이 끝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네.”

대공은 용사에게 다가갔다. 퀘노어는 슬쩍 용사를 가늠해보려 했지만, 이미 용사는 대공이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까마득하게 벗어난 뒤였다. 벽을 넘어서고, 산을 넘어서도 더 높은 곳이 있었다. 아득한 그곳에서, 일로이는 손짓조차 하지 않고 가만히 관망하고 있었다.

“호승심을 불태우는 것도 좋지만, 몸 생각부터 하시죠, 대공.”

퀘노어는 머쓱하게 웃으며 물러났다. 거인을 물리친 일로이는 상처 입은 전사였지만, 지금의 일로이는 신화의 영웅이고 만민의 우상이었다. 군왕은 사람이었지만, 지금의 용사는 퀘노어가 보기에도 사람이라 부르기 힘든 기류를 내뿜고 있었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말게, 일로이. 내가 따라잡을 시간은 줘야지. 이제는 내가 한 수 가르쳐달라 해야 할 지경인 것 같아.”

일로이는 무어라 말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겸양을 떠는 것도, 지금은 실례라는 사실을 일로이는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완전히 회복되신다면 제가 북부로 가겠습니다. 그때 다시 겨뤄보도록 하죠.”

“이번에는 내가 다시 남쪽으로 갈 일을 만들지 말아주게.”

농담하듯 웃는 퀘노어. 대화를 가만히 듣는 아그네스. 일로이는 두 사람을 눈에 담아내고는 발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쌓인 눈 위로는 일로이의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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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좀 어때?”

게오르그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게오르그는 꽤 우스운 꼴을 하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방패를 들었을 왼팔은 부목과 붕대로 묶여있었다. 갈비뼈도 두어 대 부러졌고, 자상은 셀 필요도 없을 정도로 많았다. 아마 보이지 않는 미세 골절도 무수히 많을 거다. 안쓰러운 자식. 전선의 선두에서 온갖 용을 다 쓴 듯했다.

“최악이지만 좋다. 어찌 됐든 이겼잖나.”

“보통 이야기에서 전쟁 전에 약혼녀 언급하면 그 전쟁에서 죽는 거 알지? 너 목숨 건졌다.”

“그런 이야기가 다 있었나. 생전 처음 들어보는군.”

멀뚱하게, 신기하다는 듯 말하는 게오르그에게 난 웃어 보였다. 위중한 상태는 아니었기에, 게오르그의 치료는 후순위로 밀렸다. 물끄러미 날 바라보는 시선. 나는 게오르그의 눈을 마주보며 표정을 찡그렸다.

“뭐냐, 징그럽다.”

“…아니다. 수고 많았다, 일로이.”

할 말은 더 없는 것 같았다. 나 또한 구태여 나불거릴 대화거리도 없었기에, 무릎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쯤 몸을 돌아 세운 내게, 머뭇거리던 게오르그가 말을 건네었다.

“넌 어디 다친 곳 없나?”

“있었으면 이래 돌아다니고 있었겠냐? 거인 때처럼 얌전히 병실에 누워있었겠지.”

정적과 시선의 교환. 게오르그는 나를 들여다보려는 듯한 눈길을 보냈지만, 나는 무표정을 유지했다. 어째서 저런 질문이 튀어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입원해서 골골거리는 내가 할 소리는 아니겠군.”

게오르그는 중얼거리며 베개를 바로잡았다.

“난 잔다. 약 기운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겠어.”

곧바로 눈이 감기고, 긁는 듯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게오르그의 병실을 나서 옆 방으로 들어갔다. 용사 파티의 본부는 임시 병동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내 방을 제외한 모든 곳이 환자를 수용하는 공간으로 바뀐 와중, 소독약의 독한 냄새가 복도에 감돌았다. 나는 익숙하게 복도를 돌고 계단을 내려가, 한 방 앞에 도달했다.

내가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병실의 문은 절로 열렸다.

“…안녕.”

마리안느와 다프네가 침대 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게오르그와 별 다를 바가 없는 상태였고, 다프네는 그런 마리안느를 간호하며 무언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는 듯 얼굴을 가까이 하고 있었다.

“들어와 앉아요.”

다프네가 손짓했다. 나는 떨떠름한 웃음과 함께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방의 한쪽 벽면에는 성창이 기대어져 있었고, 휑했던 가구들에는 다프네의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공백을 채워주고 있었다.

“몸 상태는? 나아지고 있어?”

“예. 나쁘지 않습니다. 자잘한 부상이 많지만, 크게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지라.”

눈에 띄는 점이라면, 머리에 감겨있는 붕대 정도일까. 유심히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낀 듯한 마리안느가 제 머리를 문질렀다.

“큰 상처는 아닙니다. 조금 찢어졌을 뿐.”

나는 그녀의 조금이라는 말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환부를 감추려는 그 모습에, 나는 구태여 붕대를 들춰보지는 않기로 했다. 그녀의 은색 앞머리가 짧게 잘려 나가 귀엽게 팔랑거리고 있었다.

“다프네는?”

“일로이보다는 멀쩡한 거 같은데요. 또 밤샌 거 아녜요? 어디를 돌아다니길래 매번 숙소에는 없고 아침에 홀연히 나타나는 건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날개’를 사용해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물의 피해 현황을 확인했다는 건, 구태여 소문을 낼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산책.”

왕도에 마물이 대부분 몰린 탓이었을까. 대륙의 다른 지역에는 피해가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다. 마물 토벌의 선두에 선 북부는 말할 것도 없고, 성국으로 넘어가는 동쪽 지역이나, 서쪽 지역도 힘겹게 마물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밤이 깊으면, 나는 피해가 큰 지역으로 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지 살폈다.

‘…누가 여기 왔었다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걱정했던 바크틴스. 아직 마을의 복구가 온전치 않은 상황에서, 마물의 습격을 버텨낼 수 있었을지 걱정한 해안 도시는, 생각한 것보다 피해가 크지 않았다.

‘예. 이름을 밝히지 않은 누군가가 와서, 홀로 마물을 맞아 싸웠습니다.’

얼굴을 가린 채, 자신을 이름 없는 용병으로 소개한 누군가였다고, 바크틴스의 지방관은 말했다.

“…변명을 할 거면 성의라도 좀 보이세요.”

다프네는 입이 댓 발로 튀어나온 채 대답했다. 원망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의자를 끌어당겨 와 앉았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섯 번째 재앙도 어찌어찌 물리쳤네요.”

눈이 창틀에도 쌓였다. 나는 보드랍게 쌓인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남았군요.”

겨우 하나 남았다는 말일까, 아니면 여태 모든 재앙은 그 한 번을 위한 준비운동이었다는 말일까. 나는 기억을 가만히 되짚어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일곱 번째 재앙.

그러고 보니, 원작은 어떤 결말을 맞았더라…?

기억을 파내는 생각을 깨트린 건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다프네는 말없이 손을 슥 저었고, 문이 열리며 반가운 손님이 얼굴을 보였다.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 있을까요?”

아이시스는 방안을 슥 둘러보다가, 내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성녀의 눈빛에, 나는 그만 나도 모르게 눈을 찡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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