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54화 (155/158)

Chapter 154 - 154. 현상 수배 (4)

닫힌 문이 다시 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곳에서 얼굴을 까발려 괜한 소문을 퍼뜨릴 바에야 다소 과격하더라도, 그냥 입을 다물게 하는 편이 나았다. 나는 여관 로비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진 이들도 있었다.

“으… 으어.”

문을 가로막고 있던 거한이 잠긴 문을 더듬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내가 한 발 앞으로 다가가자, 마음이 다급해진 거한이 주먹을 날려 문을 부숴버렸다. 그리고는 달아나려는 듯 발버둥을 치다가, 이내 그 자리에서 팔을 잘못 짚어 머리를 바닥에 찍어버렸다. 내 뒤에서 여관 주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 값은 그쪽이 물어내세요.”

거한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여관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관에 들어오려던 모험가들이 부서진 문과 밖으로 나서는 나를 바라보며 벙찐 채로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은근히 즐기는 것 아니더냐.]”

“…용사 때려치고 모험가 하면 재미있긴 하겠네.”

내가 지나가자, 여관으로 들어가려던 모험가들의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나는 행여 내게 관심이 다시 쏠릴세라 재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성국을 제외한 타국과 인접한 국경 지대는 험악한 곳이었다. 중심지에서 멀어지는 나는 남 일처럼 그리 생각했다. 해안이 인접한 서남쪽은 그렇게까지 험난하거나 살기등등하지 않았고, 북방은 험악하다기보다는 그들의 의무와 규율, 자긍심이 엄숙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재수 좋은 줄 알아라, 네놈.”

“지랄하네. 배때지를 아직 덜 맞았나. 눈 병신 새끼가.”

여기는 모든 거리가 뒷골목과 진배없었다. 열 걸음을 걸으면 한 번은 싸우고 있고, 또 열 걸음을 걸으면 돈 떼먹고 달아나는 포주와 쫓아가는 사냥꾼들 사이의 추격전이 벌어졌다. 창문이 깨지지 않은 건물이 드문 가운데, 교회 건물은 멀쩡했다.

“기묘한 광경이네.”

“[누구에게나 구원은 필요하다는 뜻이겠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건물은 어느 순간 끊기지 않고 산발적으로 이어지다가 차츰 사라졌다. 길 중간에는 버려진 폐건물 같은 것도 많이 보였다. 도망자들과 추적자들이 유용하게 사용할 만한 은신처 같았다. 뒤져봐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이내 관뒀다. 아르옌이 저런 곳에 몸을 숨기고 추격자들을 따돌리는 모습을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통제 중입니다.”

한동안 멍하니 걷던 와중, 위병이 나를 막아섰다. 국경으로 가는 통행로였다. 나를 제외하면 일대에서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흘긋거리며 어슬렁거리는 잡배들이 보였다. 위병들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험악하게 노려보면, 얼쩡거리던 이들은 행여 눈을 마주칠세라 발걸음을 돌려 걸어갔다.

“이쪽은 처음이십니까?”

위병이 나를 붙들고 물었다. 나는 곧장 여왕이 내준 통행증을 보여주었다. 위병은 내가 대뜸 내미는 카드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다가, 그에 찍힌 인장을 확인하고는 물러났다. 과잉 반응하지 않는 게 교육을 단단히 받은 병사인 듯했다. 위병은 함께 근무를 서던 이에게 달려가 귀엣말하고는 그와 함께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실례했습니다. 곧장 들여보내겠습니다.”

“구간 통제는 그 현상 수배범 때문인가요?”

위병은 골머리를 앓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아르옌이 어지간히도 속을 썩이는 모양이었다. 위병의 창 너머로 기사 하나가 병사들을 데리고 수색 활동을 벌이는 중이었다.

“최근 몇몇 모험가들이 이 통행로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습니다. 무참하게 살해당했죠. 제대로 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위병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였다.

“그 현상 수배범의 짓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목격자도 없고, 남은 증거도 없으니까요. 다만, 그들이 제법 이름 날리던 실력자라는 걸 감안하면, 달리 그런 짓을 저지를 사람도 없습니다.”

위병은 제 뒤편의 길을 향해 슬쩍 턱짓했다. 설렁설렁 땅을 바라보며 걷고 있는 수색자들은 진정한 의미로 단서를 찾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받은 명령을 수행하는 척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뭐, 그들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공께서는 그 현상 수배범을 잡으러 오신 겁니까?”

위병은 막연하게 나를 높은 직위의 누군가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위병에게 정보를 다 알려줘서 좋을 게 없었기에, 나는 위병의 질문을 무시하고는 통행증을 돌려받았다.

“이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아, 예. 실례했습니다. 이제 들어가도 좋습니다.”

위병이 창을 거두었다. 나는 기감을 확장하며 길에 발을 들였다. 대충 수색하던 기사와 병사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재빨리 지나치고, 인기척이 아예 느껴지지 않는 국경의 깊숙한 곳으로 진입했다. 아예 느껴지지 않는 인기척.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

“아르옌은 진작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 같아.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어.”

“[돌아가겠느냐? 아니면 국경을 넘어가겠느냐.]”

“…아냐. 빠르게 훑어보자. 그 녀석이 내 기감을 속이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럴 수 있으면 더 비상이야. 서둘러 녀석을 찾아봐야 해.”

타국으로 이미 넘어갔다면, 그건 내 관할을 벗어난 문제가 되어버린다. 나는 막막한 심정으로 길게 펼쳐진 길을 바라보았다. 아르옌은 무엇을 원하는 걸까? 그러고 보면, 나는 이 녀석이 무엇을 원해서 안드레 주교와 함께 떠난 건지, 혜성이 떨어지고 있을 때 어째서 홀연히 바크틴스로 향했던 것인지.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런 것마저 네 책임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일로이. 네 짐을 무겁게 하지 말거라.]”

“짐이 아니야. 그냥 주변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고 생각할 뿐이지.”

빙의자로서 내게 죄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 주인공의 자리를 빼앗고 정작 그 주인공은 방치한 죄목이 있을지도. 그때 대화를 할 수 있었다면 더 시도했어야 한 걸지도 모르겠다.

“일단 현상금 사냥꾼들이 죽은 현장에 들렀다가, 국경 바로 인근까지는 가봐야 할 것 같아.”

생각을 정리하며 말을 걸 대상이 있다는 건 이럴 때는 정말 다행이었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는 아르옌을 추격할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았다.

지형은 갈수록 복잡해졌다. 국경 지역은 대략 폭 1킬로미터 정도의 땅으로 나뉜다. 이곳은 누구의 땅도 아니다. 도망자들과 추격자들, 그리고 마물이 한데 엉켜 사는 적나라한 야생. 하지만 지금은 이 땅에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물마저 녀석이 싹 죽여버리고 사라진 것 같구나.]”

“아니면 다른 지역으로 모조리 가버렸거나.”

기감을 더, 더 넓혔다. 코끝을 아주 미세하게 자극하는 비릿한 냄새가 있었다. 나는 냄새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뭔가, 사냥개가 된 기분이었다. 여태 냄새를 따라 무언가를 추적한 적은 없었는데.

“그 어둠.”

문득, 성검이 스치듯 내 머릿속에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왜 그러느냐?]”

“악신의 잔재라고 했었지.”

“[악신은 봉인되었지만, 그 흔적마저 이 세상에서 사라진 건 아니다. 그러니 그 흔적을 아득바득 찾아내 신의 증거로서 섬기는 이들이 생기는 것이지.]”

“…그 잔재라는 녀석은 마치 아르옌을 잘 알고 있다는 것 같은 말투였어.”

그 비틀린 자는 머지않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성검은 내 말을 듣고는 한동안 침묵했다. 나는 계속 잔향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을 지배하는 초월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는 말도 결국 다 허세에 불과한 말들이야. 옛 신들이 그랬고, 별자리가 된 영웅들이 그렇다.]”

성검은 술회하듯 말했다.

“[신들이 예언을 이루는 방식은 아주 교묘하다. 충분한 힘이 있다면 사건을 조작하는 것 또한 가능하지. 미래에 그리 되리라고, 아무런 정보도 없이 던진 말이 이뤄진다면 결국 예언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신들은 예언을 그리 이뤄가며 사람들을 움직여 신앙심을 모았지. 그건 악신이든, 선한 신이든, 같았다.]”

“무서운 말이네.”

“[불멸은 없다, 일로이. 존재하는 이상 그 끝도 있는 법이다.]”

나는 눈살을 확 찌푸렸다.

“그건 꼭 악신 숭배자들이 할 법한 말이잖아.”

“[악신은 그 말이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이용하지. 끝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

“그 끝을 두려워해서 펼쳐진 지금을 외면하는 게 그들인가.”

“[모두가 알고 있지. 하지만, 지금을 살아갈 힘조차 없는 이들이라면 어떻게 되겠느냐.]”

“…설득되겠지. 너무나도 간단히, 그리고 당연히.”

아르옌이 그렇게 설득된 걸까? 누구보다 치열하게 지금을 살아가던 그가? 어쩌면 나만큼이나 종말을 경계하고 있을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설득되었다는 말을,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르옌은 죽었으면 죽었지, 다른 누군가의 말을 들을 녀석이 아니었다.

“[일단 현장을 조사해보는 게 좋겠구나.]”

혈흔이 흩어져있다. 흩어진 정도가 아니라 아주 지독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열 명이 전부 이 자리에서 죽었을 거다.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알 수 있었다. 뾰족하게 솟은 바위 위의 혈흔. 검로가 지나간 자리는 깨끗했다. 그리고서는 그 흔적을 숨길 생각조차 없었는지, 혈흔은 한 방향으로 점선을 그리며 이어졌다.

“꼭 따라오라고 만들어놓은 것 같은데.”

나는 무릎을 꿇고 핏방울이 만든 길을 가늠해보았다. 길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헤매지도 않고 목적성을 띠고 있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나는 혈흔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마 수색자들이 따라올 테면 와보라는 듯 남긴 혈흔을 따라가지는 않았을 거다. 행여 아르옌이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이 될 테니까.

“마치…내게 남긴 것 같네.”

혈흔의 끝에는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아르옌 본인이 앉아있을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자꾸 심장을 압박했다. 무언가, 함정이 입을 벌리고서 나를 기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혈흔이 이어진 곳은 한 관목이었다. 가시덤불이 돋은 나무는 말라비틀어져, 언젠가 한 번 불에 탄 적이 있는 것처럼 생겼다. 나는 그 관목 앞에 떡하니 돌로 고정된 종이 한 장을 볼 수 있었다. 종이는 사막에 나타난 북극곰처럼, 있어서는 안 될 장소에 떡하니 있는 것 같았다.

“….”

나는 아주 천천히 몸을 굽혀, 종이를 집어 들었다. 글씨는 반대편에 적혀 있었다. 종이에 묻은 흙을 털어내자, 적힌 글이 드러났다. 글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고, 당황스러웠다.

나를 추방한 용사에게.

떠올렸다. 전부. 네가 내게서 무엇을 앗아갔는지도, 내가 원래 무엇이었는지도. 이제 내가 잃은 것을 찾아올 차례다.

아르옌 엘미온.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