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9 - 149. 누구를 위하여 검을 들었나 (2)
우당탕탕!
“왁.”
나는 쏟아지는 고서들에 머리를 맞고 휘청거렸다. 귀중한 고서가 바닥에 나뒹굴면 안 된다. 나는 초인적인 반사신경을 발휘해 쏟아지는 책들을 모조리 잡아냈다. 뿌연 먼지가 매캐하게 피어올랐고, 나는 연신 재채기를 해대며 콧속을 파고드는 먼지 알갱이를 몰아냈다.
“책을 뭐 이리 빼곡하게 꽂아놨어.”
손, 머리, 얼굴이 먼지투성이다. 나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몸을 털며 책장의 복도를 빠져나왔다. 고서 보관소의 사서가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사서는 나이가 지긋하고 작달막한 노인이었다. 뭉툭한 코에 걸친 안경은 닦지 않은 지 오래된 듯, 희뿌연 자국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사서는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위로 고개를 쑥 빼 올렸다.
“거, 책을 망가뜨리면 곤란하네. 아무리 용사님이라고 해도 말이지. 여기 출입할 수 있는 것도 오직 극소수의 사람뿐인데,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건 용사, 자네와 여왕 폐하 둘뿐이네. 그 정도로 귀하고 중요한 자료들이란 말일세.”
“주의하겠습니다.”
경을 칠 줄 알았는데, 사서의 말은 점잖았다. 나는 겸연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책더미를 들고 책상으로 향했다. 쿵, 하고 책을 올려놓자 다시 먼지가 흩날렸다. 나는 손을 휘휘 내저어 먼지를 떨치고 조심스럽게 책의 표지를 열었다. 카이로스 왕국에서도 과거는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건국기는 신화와 맞닿아있었지만, 그 접점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신화가 끝나고 역사가 시작되는 지점. 나는 그를 파고들기 위해 책을 펼쳤다.
“…좋아.”
그렇게, 야심에 찬 채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책이었지만,
…카이로스 분지의 요새를 도읍으로 하여 건국을 선포했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보는 없었다. 나는 세 번째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의 역사적 자료마저 신화적 정통성을 증명하려는 말뿐이었다. 신화시대 말기 영웅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소상하나, 악신과 재앙에 관한 말은 적고 파편적이었다.
일곱 번째 재앙은 모든 재앙의 시작이자 끝이 될지어다.
그렇기에 근원이라 불린다. 경전에도 나와 있는 말이었다. 성검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그녀답지 않게 무심한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시작이자 끝. 악신의 무당이자 화신이 신화시대의 끝자락에 남긴 말이라고 한다.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무당은 빛의 신이 승리한 세상을 저주하고는 죽었다.
“뭐라 시원하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어디 덧나나.”
나는 불만스럽게 말하며 의자에 몸을 푹 기대었다. 죽어버린 사람들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시대를 경험했을 성검은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게 분명한데, 어째서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책을 들어 사서에게로 가져다주었다. 늙은 사서는 카운터 위에 쌓인 책더미를 보고는 안경을 밀어 올렸다.
“원하던 정보는 찾았나?”
“아뇨. 귀중한 정보가 많긴 하지만, 제가 원하는 정보는 없더군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고, 사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끌끌, 씁쓸하게 웃었다.
“먼지 쌓인 책 사이에서 자네가 원하는 걸 얻을 수는 없을 걸세. 저걸 쓴 사람조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알고 쓴 건 아닐 테니까.”
사서는 주름진 손으로 책을 받아 구석으로 치워두었다.
“역사의 재구성에 유용한 자료들이지. 그렇기에 제한적인 정보고. 자네가 찾으려는 정보는 여기 없을 걸세. 아마 기록의 형태로는 세상에 남아있지 않을 테지.”
나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일곱 번째 재앙으로는 접근할 생각도 하지 말라고, 세상이 접근 제한을 걸어둔 듯한 느낌이었다.
“신기하군, 자네는. 이미 네 개의 재앙을 무찔렀고, 하나 남은 재앙은 기약 없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기미조차 보이지 않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나? 세상을 네 번이나 구한 용사가 무엇을 더 바라는 건가?”
“그런 사사로운 것에 뜻을 두고 있는 건 아닙니다. 단지….”
사람을 구하고 싶다. 이 세상이 더 오래 존재하도록 하고 싶다. 그런 생각. 나는 생각을 말로 바꾸지 않았다. 사서는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악신들에게는 무당이 있었지. 무당은 곧 화신과 다름없는 존재였네. 하지만 빛의 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어. 영웅들은 신의 대변자가 아니라, 인간의 대변자였으니. 그게 곧 신이 바란 게 아닐까 생각하지만 말이야.”
신의 대변자를 자청하는 이는 있었으나, 신화는 끝나버린 후였다.
“어째서 신들이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네. 현 청교회는 신과의 소통이 끊긴 지 아주 오래되었어. 그들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어느새 사서의 말은 넋두리 비슷한 것이 되었다. 몇 가지 걸리는 말이 있었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나아가 알 수 없는 말들이었다. 걸리는 말들을 걸리게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그들을 생각하는 것 말고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미안하네. 자, 여기 더 머무를 건가, 아니면 돌아갈 텐가?”
“…돌아가겠습니다. 아무쪼록 배려에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고서고를 나섰다. 여름이 한창이다. 몸이 달아오른 기사들이 훈련하는 소리는 왕궁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네 기억을 어째서 말해주지 않는 거야?”
“[그 시절, 검이었을 때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로이, 나는 생각보다 아는 게 많지 않아.]”
기어이 말해주지 않으려 한다. 나는 눈살을 좁혔다.
“알고 있으면서 부인하는 거야?”
“[설령 알고 있다고 해도 도움이 되는 사실이 몇 없을 거다.]”
이유를 생각했다. 성검이 내게 일곱 번째 재앙이나, 신화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 이유.
“뜬구름 잡는 소리 하기는. 뭐라도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되겠지.”
“[조급하게 접근한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성검의 말은 옳았다.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건 다만 말들의 걸림이었다. 떠밀리고 떠밀린 말들이 담벼락에 쌓여 새어나가지 못하고 밀어붙이고 있었다. 단순히 ‘원작’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여기서 내가 단념하면, 그렇게 모든 일이 만사형통으로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알아야 할 무언가를 전혀 모른 채 넘어가게 될 것만 같았으니까.
“알겠어. 일단 모은 정보부터 정리해야겠지.”
놓지 않아야 한다. 말의 걸림을, 이따금 떠오르는 생각들을. 흘러가게 두지 않아야 했다. 파편들을 붙잡아 한데 모아야 한다. 놓친 것들을, 어떻게든.
“[일로이.]”
머릿속에 울리는 성검의 목소리가 내 생각을 끊어냈다. 말이 푸르륵 거리며 투레질하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사륜마차가 내 앞에 멈춰있었다. 뜨뜻한 말의 숨결이 바람을 타고 나를 지나쳤다.
“아, 이 씨부럴 것아, 거기 버티고 서 있으면 어떡해!!”
마부가 역정을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주춤, 물러나며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에라이, 미친놈. 죽을 거면 곱게 죽지. 어떤 있는 집 자식이길래….”
그리고, 마부가 얼어붙었다.
“아, 아이고…, 용사님, 그, 그게 아니라….”
“괜찮습니다. 길을 가로막고 있어 죄송합니다.”
나는 발걸음을 옮겨 재빨리 자리에서 벗어났다. 길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의 시선이 반은 내게, 반은 마부에게 나뉘어 꽂혔다. 침묵이 민망해 나는 아예 신형을 감추었다. 내가 떠나간 거리에서는 여전히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산책이라도 좀 하거라. 머리가 꽉 찬 것 같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개 때의 경험으로 미루어 알고 있다. 생각에 밀려 몸을 움직이면 일을 그르치게 되어있다. 순간의 생각이 몸을 지배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조금 멀리 나가자.”
심장의 욱신거림을 억누르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땅이 나를 밀어내고, 나는 땅의 밀어냄을 발로 받아 부드럽게 솟아올랐다. 오늘 하루 정도는 통행증을 제시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다. 나는 하늘에 몸을 내던졌다. 해가 쨍하니 지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해가 뜨고 지는 일은 거대해 보였지만, 나는 그 앞에서 작지 않았다. 땅은 저 아래에 있었다. 나는 하늘과도 멀고, 땅과도 멀었다.
“[어떠냐?]”
막연한 물음이었지만 대답할 수 있었다.
“자유로워.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거 같은. 특권이네.”
“[말 그대로 어디든 갈 수 있지 않느냐.]”
나는 하늘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가고 싶은 곳이 생각났다. 나는 몸을 선회해 걷기 시작했다. 허공을 딛고 선다는 건 아직 적응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성벽 밖. 남동쪽의 내륙 깊숙한 방향으로 향했다.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었지만 찾아갈 수 있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기억과 과거를 더듬어 발걸음을 옮겼다.
“[…너는 가도 이상한 곳으로 향하는구나.]”
“저기로 가야 할 것 같았어. 한 번은 가봐야 했는데 말이지.”
나는 엷게 웃었다. 걸어가는 쪽은 초원이다. 듬성듬성 관목이 피어난 와중에 길게 자라난 풀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나는 땅으로 천천히 내려섰다. 풀은 내 움직임에 따라 몸을 반대로 누웠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한때 길이었던 것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오랜만이네.”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입에서 새어나왔다. 존재하지 않을 터인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이건 내가 빙의하기 전의 일로이가 지닌 기억일 것이다. 혹은 내가 단순히 그렇다고 느낄 뿐일 수도 있고. 돌길은 드문드문 이어졌다. 이어진 길의 끝에 허물어진 돌무더기가 보였다. 풀과 돌의 풍경 끝에 도사리는 거대한 폐허는 초현실적이기까지 했다.
“저기 머무르던 세월을 기억해?”
“[기억하다마다.]”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성검은 저곳에서 줄곧 누군가를 – 그녀를 선택할 누군가를 찾았다. 성검은 그 세월을 추억하듯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을 들려주었다.
“외롭지는 않았어?”
바보 같은 질문. 나도 알고 있었다. 성검은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뻘쭘하게 너털웃음을 지으며 성검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성검의 웃음은 가벼운 바람에 섞였다.
“[심심하지는 않았다. 자려면 잘 수도 있었고, 나를 뽑아보겠답시고 오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으니까. 왜, 나를 동정이라도 하는 게냐?]”
“그럴지도 모르지. 누구나 조금의 동정은 필요해.”
“[재미있구나. 고작 검에게 동정하다니. 너 자신을 동정하는 법도 배워봐라.]”
고작 검이 아니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에 차올라 혀끝에 매달렸다. 나는 말을 다시 삼켜내고는 유적 가까이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이구나.”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 일로이가 용사라는 것이 결정된 장소. 나는 어째서인지 집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신전과 같은 경건함이 있다. 아마 과거에는 정말로 신전이었을 거다. 나는 발치의 돌무더기를 흘긋 바라보고는 중앙의 반석으로 다가갔다.
“[저기 홈이 보이느냐,]”
“응. 여기 있었던 거야?”
반석의 중앙에는 길고 가느다란 홈이 파여 있었다. 홈에는 빗물이 고여 있었다.
“다시 이곳에 너를 돌려놔야 할 일이 생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만. 나를 내려놓고 싶은 마음인 게냐?]”
나는 웃었다. 굳이 대답이 필요한 물음이 아니었다. 그리운 기분. 나는 반석을 계속 바라보았다. 비 오는 어느 날. 저 바위에 앉아 성검을 끌어안고 있던 일로이가 보였다. 일로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일로이와 눈을 마주쳤다. 일로이의 눈에는 먹구름과 숲이 보였다. 나는 가만히, 그 눈을 들여다 보았다.
텅텅 빈. 거울과 같은 껍데기만이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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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에 돌아오니 밤이었다. 나는 문가에서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고는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아직 다프네나 마리안느가 돌아올 시간은 아닐 텐데.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나는 문을 벌컥 열고 본부에 들어섰다. 먼저 느껴지는 건 냄새였다. 흙탕물의 찝찝한 냄새, 젖은 천과 쇠의 냄새. 그리고, 선명하게 코끝에 와닿는 피비린내. 금방 시각을 되찾은 눈은 본부 로비의 바닥에 널브러진 인물을 포착했다.
“용…사님.”
본 적 있는 얼굴이다. 저 검은 사제복은 이단심문관의 복장이다. 끊어질 것 같은 숨소리와 가냘픈 목소리. 나는 빠르게 다가가 이단심문관을 들어 올렸다. 로브의 후드가 흘러내리며 얼굴이 드러났다. 머리를 뒤로 한데 묶은, 십대 후반 정도 되는 여성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나는 마나를 슬쩍 끌어올리며 지혈했다. 환부를 확인하기 위해 로브와 사제복을 찢었다. 베인 상처가 보인다. 상처가 깊다.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마력을 조금씩 건네주며 회복을 도와주었다. 더듬거리며, 조금씩 그 입이 열렸다.
“용병이…. 주교께서….”
다음으로 흘러나오는 이단심문관의 말에,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