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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47화 (148/158)

Chapter 147 - 147. 한여름에 내리는 눈 (4)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나는 집무실의 책상을 두드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비슷한 냄새가 난다는 말. 내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나탈리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신경 쓰지 말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놀라는 표정이 못내 신경이 쓰였다. 무슨 말이었을까.

“혹시 짐작 가는 거 있어?”

책상에 기대어 있는 성검을 바라보며 묻자, 그녀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들려왔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그리 깊게 생각해볼 말인지는 모르겠다.]”

“괜히 사람 신경 쓰이게 만들고 말이야.”

나는 투덜거리며 너저분한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서류 업무를 보지 않은 사이 쌓인 문서가 산더미였다. 나는 하나씩 문서를 읽고 도장을 찍고, 분류했다. 오랜만에 보는 문자의 나열이 어지럽게 떠돌았다. 안경이라도 하나 맞춰야 할 듯하다.

“이건 후원자 목록…, 그리고 이건 모험가 길드에서 보낸 거고.”

감사장, 홍보대사 위촉, 협회 초청. 편지들은 여전히 정치적이었다. 여왕의 엄중한 경고를 교묘하게 회피하며 어떻게든 나를 잡아두려 한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교활하고, 여지가 있다 싶으면 집요하게 들러붙는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상징을 찾아다니고, 지지에 목말라 하지만 야심은 얕다. 그들의 야심은 언제나 이상과 사상이 아닌, 그 수단, 권력에 머무른다.

“안쓰럽네. 도대체 무엇이 이 사람들을 이렇게 움직이게 하는 걸까.”

“[사람 사는 일이다. 안쓰러운 게 당연하지.]”

나는 혀를 내차며 편지들을 한데 모아 바구니에 넣었다. 나중에 불태울 것들이다. 얼추 분류가 끝나고, 나는 다른 바구니에 보관해둔 편지를 꺼내 들었다. 따로 시간 들여 읽을 것으로 분류해둔 것이었다. 대개는 화려하지 않고 수수한 편지 봉투들이다.

“이건 레아가 보낸 편지네.”

그 모험가 삼총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이번 전투에 그들도 참여했다. 쏠쏠한 전과를 올려서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제법 유명 인사가 된 모양이었다. 내게 도움이 되었다면 정말 좋겠다며, 언제나 응원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모험가 길드에 조만간 몰래 들르겠다고 답신을 적었다. 한 번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함께.

“이건 대장장이 로빈이 보낸 거고.”

마물과 싸울 무기 제작에 앞장섰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너울이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다고, 훌륭한 검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답신을 적었다. 수없이 많은 편지와 감사 인사. 나는 하나씩 편지를 읽고 답장하며 고요히 시간을 보냈다.

“…이건.”

나는 물에 젖어 너덜너덜한 편지 봉투 하나를 건져냈다. 봉투에 비해, 들어있는 편지지는 멀쩡한 것이었다. 봉투를 뒤집어 확인한 발신인에, 나는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얘가 갑자기 나한테 왜 편지를 보낸 거지.”

아르옌 엘미온. 봉투에는 그리 적혀있었다. 나는 편지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읽지 않고 보았다. 아르옌의 성질머리와는 정반대로 정갈한 글씨체였다. 글자 일부가 번져 있었지만, 알아보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글은 짧았지만 모자라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망설이기를 끝내고 찬찬히 편지를 처음부터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간 악신 숭배자들과 그들이 퍼뜨린 재앙 숭배를 잡으러 다니고 있었다.

편지는 대뜸 시작했다. 나는 아르옌의 목소리만큼이나 담담하고 딱딱한 그의 글을 읽었다.

추적은 쉬워 보이면서도 그렇지 않았다. 용병에게 추적은 일상이다. 당하는 쪽이든, 하는 쪽이든 말이다. 용병의 왕이라는 칭호로 불리던 내게는 말 그대로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고 쉬운 일인 게 추적이다. 하지만 놈들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생각과 행동의 방식이 인간의 그것과는 아득히 다른 무언가였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으로 악신 숭배자들과 재앙 숭배자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놈들은 숨기보다는 꼬리 자르기를 잘했다. 숨은 놈은 찾아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기만하는 놈은 어렵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놈들의 진짜인지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와 주교는 되는대로 놈들을 죽였다. 심문은 효과가 없었으니까. 사로잡아 심문을 시도하는 건 가장 나쁜 놈들이었다. 나는 악독한 이들을 살려 정보를 물었고, 괴물로 변한 숭배자들의 목을 쳤다.

그건, 일종의 고해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글을 더 읽어갔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감흥은 없다. 어차피 죽어 지옥에 떨어지리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답답함이 느껴졌다. 내가 죽이고자 하는 이들은 죽지 않았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이들이 죽었다. 주교는 이에 대해 뭐라 말하지 않았다. 나는 주교를 탓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었군.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심경의 변화라도 맞이하는 중일까. 말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추적은 계속될 거다. 네가 혜성을 격파하고 난 후에도, 호문쿨루스를 사로잡은 후에도 놈들은 근거지를 옮겨가며 끈질기게 명줄을 이어가고 있으니까. 꼬리를 잡아당겨 놈들의 본체로 다가가려 해도 헛손질만을 계속할 뿐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놈들은 궁지에 몰렸으니까. 재앙은 하나만 남겨두고 전멸, 놈들의 세력 역시 이번에 대폭 줄어들었지.

편지는 마지막 문단을 남겨두고 있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남은 글을 읽었다.

내가 무엇을 위해 떠났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어디 있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삶과 세상에서 나를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 부정당했고,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었다. 이번 여정이 그 마지막에 다다를 기회라고 생각한다. 내 삶이든, 생각이든, 악신 숭배자들이든 말이다. 재산을 모은 곳을 남기겠다. 네가 알아서 잘 쓰리라고 생각한다.

편지는 금고의 주소와 함께 끝났다. 나는 편지지를 접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과가 들려올 때까지는 옴짝달싹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바보 같은 놈.

“[이거 또 골치 아픈 상황이구나.]”

“주교가 같이 있으니까 괜찮으리라 생각하지만, 이 사람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 방법이 없잖아. 성국에 또 찾아가 봐야 하려나.”

나는 의자에 몸을 묻었다. 아르옌이 걱정할 인물은 아니지만, 주교가 있다면 더더군다나. 그저 좋은 소식을 들려주기를 기대하는 수밖에는 없겠다. 그 뒤로는 용병이 결판을 내고 싶다고 하면 얼마든지 받아주면 될 일이다. 바보짓만 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돈은 왜 나한테 남긴 거야. 쓸데없이.”

목숨만 내던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길게 이야기를 나눠야 할 녀석이라 생각했으니. 아르옌의 편지를 마지막으로, 서류 작업은 끝났다. 이제야 좀 깨끗해진 책상 위로, 나는 몸을 턱, 뉘였다. 노곤함이 몰려왔다. 왕도의 거리는 아직 조용하다. 서늘한 여름. 미풍이 햇살을 싣고 방을 드나들었다.

“일곱 번째 재앙….”

홀로 있을 때는 재앙을 생각했다. ‘근원’에 대한 기억은 없다. <다신 돌아오지 않겠다>에 대한 내 기억은 여섯 번째 재앙에서 멈춰있다. 원작은 그에 대해 어물쩍 넘어갔던 것 같기도 하면서 어중간하게 끝났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잊거라. 재앙이 반드시 지금 전부 나타나리라는 보장도 없으니.]”

“말이 모호해서 그래. ‘근원’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 거야?”

“[나라고 해서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다, 일로이.]”

근원. 무엇의 근원인지도 모르고, 어떤 형태로 닥쳐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끝내야 한다. 정보가 없다고 모른 척하고 있기에는 이미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조만간. 알게 되겠지.”

나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성한 답장들이 한 무더기였다. 한숨이 나오다가도 작성된 편지를 바라보면 쓰게 미소가 나왔다. 나는 본부를 나서 우편함에 내가 쓴 편지를 하나씩 넣었다. 누구에게 보내는 건지, 우표는 제대로 붙어있는지 확인하며.

“바빠 보이는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맞이했다.

“웬일이냐. 너야말로 바쁜 거 아니었어?”

게오르그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할 말도 있고 해서, 잠깐 시간이나 낼 수 있냐 물어보러 왔다.”

“딱 맞춰 왔네. 지금부터 혼자서 쉴 생각이었는데.”

“잘됐군. 들어가서 말하지.”

반농담으로 말했지만, 게오르그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나는 본부 안으로 들어가는 게오르그의 뒤를 한숨을 내쉬며 따라갔다.

“네가 웬 편지냐, 일로이.”

“나한테 편지 보낸 사람들에게 답장. 그리운 이름들이 있더라.”

“…그렇군.”

게오르그는 제집 안방처럼 로비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갑옷이 아닌 녀석의 차림은 오랜만이었다. 그냥 맥주랑 운동 좋아하는 옆집 아저씨 같은 풍모다. 나는 차가운 병맥주를 지하에서 꺼내 가지고 올라와 게오르그에게 건네었다. 게오르그는 이빨로 코르크를 뽑아버리고는 벌컥벌컥, 반쯤 마셔버렸다.

“고맙다. 이게 꽤 그리웠어.”

게오르그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고 병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나를 빨리 쫓아내고 싶은 마음은 알겠다만, 서두르지 마라.”

게오르그는 소파 등받이에 고개를 늘어뜨리며 께느른하게 말했다. 나는 계속 뜸을 들이는 게오르그를 보다가, 맞은편의 소파에 앉아 맥주를 땄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차가운 맥주였다. 나는 게오르그와 비슷한 숨을 내쉬었다.

“너 몸은 좀 어떠냐? 멀쩡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네 성격상 어디가 아파도 꽁꽁 싸매고 있을 게 분명해서 말이지.”

“멀쩡해. 내가 아이시스에게까지 내 몸 상태를 숨길 이유가 어디 있겠냐. 밝히고 치료받았으면 받았지, 이 자식아.”

가시가 돋친 대답이었으나 게오르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말았다.

“많은 일을 겪으니 노파심이 들더군. 집요하게 물어봐도 그러려니 해라.”

게오르그는 다시 맥주를 집어 들고 남은 반의반을 들이켰다.

“많은 전투와 전쟁을 겪었지만, 이렇게 주변에 있는 녀석들이 죽지 않은 전투는 처음이다. 그렇게 잃지 않으니, 잃을까 봐 두려워지더군. 주변 녀석들이 살아있는 게 오로지 네 덕택임을 알고 있기에 더 그런 것 같다.”

게오르그가 연거푸 병을 들자, 사분지 일 정도 남은 맥주가 사라졌다. 게오르그는 텅 빈 맥주병을 바라보며 팅팅 두드렸다.

“꾸물거리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해. 무슨 일이냐?”

“결혼식 날짜가 확정되었다.”

나는 맥주를 들이켜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는데, 웬일로 좋은 소식을 들고 왔네?”

게오르그는 나를 놀래주는 데 성공했다는 듯 낄낄 웃었다.

“누가 들으면 내가 안 좋은 소식만 들고 오는 줄 알겠군.”

“요새 이상하게 바쁘다 싶었는데, 결혼 준비로 그렇게 바빴구나. 서두른 거 아니냐?”

“양가에서 꽤 서두른 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 무슨 일로 불려갈지 모른다고 하니 잠잠할 때 조용히 결혼식이나 올리자고 합의한 거지.”

나는 흥미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 식은 언젠데?”

“이번 달 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것 같겠지만, 고려할 게 그렇게까지 많지 않다 보니 준비 자체는 순조롭다.”

“가구라도 내가 들여줘야 하나. 집은 이미 있을 거 같으니까.”

게오르그는 킬킬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마음만 받겠다. 대신 네가 주례를 봐줬으면 좋겠는데.”

주례? 나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나로 괜찮은 거냐?”

“네가 용사라서 맡아줬으면 하는 게 아니다. 친우로서의 부탁이지. 물론 거절해도 상관없다.”

나는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누구 결혼식인데, 당연히 맡아야지.

“최선을 다해 할게. 그래도 뭐 특별한 건 기대하지 마라?”

“수락해준 것만으로 고맙군. 나중에 다시 연락하도록 하지.”

게오르그는 미소를 띠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본부를 나서는 게오르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새로운 장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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