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그가 떠났다.
(7/101)
제7화 그가 떠났다.
(7/101)
제7화 그가 떠났다.
2022.07.25.
소명의 두 눈에 눈물이 주르륵 주르륵 흘러내렸다. 울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도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너 내 고집 알지? 난 갈 거야. 이거 놔.”
“가지 마.”
그의 팔을 붙잡고 놓지 않는 소명을 쏘아보다가 지성은 그녀의 팔을 강제로 떼어내고는 성큼성큼 드레스 룸으로 가 캐리어에 그의 슈트를 하나하나 담았다.
멀리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소명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성이 캐리어를 끌고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현관문을 나가려 하자 소명의 달려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독기가 가득 찬 목소리 말했다.
“못 가! 우리 십 년 세월은 아무것도 아니니?”
지성은 말없이 소명을 바라보았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그녀의 눈과 자신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마음이 잠시 약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이상 휘둘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지성은 지금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녀가 아는 그녀의 남편이 맞나 생각될 정도로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소명이 슬슬 귀찮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예전의 청순하고 아름다운 소명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이렇게 우악스럽고 고집불통에 거머리같이 질긴 여자만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제 네가 지긋지긋하다고. 내 말 못 알아들어?”
“못 가. 가려면 나 죽이고 가.”
“허? 소명아, 너 이렇게까지 망가져야 하니? 비켜.”
소명이 앞을 가로막자 지성은 그녀를 힘으로 밀어버렸다. 그녀는 거실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녀는 그의 행동에 분노가 차올랐다. 그의 부인으로 산 십 년의 세월을 봐서라도 자신에게 이렇게 당당할 권리는 없었다. 그녀는 간신히 몸을 일으킨 후 지성을 향해 소리쳤다.
“안 지성!”
하지만 지성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뒤였다.
소명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세차게 눌러댔다. 그에게 당한 충격과 공포로 그녀의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 그녀는 간신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하필 엘리베이터 문 앞에는 도하가 서 있었다. 문이 열리자 도하와 소명의 두 눈이 딱 마주쳤다.
도하는 깜짝 놀랐지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소명은 온몸을 떨며 그런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지하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멀리 지하 주차장을 나가는 차를 향해 달려갔지만 차는 멈추지 않고 더 속도를 내며 달려가 버렸다.
도하는 그녀의 불안한 눈빛이 마음에 걸려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지하 주차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울고 있었다.
그녀의 가녀린 몸을 보고 도하는 마음이 아팠다. 누군가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 할 것 같은 도하였지만 사실 그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남자였다.
도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명 쪽으로 걸어갔다.
“저기요? 괜찮아요?”
소명은 비참한 자신의 몰골이 너무 창피하게 느껴졌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하려고 하는데 목소리에 울음이 가득 차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자꾸만 이 남자 앞에서 온갖 추한 꼴을 다 보이는 것 같아 민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명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뗐다.
“죄송하지만 저 좀 일으켜 주시겠어요. 다리에 힘이 풀려서…….”
“아…… 네.”
도하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살짝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를 부축하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그녀와 눈이 딱하고 마주쳤다.
그녀의 반짝거리는 눈망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그의 가슴 언저리가 저려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솔직히 캐묻고 싶기도 했다. 무슨 일이길래 이리도 힘들어할까?
그녀는 이래도 저래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소명은 일어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뭔 큰일이라도 겪은 사람처럼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얼굴은 너무도 창백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도하는 남 일에 상관하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이 여자에 대해서는 자꾸만 궁금증이 일어 미칠 지경이었다.
“아…… 아니에요. 너무 폐만 끼치네요. 어…… 그런데 대표님 여기엔 무슨 일로?”
하도 정신이 없어서 대표님과 자신이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만난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지도 않았지만, 조금 정신이 맑아지곤 대표님이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해졌다.
“저 여기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아! 네. 감사했습니다. 그럼 전 가볼게요.”
소명은 도하에게 인사를 건넨 후 비틀거리며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도하도 소명의 아파트 라인 쪽으로 걸어오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보니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었다. 소명은 엄청나게 어색한 표정으로 살짝 미소를 지었다.
도하 역시 같은 아파트 같은 동 같은 라인이라는 사실이 아주 당황스러웠다.
그 역시 쓴웃음을 지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층수를 누르려고 하는데 이미 소명이 누른 상태였다.
“헙.”
도하는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여자와 같은 층이라니.
그렇게 따지고 보면 건너편 집이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멈추었고 두 사람은 어색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소명이 먼저 도하를 보고 말했다.
“그럼, 들어가세요.”
“네.”
먼저 자신의 집으로 들어간 사람은 도하였다. 그가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소명도 터벅터벅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떠났다.’
그가 바람피운 것을 자신이 알게 된 후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 어떡하지, 라고 고민했었는데…….
그래도 쉽게 용서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그는 진심 어린 사과는커녕 자신을 미저리 취급하며 가방까지 싸 들고 집을 나가버렸다. 나름 평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녀의 인생에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 닥쳐버린 것이다.
집 안에 들어온 소명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믿어지지 않는 일, 하지만 그건 현실이었다.
******
지성은 이번에 완전히 라희와 함께 살려고 마음을 먹었다. 라희라는 여자는 어제는 청순했고 오늘은 한없이 섹시했다.
지성은 라희와 있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해서 소명이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미 소명도 알게 되었고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그는 결심이 선 단단한 눈빛으로 라희의 집 앞에 서 있었다.
라희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지성의 손에 들린 캐리어를 보고 놀란 눈으로 물었다.
“오빠, 어떻게 된 일이야?”
“나, 나왔어.”
“뭐?”
“다 말했어. 이혼하자고.”
지성의 말에 라희는 궁금한 표정으로 그에게 바싹 붙어 앉으며 물었다.
“그 여자가 뭐래?”
“음…… 바로는 힘들 것 같아.”
“왜?”
“가지 말라고 막 잡더라.”
“그래서?”
“그냥 짐 싸 들고 나왔어. 별수 있어. 내가 싫다는데. 지가 어쩔 도리가 없잖아, 이젠.”
“그래도 아직 서류 정리가 안 됐잖아.”
“곧 될 거야. 오빠만 믿어.”
“진짜지?”
“그래.”
“오빠 힘들었지? 씻고 와. 내가 안마해줄게.”
“정말?”
“응.”
라희는 지성을 바라보며 활짝 핀 표정을 지었다. 지성이 욕실로 들어가고 이윽고 샤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희는 아까 지성이 한 말이 자꾸만 귀에 맴돌았다.
“가지 말라고 막 잡더라.”
지성의 부인이 질기게 그에게 달라붙는다면 곤란해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라희는 현실적인 여자였다. 지성에게 접근하기 전 그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난 뒤였다.
그가 미혼이면 더더욱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부인이 있었다.
그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일자 그녀는 본격적으로 그에 대해 알아내려 노력했다.
다행히 그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아이가 없으니 이혼만 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부인이 이혼을 해주지 않는다면 그녀는 이혼을 해주기까지 불륜녀라는 낙인을 찍고 살아야 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하루빨리 그녀를 떼어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성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라희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품속에 폭 안겼다. 가녀린 그녀의 몸이 지성의 품으로 쏙 하고 들어갔다.
“흠, 오빠 냄새 너무 좋아.”
라희는 콧소리를 내며 지성에게 애교를 부렸다.
“행복이 별거야? 라희야! 나 정말 행복해.”
지성은 라희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라희야, 우리 살 집 알아보자.”
“응?”
“여긴 너무 좁잖아.”
“오빠!”
라희는 둘이 살 집을 마련하자는 지성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성은 재력 또한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는 남자였다.
원래부터 그는 부잣집 외아들이었고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일등 신랑감이었다. 라희는 지성의 품에 안겨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빠 재산 그 여자한테 얼마나 줘야 하는 거야?’
자신의 마음을 읽기나 한 듯 지성이 말했다.
“변호사 써서 재산 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담 좀 받아야겠어.”
“그럼, 오빠 불리한 거 아니야?”
“그렇겠지. 그러니까 여러모로 알아봐야지.”
“오빠, 안마하러 가자.”
“안마는 나중에.”
지성의 눈에 팍 하고 불꽃이 일었다. 지성은 라희는 번쩍 안아 올렸다.
그의 행동에 놀란 라희는 눈이 커졌지만 이내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빠, 뭐 해. 무거워. 내려놔.”
지성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라희를 바라보았다.
“가자.”
그는 라희를 안고 침실로 가서 그녀를 침대로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다가가 거침없는 키스를 퍼부었다.
라희는 그와 키스를 하며 그의 샤워 가운을 거칠게 벗겨냈다. 둘은 승리자의 쾌감에 젖어 더욱더 서로를 갈망하며 서로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
소명은 이제 정말 혼자였다. 이 큰 집에 지성 없이 혼자였던 적은 없었다. 항상 그와 함께였는데. 그녀는 아무런 의욕이 솟아나지 않았다.
그저 아플 뿐이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녀의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여태껏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왔단 말인가?
소명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정면에 떡하고 걸려 있는 지성과 그녀의 결혼사진을 노려보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냉담한 눈빛을 하며 창백한 쓴 웃음을 지었다. 모든 게 다 허탈하고 무의미했다.
액자로 다가가는 그녀의 숨소리가 점점 거세어졌다.
“흐후 흐…….”
결혼 액자를 바라보는 소명의 눈빛에 슬픔이 어렸다.
“네가 뭔데. 왜 이렇게 나를 아프게 해. 너무 아파서 죽을 것만 같다고!”
소명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눈물을 삼켰다.
“네가 뭔데.”
그녀는 액자를 꺼내 그녀의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소명은 이 액자를 던지면 그와 영원히 이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턱을 높이 추어올렸다. 그러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내 액자를 바닥에 세게 내동댕이쳐버렸다.
와당탕 소리를 내며 지성과 소명의 행복해 보이는 결혼 액자는 산산조각이 났고, 바닥 이곳저곳에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튀었다.
“가만 안 둬.”
소명은 독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반드시 복수할 거야.”
그녀는 부서진 액자를 눈을 부릅뜨며 쏘아보았다. 소명의 눈에서 쉴 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답답해. 미쳐버리겠어.”
소명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가슴을 치고 쥐어뜯었다.
이 집에 혼자 있는 게 싫었다. 그래서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유리를 밟아서 발바닥이 쓰라렸지만, 그따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소명은 밤거리를 한없이 걸었다. 남들이 보면 미친 사람이라 여길 만큼.
한참을 걷다가 그와 자주 가던 작은 술집이 눈에 들어왔다. 술집 안에 들어가 앉으니 여자 사장님이 웃으며 소명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오랜만에 오셨네요? 어? 남편분은요?”