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0 - 150. 누구를 위하여 검을 들었나 (3)
나는 흐릿한 눈으로 이단심문관의 상처를 바라보았다. 본부에 있던 약이란 약은 다 털어와 부었다. 간신히 출혈은 멎었고, 포션으로 원기도 조금은 회복했다. 나는 상처에 댄 천을 새것으로 갈아주었다. 피 냄새. 환자들이 본부에서 퇴원한 후 이제 좀 지워지나 했는데 다시 진한 것이 본부에 감돌기 시작했다.
“[다행히 상태는 좀 나아진 것 같구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단심문관은 잠에 빠져 있었다. 몸에 난 자상 외에도 자잘한 상처가 몸 이곳저곳에 낙서처럼 새겨져 있었다. 피로감이 가득한 얼굴. 팔다리에는 힘이 없었고 사제복은 피와 땀, 흙먼지로 더러웠다. 검에 찢어진 사제복의 가슴 부위가 들려 있었다. 나는 그 자락을 매만졌다.
“[용병이 이 아이를 베어버렸다고 했었던가.]”
용병, 아르옌 엘미온이 이단심문관들을 베어버렸다. 용병은 안드레 주교를 포함한 남은 이단심문관들과 교전을 시작했고, 그녀는 주교의 명에 따라 전장을 이탈해 내게 이 사실을 알리려 왔다. 여기까지 말한 이단심문관은 의식을 잃었다.
“그 녀석이 도대체 왜….”
어째서, 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휘감아 돌았다. 내가 아는 아르옌은 싸이코 냉혈한이지만 결코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베고 달아날 놈은 아니었다. 저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그를 관철하는, 고지식한 인간이 갑자기 그런 짓을 벌인다고.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내가 그놈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있기는 한가.
“[지금은 이 아이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구나. 섣부르게 판단하진 말거라.]”
“…알았어. 그래도 왕궁에 연락은 넣어봐야 할 것 같아.”
살을 들어낸 검격. 혹은 그 여파. 나는 머릿속으로 아르옌이 주교를 베는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그의 곁에 있던 이단심문관들은 아르옌의 힘과 기술을 당해내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다. 주교는 아르옌과 백중세를 이루다가 조금씩 베인다. 아르옌의 검이 살을 훑고 지나가고, 피와 살이 흩뿌려진다. 서늘한, 피 흘리는 검처럼 번득이는 그 눈. 나는 아르옌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없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고.
“일로이, 들어갈게요.”
작게 속삭이는 다프네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한 눈이 이단심문관을 바라보았다. 다프네는 수건과 물그릇, 약물을 올려놓은 쟁반을 내려놓고 상처를 살폈다.
“약을 좋은 걸 써서 그런가, 덧나지는 않을 거 같네요. 안정을 취하면 곧 깨어날 거예요.”
나는 이단심문관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느는?”
“급하게 성국으로 돌아가 보기로 했어요. 주교와 이단심문관들이 행방불명 상태라, 성국의 보안 체계에 큰 문제가 생겼을 테니.”
행방불명. 좋지 않은 말이었다. 모른다는 말은 손발을 묶는다. 아르옌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안드레 주교는 지금 죽었을까, 아니면 살아 도망쳤을까. 남은 이단심문관들은 전부 아르옌에게 죽었을까, 아니면 각자 알아서 살아남았을까.
“악신 숭배자들이 아직 그렇게 남아있었나요.”
“악신 숭배자들 때문인지는 모르는 일이야.”
악신 숭배자들이 무슨 수작을 부렸든, 아니면 아르옌이 스스로 이단심문관들을 배신하고 그렇게 되었든. 나는 입술을 깨물며 이단심문관을 바라보았다. 호흡이 조금씩 불규칙적으로 바뀌는 것을 보아 곧 깨어날 모양새다.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떠졌다. 이단심문관은 깊게 숨을 몇 번 내쉬더니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제가 어디까지 말씀드렸었죠.”
몇 시간 동안 정신을 잃은 사람치고는 멀쩡한 목소리였다. 흐릿한 회색 눈동자가 나와 다프네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내게 고정되었다.
“적과의 교전을 마치고 돌아온 용병이 갑자기 당신들을 베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안드레 주교의 명을 받고 그 자리를 빠져나와 여기까지 당도했다고 했고요.”
“…네. 맞습니다. 용병.”
이단심문관은 제 상처가 있는 곳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녀는 상처로 하여 기억을 더듬으려는 듯했다. 아직 통증이 극심할 텐데, 그녀는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았다.
“악신 숭배자를 추적하는 중이었나요?”
“예. 추격대는 마침내 놈들의 핵심에 다다랐습니다. 혜성 이전, 마탑 습격 사건 때에 놈들이 많은 걸 노출해버렸죠.”
내 질문을 기점으로, 이단심문관은 하나씩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입구를 지키고 있으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주교님과 용병, 둘이 선두로 돌입하고….”
이단심문관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그리고, 그 방에서 나온 건…, 어딘가 평소와 달라 보이는 용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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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가 지독하군.”
안드레 주교는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중얼거렸다.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아르옌은 숨을 깊이 쉬지 않았다. 강렬한 자극은 다른 감각을 둔하게 만든다.
“익숙해질 때도 된 것 같지 않습니까, 아르옌?”
“이곳은 유달리 독한 것 같군. 머리가 띵할 정도야.”
아르옌은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시체의 냄새, 혹은 썩어 방치된 환부의 냄새. 종말 숭배가 있는 곳이라면 늘상 나는 냄새였다. 그들의 냄새는 다른 냄새와 섞이지 않았다. 색으로 따지자면 검은색. 그 어떤 냄새라도 이 공기 속에 들어오면 동화되는 것이었다.
“뒤쪽은?”
주교가 뒤로 돌아보며 물었다. 악신 숭배자들을 처리한 이단심문관들이 하나둘씩 합류하고 있었다. 가장 마지막에 합류한 이가 보고를 올렸다.
“다 정리했습니다.”
“손실은?”
“전사 하나. 부상 둘. 그 외 이상 없습니다.”
이단심문관들은 그리도 쉽게 그들의 죽음을 입에 담았다. 안드레 주교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커먼 굴을 바라보았다. 이단심문관들의 성법기가 흐려질 정도로 강렬한 사기(邪氣)가 벌레처럼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오래도 걸렸군.”
“오래 걸린 건 아닙니다. 수백 년간 대륙 곳곳에 뿌리 깊이 박혀있던 놈들을 겨우 1년 만에 이렇게 몰아붙인 것이니. 이상할 정도로 빠르다고 봐야겠죠.”
안드레 주교는 암기를 꺼내 들었다. 횃불과 성법기 사이로 단검의 칼날이 번득였다.
“이제 돌입한다. 나와 아르옌이 선두. 반은 입구를 지키고, 나머지 반은 따라와라. 퇴로를 확보하거나, 아예 차단할 준비를 해라.”
아르옌은 검을 들었다. 끝이 보인다고 한다. 아직 얻은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아르옌은 제 검에 묻은 핏자국을 바라보며 눈가를 좁혔다. 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디를 가도 아르옌이 찾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답답함은 쌓여갔다. 용사가 보여주었던 구원의 가능성들이 아르옌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가시죠. 이번에는 우리 둘 다 전력을 다해야 할 겁니다.”
어둠을.
받아들여라.
아르옌은 검을 들었다. 첫 참격이 향한 곳은, 아직 살아있는 숭배자들이었다. 일격에 넷이 베였다. 숭배자들은 목이 베이면서 웃었다. 남은 숭배자들은 단 네 번의 공격만에 모두 죽었다. 그리고 그들 끝에 기다리고 있던 건, 꿈틀거리는, 무형의 검은 기운이었다.
안드레 주교는 검은 안개가 아르옌에게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불길했다. 아르옌은 눈을 까뒤집고 서서 경련했다. 주교와 아르옌을 따라 들어온 이단심문관들이 저마다 성법기를 끌어올리며 경계했다.
“-물러서!!”
주교의 입에서 외침이 터져 나온 것과, 아르옌이 뒤를 돌아본 건 동시였다. 시선은 칼날이 되었다. 바닥에 상흔이 그어지며 검풍이 날아들었다. 제때 피하지 못한 이단심문관들의 몸이 베어졌다. 복도를 훑고 지나간 바람을 따라 핏방울이 흩날렸다.
“큭-!”
암기가 부러졌다. 주교는 경악하며 품속에 손을 넣어 다른 암기를 찾았다. 아르옌은 입구에 버티고 서서 고개를 빼딱하게 기울인 채 방으로 달려오는 이단심문관들을 바라보았다.
“들어오지 마!”
이단심문관들이 발을 멈추었다. 아르옌은 발을 떼었다. 아르옌의 검이 이단심문관 하나를 가르자마자 안드레 주교가 신형을 날렸다. 금빛 성법기가 주교의 경로에 잔상을 남겼다. 아르옌의 검로 위로 주교의 암기가 끼어들었다.
“-!”
검이 무거웠다. 주교의 몸이 바닥으로 쏠렸다. 주교는 여기서 힘에 밀려 아르옌을 놓치면 사달이 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단심문관들이 주저하지 않고 저마다 죽일 기세로 아르옌을 향해 뛰어들었다. 살기를 느낀 아르옌이 눈을 빛내며 몸을 일으켰다.
“살아남아….”
가늘게 벌어진 아르옌의 입에서 그런 말이 새어 나왔다. 허공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졌다. 공간이 삐거덕거리며 절단되었다. 갈라지는 공간 사이에 낀 이단심문관들의 팔다리가 잘렸다.
“죽인다.”
멈추지 않았다. 이단심문관들의 칼날은 그대로 아르옌에게로 쇄도했고, 아르옌은 몸을 돌리며 그들의 칼끝을 모조리 쳐내고, 흘리고, 막아냈다. 아르옌에게 방어는 곧 공격이었다. 이단심문관들의 피가 허공으로 튀었다. 공격에 여과가 없었다. 그를 깨달은 안드레 주교는 전력을 해방하기로 결심했다.
쾅-!!
성볍기가 폭발하며 일시적으로 아르옌을 날려버렸다. 멀쩡한 이가 없었다. 주교는 바닥에 넘어진 이단심문관 하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어깨를 붙들었다. 그녀도 멀쩡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이실라, 카이로스 왕국의 왕도로 가라. 용사님께 이 상황을 전해.”
“예, 알겠습니다.”
판단은 빠르고, 명령은 거부되지 않는다. 안드레 주교는 발걸음을 옮기는 이실라를 바라보고는 아르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커먼 아르옌의 눈은 안드레 주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르옌의 입꼬리가 부들거리며, 희미하게 호선을 그렸다.
“빌어먹을, 아르옌 씨.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주교, 아무런 소용이 없었어. 없었다고.”
“소용은 대체 뭐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말입니까. 정신 차리세요.”
“길을 찾을 수가 없었어. 아니, 그냥 길 끝이 막다른 길이었어.”
아르옌이 신형을 날렸다. 주교는 성법기가 깃든 암기를 날려 아르옌의 움직임을 저지하려 했지만, 속도는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새로운 암기를 꺼냈다. 아르옌의 검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검붉다. 안드레 주교는 성법기를 더욱 끌어냈다. 목숨을 걸고 전력을 다하라고, 본능이 그리 외쳤다.
쾅-!!
빛의 폭발이 일어나며 안드레 주교가 뒤로 튕겨 나갔다.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사람들을 가렸다. 연기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찰나의 순간, 검격과 목숨은 수십 번 교환되었다. 아르옌의 검에는 눈이 없었다. 주교는 문을 걷어차 닫았다. 어둠에 휩싸인 방에서 아르예느이 오러와 주교의 성법기가 불을 밝혔다.
“…아르옌, 내 말이 들리는 겁니까.”
“들리지. 들리다마다. 주교, 하지만 내가 네 말을 들을 수 있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다. 내 검이 바꿀 수 있는 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네 말이 나를 바꿀 수는 없단 말이다.”
아르옌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래에서부터 비치는 붉은 오러의 불빛이 아르옌의 얼굴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빙의도 당신 같은 사람이 당하면 이토록 골치 아픈 일이었군요. 엑소시즘을 할 수도 없고. 악신숭배자들의 우두머리가 그런 모습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했어야 했는데.”
히죽, 아르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안드레 주교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추적도 여기가 마지막이야, 주교.”
“혹시 모르죠.”
주교는 들고 있던 암기를 버리고 다시 품에 손을 넣었다. 일순 달라진 공기에, 아르옌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전력을 보여주는 것도 오랜만이군요.”
두 자루의 단검이 주교의 손에 쥐어졌다.
“죽어도 원망하지는 마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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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는 이야기를 전부 전해 듣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는 아그네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생각의 변화에 따라 그녀의 분위기는 미세하게 바뀌고 있었다. 나는 여왕을 채근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녀와 다름없이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테니까.
“용사 일로이.”
긴 침묵 끝에, 아그네스가 눈을 떴다. 나는 그녀의 눈에 담긴 어떤 결심을 알아보았다.
“예, 폐하.”
“용병, 아르옌 엘미온을 생포하라. 상황이 돕지 않는다면, 죽여라. 혹여 죽이더라도, 그대는 내 명령으로 살인한 것임을 알아두어라.”
나는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