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8 - 148. 누구를 위하여 검을 들었나 (1)
“두 사람은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를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라는 말에, 신부의 손을 붙들고 있던 게오르그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하객석에서는 산발적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 맞다. 이 사람들은 처음 들어보는 말인가. 나는 야심차게 준비한 주례사를 되새겨보며 속으로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반응은 차치하고, 나는 두 사람의 대답을 듣기 위해 게오르그에게로 우선 고개를 돌렸다.
“네, 맹세합니다.”
게오르그가 대답했고, 맞은편의 신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신부, 카밀라에게로 눈을 돌리며 대답을 기다렸다. 게오르그의 눈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웃고 있는 카밀라는 오늘 누구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뒤로 젖힌 베일이 금발과 함께 살랑거렸다.
“저도 맹세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나는 두 사람이 잠시 그 시선을 즐기도록 내버려 두었다. 오가는 응시 사이에 감정이 피어나고 있었다. 햇살처럼 밝고 행복한 미소. 그를 바라보는 게오르그의 멍한 표정. 하객석은 흐뭇한 표정으로 부부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 기술이 세상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러니까, 영원히 그 모습을 머릿속에 간직하도록, 나는 시간을 두었다. 화가가 열심히 두 사람을 그리고 있을 거다.
“맹세의 키스를.”
내 말에 카밀라가 게오르그에게 뛰어 안겼다. 게오르그는 카밀라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입을 맞추었다. 하객석에서 함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내 앞에서 친구가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하다니. 나는 헛웃음을 짓다가 이내 하객처럼 뿌듯한 미소를 자아냈다. 지금, 세상의 주인공은 두 사람이었다. 나는 요란한 박수 소리에 동참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랑, 신부, 행진!”
손을 꼭 맞잡은 게오르그와 카밀라가 주단 위에 올라섰다. 시선이 다시금 오가고, 두 사람은 천천히, 그러나 힘차게 주단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악단이 행진곡을 연주하고, 사람들이 다시 우렁차게 박수를 쏟아냈다. 여름의 높은 해가 눈부시게 빛을 드리우자, 게오르그와 카밀라의 약지에 낀 반지가 반짝였다. 맹세는 그리 빛나는 것이었다. 나는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들이마셨다. 바람에서는 햇살의 향, 그리고 희미하게 나무를 태우는 향이 났다.
“게오르그, 축하한다, 짜샤!”
“단장님! 축하해요!!”
본디 게오르그의 기사단에 속한 이들이 축하의 말을 목소리 높여 던져주었다. 말을 받은 게오르그는 말이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화답했다. 나는 하객석을 슬쩍 둘러보았다. 다프네의 환한 미소. 마리안느의 따스한 눈빛. 퀘노어 대공의 웃음. 아이시스의 글썽이는 눈. 모두의 시간과 기억 속에 하나의 순간이 각인되고 있었다.
“[누군가의 결혼을 지켜보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성검의 목소리가 문득 들려왔다. 결혼을 지켜본 적이 있었나.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당연히 여럿 지켜봤지. 물론 행복한 결혼만을 지켜본 건 아니었다. 이토록 순수하게 서로가 기뻐하는 결혼은 많이 보진 못했어.]”
하긴, 성검이 평범한 사람의 결혼을 지켜본 적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아마 제 옛 사용자들의 결혼을 지켜봤겠지. 아니면 평범하지 않은 영웅들의 결혼을 보거나.
“[행복을 찾을 수 없어 헤매던 이들이었다. 애초에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도 있었지.]”
성검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수많은 사람을 보냈을 거다. 행복으로 일관된 세월을 살았던 이는 그중 몇 명이나 되었을까.
“[일로이, 영웅도 사람이었다. 그들도 삶의 이유를 찾았고, 행복을 원했지.]”
나는 빙그레 웃으며 성검의 검자루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은 언제나 머리가 아닌 마음에 스미었다. 말은 찌르며 고동하는 심장을 감싸며 나를 위로하는 듯했다.
“[저들처럼 말이야.]”
게오르그와 카밀라가 꽃의 아치를 통과했다. 나는 흐릿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부부가 아치를 통과하자, 사람들은 저마다 웃고 떠들며 부케를 들고 선 카밀라의 뒤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다프네는 눈을 빛내며 부케를 바라보았고, 마리안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프네의 손에 붙들려 사람들과 도열했다.
“빨리 던져요, 언니!”
“조금만 기다려 봐!”
새된 웃음소리. 카밀라는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양손을 모아 부케를 잡았다. 카밀라가 힘껏 부케를 뒤로 던졌고, 사람들의 손과 시선이 부케를 따라 올라갔다. 깃털처럼, 부케는 천천히 떨어지고, 낙하지점의 사람들이 저마다 팔을 쭉 뻗었다. 그러던 부케가, 벼락처럼 날아든 누군가의 손에 팍 붙들렸다. 사람들은 부케를 낚아챈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돌리다가 얼어붙었다.
“꽃다발이 너처럼 참 귀엽구나.”
붉은 눈. 단정하게 틀어 묶은 검은 머리. 신부를 배려한 평소보다 수수하고 정갈한 복장. 아그네스 블랑쉬 뤼미에르는 오른손에 들린 부케를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자, 여왕은 입가에 슬쩍 손을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장난기 가득한 눈빛, 여왕의 여유로운 몸짓은 은근히 그 반응을 즐기는 듯했다.
“잘 받아 가겠다, 카밀라.”
부케를 던진 장본인, 카밀라 또한 놀라 어쩔 줄 모르는 눈치로 여왕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던 게오르그가 허겁지겁 뛰어왔다. 여왕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로 나란히 선 둘을 바라보았다.
“결혼 축하한다, 게오르그 단장, 카밀라. 오랫동안 행복하게…, 오늘 주례의 말처럼, 너희들의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해로하거라.”
“성은이 망극합니다.”
게오르그는 즉시 기사의 예를 취했고, 카밀라 또한 신하의 예를 취했다. 부케를 잡으러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부럽다는 눈길도 보내지 못하고 여왕의 풍모를 바라볼 뿐이었다. 단상에서 내려온 내게로 아그네스가 다가왔다. 꽃을 든 여왕. 검을 든 것만큼이나 어울렸다.
“인상적인 주례사였다, 일로이. 당분간 왕도 결혼식의 유행이 되겠더구나.”
“…감사합니다, 폐하.”
아그네스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무슨 말이라도 바라는 듯한 표정. 나는 가만히 여왕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입에 발린 소리 하기는. 그래도 고맙다.”
아그네스는 부케를 살포시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여왕의 웃음이 곧 또 하나의 꽃이었다.
“[…교활하다, 정말 교활해. 나는 여태 이런 여우를 본 적이 없다, 일로이.]”
머릿속으로 성검의 불만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그래도 여우라니. 너무한데.
“[저 뒤로 살랑이는 꼬리가 보이지 않는 게냐, 일로이! 너는 둔해도 너무 둔하다. 조금 더 경각심을 가지는 게 좋을 거다. 잡아먹히지 않게 말이다.]”
성검의 말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기에, 여왕은 스스럼없이 내게 다가와 슬쩍 팔짱을 끼었다. 성검이 또 화가 나서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그네스의 팔을 부드럽게 당겼다. 아그네스는 움찔, 놀란 듯했으나 얼굴은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자, 우리도 가서 뭐라도 좀 먹자. 궁중 요리사 못지않은 이들이 와서 오늘의 요리를 담당한 것 같더구나. 꽤 맛있는 냄새가 나고 있어.”
아그네스는 나를 끌고 테이블의 끝으로 다가갔다. 눈에 띄지 않도록, 여왕은 하객들의 눈을 살피며 접시에 음식을 조금씩 담았다.
“사실 그냥 평범하게 참석하고 싶었다만, 그랬다가는 왕실의 행사가 되어버리지 않느냐. 호위도 신하도 물리고 오는 게 생각보다 성가신 일이었다.”
치즈와 오이, 방울토마토, 햄이 얹힌 카나페를 한입에 집어넣은 아그네스가 오물오물, 맛을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와중에도 그녀의 식사 예절은 완벽했다.
“그러는 김에 네 상태도 살피고 싶었고.”
“폐하의 은덕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네가 그러다가 잘 못 지내는 날이 오기라도 하면 내 탓으로 생각하마. 내 은덕이 너를 충분히 감싸주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느냐?”
말에 뼈가 있었다. 나는 곤란한 웃음으로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네가 그저 잘 지냈으면 좋겠다. 내 은덕이 아니라도, 그저 네가 너로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아그네스는 샴페인 잔을 들었다. 나는 그녀가 건네는 잔을 받았고, 아그네스는 내 잔에 그녀의 잔을 가볍게 마주치고는 마셨다.
“내가 여태 지켜본 네 모습은, 그걸 실현하기 힘들어 보인다만.”
“…노력해보겠습니다.”
“내 명만으로 모든 게 이뤄졌다면, 네게 행복하게 살라는 명령을 내렸을 거다.”
술에 말이 담겼다. 나는 여왕과 함께 샴페인을 들이켰다. 이것저것, 결혼식의 연회에 마련된 음식을 집어 먹으며 아그네스와 다른 주제로 잡담을 나누었다. 다른 지역의 복구 상황, 한층 성장한 여왕의 검술, 잡담은 서로가 하고픈 말을 비집고 솟아올랐고, 잡담이 비집고 나온 틈으로 감정이 스몄다. 감정은 정의할 수 없는 빛을 띠고 있었다. 연민, 죄책감, 미련. 잡담이 길어지고 틈이 벌어지고 많은 게 섞일수록 감정은 혼탁하게 물들었다.
“지금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을 하게 되는군요.”
“누구나 하는 바람이라면 사치가 아니다.”
나는 게오르그와 카밀라를 바라보며 그리 말했고, 아그네스는 나를 위로했다.
“이대로 일곱 번째 재앙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오지 않는다면 좋겠다고.”
“모두가 그걸 바랄 거다, 일로이. 적어도 지금은 그게 어디 있는지, 어떤 재앙인지 아는 이가 아무도 없으니까 말이다.”
재앙은 갈수록 강해졌다. 일곱 번째 재앙은 어떤 식으로, 언제 닥쳐올지 모른다. 나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성검의 검자루를 붙잡았다.
“저들의 행복을 지켜보는 게, 제 행복인 듯 싶습니다.”
나는 결혼식의 사람들을 바라보았고, 아그네스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나도 하나 말해줘야겠구나.”
그녀답지 않게, 살짝 머뭇거리는 기색이 묻어있는 목소리. 나는 아그네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지어 보이는 미소는, 여태 보였던 것과는 달랐다. 여왕으로서의 미소라기보다는 아그네스 개인의 것에 가까운 미소.
“네 행복을 지켜보는 게, 내 행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아그네스는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내 손을 붙잡고 아그네스는 한참이나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나를 놓으며 살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은 오래 머무를 수가 없구나. 이만 돌아가 보겠다.”
여왕을 수행하러 몰래 따라온 듯한 기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아그네스는 그들의 존재를 진작 눈치채고 있었겠지만.
“조만간 부르마, 일로이. 그때까지 잘 지내고 있거라.”
아그네스는 다시 게오르그와 카밀라를 찾아가 인사하고는 이내 마차에 올라 식장을 떠났다. 나는 연회의 변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채 샴페인을 홀짝거렸다.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나는 눈을 감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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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이구나, 용병.”
마침내 다다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닿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닿을 수가 없었다. 악신 숭배자들의 뿌리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었으니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 우리는 영원하다.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검은 안개. 악신 숭배자의 꼬리를 잡고 올라가 만난 뿌리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안개는 감돌다가 앉아있던 한 사람의 몸을 타고 들어갔다. 그는 몸을 꿈틀거리더니, 기괴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검은 안개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음을 열어 어둠을 마주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