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6 - 146. 한여름에 내리는 눈 (3)
“자, 됐어요.”
“…감사합니다.”
치료는 순식간에 끝났다. 아이시스는 땀 닦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리안느는 멀쩡해진 제 몸을 내려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올렸다. 여전히 성녀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한 눈치였다. 아이시스는 마리안느의 표정을 보고는 구태여 말을 붙이지 않았다.
“다프네 씨는 괜찮은 건가요? 원하신다면 마법을 걸어드릴 수 있는데.”
“아뇨…. 당분간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요양하면 괜찮을 거예요. 단순한 마력 고갈이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아이시스가 부드럽게 다프네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금빛 기운이 스쳐 지나간 끝에, 아이시스가 손을 떼며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대로네요. 큰 문제는 없어요. 무리한 마법을 사용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예요.”
다프네가 내게로 흘긋 시선을 돌렸다. 보랏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나를 찔러댔다. 그와 동시에, 아이시스와 마리안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죄송하지만 저 사람 진료 좀 부탁드릴게요.”
“나도 멀쩡한데.”
물론, 내 말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묵살당했다. 아이시스는 의자를 하나 더 끌어와 내 앞에 돌려세우고는 앉았다. 윤기가 흐르던 금발이 푸석거렸다. 눈은 피로에 절어있고 옷은 여느 의무병과 같았다. 성녀의 복장을 포기한 아이시스는 그 어느 때보다 성녀 같은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안 물어봐도 먼저 다 치료하고 왔어요. 위층에 있는 게오르그에게도 들렀다 왔으니, 저한테 얌전히 몸을 맡기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아이시스가 내미는 손…, 아니, 손아귀라고 불러야 좋을 것 같은 게 내 어깨를 덥석 잡았다. 성녀, 무투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인 듯했는데, 내 어깨를 감싸 쥐는 힘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억세었다. 하긴, 아무리 의료 지원이라고 해도 재앙과의 전투를 두 번이나 겪었으니, 강하지 않은 편이 오히려 이상하다 하겠다.
“눈알 굴리지 말고 저 봐요. 괜히 마력 끌어올리지 말고.”
“말이 험하다? 무슨 잡아두고 심문하는 것도 아니고.”
저런 건 안드레 주교와 닮은 건가. 아이시스는 내 양 뺨을 붙들고는 내가 옴짝달싹할 수도 없게 만든 후 성법기를 서서히 풀어냈다. 그 과정에 전혀 무리가 느껴지지 않고 편안했다.
“그대로 받아들여요. 마력을 은근슬쩍 흘리는 것 정도야 느낄 수 있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아이시스의 단호한 시선과 목소리를 이기지 못하고 힘을 풀었다. 향기가 퍼지듯 서서히, 그리고 천천히. 안개 같은 금빛 성법기가 내 몸에 들어왔다. 머리부터 시작해 목, 어깨, 그리고 몸의 모든 말단부위까지. 그리고, 내 몸을 훑어보던 아이시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올려다 본 그녀의 파란 눈은 이리 말을 걸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나는 눈빛으로 대답을 들려주는 대신, 미소를 지어내며 말했다.
“어때. 멀쩡하지?”
잠시 맞춰서 넘어가 달라는 무언의 부탁과 함께.
“…네. 그러네요. 굳이 치료가 필요한 거 같지는 않아요.”
아이시스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애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눈동자가 덜덜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지, 아이시스는 눈을 계속 깜박이며 표정을 가다듬으려 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저렇게 다쳤는데, 혼자 이렇게 멀쩡해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요.”
“전투에 처음부터 참여하지도 않았잖아. 이렇게 멀쩡할 수도 있지.”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지만, 아이시스는 표정은 가벼운 대화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이시스는 굳은 입가를 움직이며 억지로 미소 비슷한 걸 만들었다.
“그래도 조심하세요. 당신이 언제까지고 그렇게 튼튼하리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명심할게.”
잔소리를 마지막으로, 성녀의 표정은 평소의 단호한 온화함으로 돌아왔다. 아이시스와 다프네의 표정을 흘긋 엿보니, 의구심은 남아있었지만 일말의 안도감이 찾아온 듯했다. 아이시스는 내 뺨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나가서 걸을까요. 성국에서 당신에게 긴밀히 전달해달라 부탁한 전언이 있어요.”
방의 입구에서 아이시스는 나를 돌아보았다. 푸른 시선은 나를 가두려 하는 게 아니었다. 흘러가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듯한, 그런 불가피한 흐름을 바라보는 무력한 이의 눈. 아이시스는 그녀의 표정이 더 읽히고 들키기 전, 재빨리 고개를 돌려 문을 열었다.
“잠깐 다녀올게.”
다프네와 마리안느를 뒤로하고, 나는 아이시스를 따라 방을 나섰다.
뽀드득. 하고 눈이 뭉개지며 소리를 냈다. 눈은 급하게 내리지 않았다. 쌓이는 속도와 눈을 치우는 속도가 일정했다. 나는 나란히 걸으려 무던히 애를 쓰는 아이시스의 보폭을 바라보았다. 아이시스는 조용했다. 나는 괜히 눈치를 보지 않으려 앞만을 바라보며 걸었다.
용사 파티의 본부를 지나, 상점이 모두 문을 닫은 상점가 골목에 들어섰을 때였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차양 아래에서, 아이시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뭐라고 말해주기를 바라세요?”
우뚝.
발걸음은 멈추었다. 두 걸음 앞. 나는 뒤로 돌아보았다. 아이시스의 투명한 눈은 눈(雪)과 닮았다. 쌓여서, 하늘을 투명하게 비추는 눈과 닮았다.
“치료는 불가능한 거야?”
“어디가 어떻게 문제인지는 알고 묻는 말이에요?”
내가 말을 않자, 아이시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팔짱을 낀 손가락이 팔뚝을 두드린다. 숨길 수 없는 못마땅함이 미세하게 일그러진 입가에 드러났다. 서로의 숨은 떠돌았다. 쌓이는 눈만큼 나와 아이시스의 눈길이 바뀌고 쌓여갔다.
“말 그대로 심장이 찢어졌어요. 종이처럼. 너덜너덜하게 찢어졌다구요. 어떻게 살아있는 건지도 잘 이해가 안 가요. 커다란 마력의 응집체 같은 게 억지로 심장을 잡아두고 있긴 한데….”
아이시스는 말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입에 담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 마력이 심장을 붙들고 있기에 당신이 살아있는 거지만, 그 마력 때문에 제가 치료할 수 없어요. 마력이 너무 강해서 성법기가 간섭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요.”
치료할 수가 없다. 나는 지금도 왼쪽 가슴을 두드리는 가짜 심장을 느꼈다. 내가 슬쩍 눈살을 찌푸리자, 아이시스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심장이 뛸 때마다 가슴이 몇십 개의 바늘에 찔리는 느낌일 텐데, 어떻게 그렇게 태연한가요? 지금도… 말도 안 되게 고통스러울 텐데….”
“얼마나 버틸 수 있어?”
아이시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이 무리하지만 않는다면 마력의 힘이 다할 때까지. 고통만 무시한다면 멀쩡한 사람처럼 늙어죽을 때까지 살 수 있을 거예요.”
“무리한다면?”
“심장이 발기발기 찢어져 죽겠죠, 뭐.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거면서 굳이 물어요?”
아이시스가 짜증을 내듯 말했다. 다시 한 발짝. 아이시스는 내 옆에 섰다. 차양이 눈을 맞아줘 몸에 쌓인 눈이 녹아 옷이 젖었다.
“그런데 무리할 거잖아요. 내가 아무리 뭐라 하더라도. 그리고 애초에, 내가 왈가왈부할 자격도, 명분도 없으니까. 용사란 애초에 그런 존재잖아요. 세상을 위해 사는 존재.”
말이 쓰다. 아이시스는 고개를 돌려 차양 밖을 보았다. 햇빛이 갈라지며 드리웠다.
“용사가 어떻게 죽는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걸요.”
“죽는 때도, 방식도 삶의 일부야. 내가 뜬금없이 길 가다가 쓰러져 죽으면 다 손가락질할걸.”
아이시스는 내 말에 찝찝하게 입을 앙다물었다.
“성녀도 마찬가지잖아. 세상을 위해 살아야 하는 건.”
“이야기 주제 돌리지 마요. 지금 당신 몸 이야기 하고 있는 거니까.”
죽음에 가깝다는 말은 멀었다. 그렇기에 죽음 또한 가깝다 느껴지지 않았다. 심박은 고통이고 고통은 삶이고 생이었다. 나는 가슴을 매만졌다.
“은퇴하세요. 돈 모아둔 건 질릴 정도로 많을 것 같으니까. 어디 따뜻한 남쪽 땅에 별장 하나 지어놓고 흔들의자에서 고양이나 쓰다듬으면서 살아요.”
“난 은퇴해도 북부 가서 살 거야. 남방은 사람이 많아서 질색이거든.”
“어련하시겠습니다.”
소리 없는 말이 있었다. 용사는 그만둬서는 안 된다. 나는 그만둬야만 한다. 삶과 시간은 내리는 눈처럼 쌓이고 쌓여 원래 그 바닥이 어땠는지 알 수 없었다. 살고자 시작한 일이었던가. 살리고자 시작한 일이었던가. 그들은 눈이 아니니 녹지 않는다. 덜어내고 싶어도 이미 하나가 되어 덜어내지 못한다.
“괴로워 보였어요.”
“뭐가?”
“당신이 방법을 찾겠다고 명상하기 시작했을 때.”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도, 아이시스도 멍하니 변해가는 빛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당신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고마워.”
“세상을 다 구하고도, 멀쩡하게 웃으면서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용사는 병사 하나보다 우선시될 수 있다. 그 병사는 누군가에게는 세상보다 우선시될 수 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에게도 세상보다 우선시 되어서는 안 된다.
“가볼게요. 시간을 많이 낼 수 없었어요.”
“성국에 한 번 들를게. 주교랑 교황께도 인사를 드려야 하니.”
아이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양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아이시스가 사라지고도 한참을 차양 아래에 가만히 서 있었다.
“[미안하구나.]”
문득, ,성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안이 텁텁했다. 성검은 잘못이 없다. 잘못을 따져야 한다면, 세 번째 개방을 오롯이 달성할 수 없었던 나다.
“나도 미안해.”
“[네 생각을 온전히 읽기가 힘들구나.]”
성검의 말에, 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걸 바라디 마지않고 있었는데, 막상 그리 되니 불안감이 먼저 찾아오는구나.]”
“내가 죽어가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킥킥 웃으며 발을 떼었다. 아이시스의 발자국을 바라보고는, 나는 그 반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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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느와 다프네가 외출한 어느 오후, 나는 노크 소리에 1층 로비로 걸어 내려갔다. 한 번만 들리고 만 노크에, 나는 긴가민가하며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그리고 반사적으로 문을 닫았다. 잠시간의 정적 후에, 참을성 있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다시 열린 문 너머에도, 검은 머리의 소녀는 서 있었다. 괴물의 흔적은 사라졌고, 지금은 그저 나탈리라는 사람의 모습으로 있다.
“…여긴 어쩐 일로 찾아온 거니?”
“제자가 스승의 집에 찾아오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닌 걸로 알아요.”
나탈리는 뻔뻔하게 대답을 들려주었다. 문밖에서는 여름의 눈이 녹고 있다. 백일몽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부츠에 묻어있던 눈을 카펫에 털어내고, 나탈리가 집으로 들어왔다.
“넓네요.”
“놀러 오는 건 좋다만, 먼저 연락이라도 좀 넣고 올래?”
아카데미는 아직 휴교 중이다. 마탑이 제대로 복구되어야 아카데미도 돌아간다. 이번 전쟁에서 학생이 세 명 죽었다. 그 죽음은 내게 다른 검을 세 자루 꽂아 넣었다. 나탈리의 얼굴마저 조금은 보기 힘들었다. 나탈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잘 지내고 있어? 그레이슨…, 유진의 가문에 몸을 의탁했다며.”
“네. 모든 걸 보장해준다는 말을 듣고 갔어요. 혼자 뭘 하기에는 모르는 게 너무 많으니.”
유진과 코라는 죽지 않았다. 코라의 상처는 깊었지만, 차차 회복했다. 전쟁에서의 공이 참작되어 나탈리는 사면받았다. 자유의 몸이 된 나탈리는 살기를 결정했다.
“하나씩, 알아가면서 살아보려 해요.”
“잘 생각했어.”
2층, 부엌. 나는 나탈리를 식탁에 앉혀두고 차를 준비했다. 뭐가 그리 궁금한 건지, 나탈리는 계속 부엌을 왔다 갔다 하는 나를 쫓았다.
“뭐 묻고 싶은 거라도 있어?”
나탈리는 찻잔을 붙들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나는 턱을 까닥이며 말하라 채근했다.
“저랑 비슷한 냄새가 나요.”
“무슨 소리야?”
나탈 리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눈을 감았다, 떴다.
“교수님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