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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그의 몸에 그녀가 닿는 순간 (3/101)


제3화 그의 몸에 그녀가 닿는 순간
2022.07.11.


지성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화가 풀리지 않아 씩씩댔다. 예전에 소명은 이러지 않았었는데 자꾸만 변해가는 것 같았다.

대학 시절 그녀는 남자 동기들과 선배들의 우상이었다. 미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똑똑해서 소명을 짝사랑하는 남학생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런 그녀와 c.c가 된 그를 모두 부러워했다. 그는 소명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만으로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 들었다. 그랬던 그녀였는데.

지성은 정확히 그녀가 싫어진 건 아니었다. 갑자기 그의 앞에 라희라는 상큼하고 풋풋한 여자가 나타나 예전에 소명에게 모든 걸 걸었듯 지금 라희에게 모든 걸 걸고 싶어졌을 뿐이었다.

업무가 거의 끝나갈 무렵 라희에게 메시지가 왔다.


[오빠, 오늘 우리 집에 올래?]

그녀의 메시지를 본 지성의 심장이 요란하게 요동쳤다. 그는 오랜만에 다시 느껴보는 설렘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침에 일찍 들어오겠다고 소명과 한 약속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시계를 보며 퇴근 시간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에서 같이 움직이면 소문이 날 수도 있으니 둘은 항상 다른 곳에서 만나곤 했다.

하지만 어젯밤 둘의 마음을 더욱더 진하게 확인하고 나서부터 둘의 가슴에 더 심한 불이 붙어 버렸다.

웬만하면 안 만나는 회사 비상구 계단에서라도 그녀가 보고 싶다니. 그녀에게 단단히 빠져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오늘 자신의 집으로 그를 부른 것이다. 지성은 기분이 좋아 하늘을 날아다닐 것만 같았다. 그는 근처 꽃집에서 꽃을 사고 백화점에 들러 최고급 와인도 한 병 샀다.

그리고 그녀가 알려 준 그녀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그의 입에서는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알려준 집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렸고 슬립 차림의 라희가 뛰어나와 그에게 와락 안겼다.

너무나 색다른 마중에 지성은 매우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몸에 그녀가 닿는 순간, 그는 이미 이성을 잃어버렸다.

지성은 바닥에 던지다시피 가방과 와인 그리고 꽃다발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돌진했다.

두 사람은 몇 년을 못 만난 연인의 재회처럼 간절한 눈빛으로 서로 바라보았다.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붓는 지성에게서 간신히 빠져나온 라희는 그를 야릇하게 바라보았다.


“오빠, 사랑해.”

그녀의 말에 지성은 그녀를 와락 껴안고 그녀의 귀에 대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사랑해. 내가 더 사랑해. 너무너무 사랑해.”

“하지 마. 오빠, 간지러워.”

라희는 애교가 철철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눈빛에 지성의 심장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이 여자라면 그의 모든 걸 걸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지성은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의 입맞춤이 달콤하다는 듯 라희는 지성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뜨겁고 강렬한 포옹은 계속되었다.


 

******

소명은 자꾸만 시무룩해지고 무기력해지는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럴 때일수록 움직여야 돼.’

소명은 답답한 속을 달래기 위해 청소를 시작했다. 물론 너무 서운하고 얄미워서 지성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십 년을 함께 산 세월의 내공은 무시하기 어려운 법, 그와 싸워도 오래가지 않는 이유는 서로에게 섭섭한 감정을 마음에 오래 담아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둘은 화가 나면 서로 이야기해서 풀었고 그 이후에는 다시 그 일을 꺼내어 되새김질하지 않기로 약속했었다.


‘그래, 오늘은 약속 지켜 줄 거야. 나만 원하는 일이 아니라 지성이도 바라고 있으니까.’

청소를 마치니 소명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소명은 거실에 걸려 있는 디지털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가고 있었다. 소명은 갑자기 슬퍼졌다.


‘오늘도 약속을 안 지키네.’

그녀는 침대로 들어가 오지 않는 잠을 자기 위해 노력했다. 얼마쯤 잤을까 소명은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 자신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 핸드폰 시간을 확인해 보는데 새벽 3시였다.

지성은 취한 듯 약간 비틀거리다가 옷을 대충 벗어서 거실 바닥에 던져 놓고 방으로 들어와 바로 침대로 올라 잠이 들었다.

소명은 화가 나서 잠든 그를 깨우려고 하다가 코까지 드르렁드르렁 고는 모습을 보고 내일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녀는 가슴이 답답해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햇살이 그녀의 창을 비출 때 소명은 천천히 눈을 떴다.

소명은 본능에 따라 옆자리를 확인했지만, 지성은 이미 옆에 있지 않았다. 분명히 지성과 함께 사는데 그녀는 혼자 사는 것만 같은 외로움을 느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그녀만 그의 옆에 있으면 뭐든지 다 할 것만 같았던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그녀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은 정도로 자신만 바라보던 사람이었는데.

소명은 가슴이 너무나 답답해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곤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차에 올라탔다.

그를 그만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온종일 소명은 지성을 생각하며 아파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이제 그만 생각하자.’

소명은 시동을 걸고 차를 몰고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차를 몰고 운전을 하니 그나마 기분이 조금은 나아짐을 느꼈다.

너무 답답해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어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뭐든지 사사건건 얘기하는 수다스러운 딸이지만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면 너무나 마음 아파할 게 뻔했기 때문에 절대 이야기하지 않아야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했다.

어디를 갈까 생각하다가 저번에 사지 못한 물건이 생각났다.

그녀는 가속 페달에 힘을 싣고 속도를 올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린 후에 멀리 목표지가 보였다. 커다란 간판으로 ‘파릇파릇 농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바로 화초가 가득한 이곳이었다.

소명은 얼른 차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농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단골집을 향해 걸어가는데 그녀의 단골집 앞에 키가 큰 남자가 슈트를 입고 서 있었다.

평일 오전에 보지 못한 낯선 광경이어서 소명은 자신도 모르게 그곳을 유심히 쳐다보며 걸어갔다. 그런데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더라? 연예인인가? 아닌데…… 어디서 봤는데. 아!’

소명은 지성의 회사에서 본 그 엄청나게 잘생긴 남자가 떠올랐다.


‘직급이 꽤 높아 보이던데. 인사는 해야겠지.’

소명은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도하는 간신히 시간을 내어 모처럼 농원에 와서 열심히 화초를 고르고 있는데 멀리서 낯익은 여자가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걸 보고 말았다.

도하는 너무나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는데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도하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인사에 놀라 잠시 멍해졌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저 그때는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려서요.”

“네?”

“저 건설 부문 설계팀 안 지성 팀장 부인되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그때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오늘 가까이에서 그녀의 얼굴을 본 도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하얀 피부에 잡티 하나 없는 맑은 피부를 가졌고, 크고 예쁜 눈에 조화를 이루는 오뚝한 코를 가지고 있는 꽤 미인형의 얼굴이었다.

그가 생각한 이미지와 너무도 다른 모습에 도하는 잠시 놀랐지만, 곧 다시 차분해졌다.


“아…… 네. 건설부문 대표이사 차 도하입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로소 그녀의 정체가 밝혀졌다. 다행히 스토커는 아니었다.

소명은 상냥하게 웃으며 도하를 바라보았다.


‘와, 대표이사야? 거기까진 생각 못 했는데...대박.’

그녀의 웃음에 도하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전 이만.”

소명은 화가 난 것도 같고 무표정인 것도 같은 그의 표정을 보며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그토록 갖고 싶었던 아레카 야자 중에서 제일 큰 화분을 골랐다.

자기 몸보다 큰 화분을 들고 뒷좌석에 실어 잎이 앞좌석을 향하도록 놓고 나니 뿌듯한 마음이 솟아올랐다.

잠시나마 시름을 잊고 행복해졌다. 소명에게 화초는 친구 같은 소중한 존재였다.

그녀는 집으로 가 분갈이를 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머릿속에서 그녀의 긍정 에너지가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다 잘 될 거야. 그래. 다 잘 되고 말 거야.’

그녀가 자신의 몸집만 한 화분을 들고 낑낑대며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니?”

“어머니, 오셨어요?”

소명은 화분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그녀의 시어머니 정 여사에게 인사를 했다.

정 여사는 나이보다 젊어 보이고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소명이 들고 온 화분을 보고 정 여사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심히 화가 난 표정을 감추지 못해 얼굴에 다 드러났다.


“언제까지 사람을 세워둘 작정이야?”

“어머, 죄송해요. 어머니.”

소명은 화분을 옆에다 두고 비밀번호를 누르곤 말했다.


“어머니, 들어오세요.”

정 여사는 소명의 옆에 세워둔 화분을 잠시 노려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바로 소파에 앉아서 소명의 집을 하나하나 매의 눈으로 스캔하기 시작했다.

소명은 그런 정 여사의 눈치를 보다가 얼른 화분을 들고 베란다로 향했다. 화분을 놓고 얼른 거실로 나와 웃으며 정 여사를 보며 말했다.


“어머니, 차 드릴까요? 아니면 커피?”

“됐고, 앉아봐.”

“네.”

소명은 정 여사의 눈치를 보며 소파에 앉았다.


“너 내가 화분 그만 신경 쓰랬지? 지금 네가 이렇게 큰 화분을 들고 다닐 때가 아닌 거 모르겠니? 그놈의 회사 그만두라고 그렇게 말해도 십 년을 안 듣더니…… 이제야 내 말 듣나 싶었는데, 이제는 저 풀떼기 때문에 내 말을 또 무시하는 거야?”

“그게 아니고요. 어머니.”

“꼬박꼬박 말대꾸. 내가 그렇게 반대한 이유가 이렇게 드러나는 것을. 뭐가 좋다고. 내가 너한테 무리한 거 요구하니? 남들 다 갖는 아이 하나 원하는데? 너 몸 관리 이렇게 안 할래? 응?”

“어머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 너무 속상하고 힘들어요.”

“너만 힘드니? 네 꼴 보는 내가 더 힘들다. 어휴, 아무튼 너 한 번만 더 이렇게 무거운 거 들고 계속 그러면 내가 네 화분 다 없애 버릴 거야. 그런 줄 알아.”

정 여사는 소명을 노려보다가 현관문을 꽝하고 닫고 나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소명은 자신이 너무나 처량하게 느껴졌다.

항상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정 여사 때문에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도 지성을 보면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참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녀의 편은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울지 않으려고 숨을 가다듬었지만 헛수고였다. 그녀의 눈에선 맑은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지성은 전화 한 통이 없었다.

불을 끄고 혼자 쓸쓸히 앉아 있는데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고 지성이 오늘도 어김없이 술에 취해 걸어 들어왔다.

지성은 어두컴컴한 거실 안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소명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우, 깜짝이야? 소명아?”

소명은 지성을 보며 심각하게 말했다.


“얘기 좀 해.”

그녀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성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나 아주 피곤해.”

“얘기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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